218화
“다, 다들….”
젬이 핏발 선 눈으로 소리쳤다.
“다들 튀어!!!”
엄청난 고함.
전에 없이, 공포에 잠식된 표정.
“살고 싶으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쳐!!!”
능력자들이 젬의 지시에 재빨리 달아나기 시작했다.
* * *
마수의 서식지를 중심으로, 북쪽.
제2 격전지.
성기사단 소속, 제라드 슈미트가 지휘관으로 배치된 구역이었다.
―크아아아!
―그르르르…….
전장을 가득 메운 포효.
3m의 육중한 몸체를 가진 마수가 꼬리를 휘둘렀다.
“하, 젠장.”
가까스로 막은 제라드가 푸른색 검기를 실어 날렸다.
예상대로 난전이었다.
상대를 찢고 밟는 근육질의 강한 뒷다리와 날카로운 발톱.
엄청난 치악력을 자랑하는 수십 개의 이빨로는 물고 뜯었고, 굵은 꼬리로는 상대를 휘둘러 날렸다.
글렙터.
마법 능력이 없는 물리형임에도 그 공격력이 대단해 A급으로 분류된 마수.
“후방, 법사단! 엄호 강화해!”
명령한 제라드가, 빠른 속도로 제 뒤에 따라붙는 글렙터를 피해 거리를 벌렸다.
그때.
우뚝, 따라오던 마수의 발소리가 멎었다.
‘뭐지?’
제라드가 돌아보았다.
난투를 벌이던 수십의 글렙터가 일제히 멈춰 있었다.
하늘을 향해 대가리를 쳐든 채.
이윽고, 샛노란 동공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샥, 샥, 샥, 샥―
그리고는 거대한 머리를 전부 같은 방향으로 향했다.
소름 돋는 광경.
주변의 모두가 숨을 죽였다.
“뭐야!!!”
쿵, 쿵, 쿵, 쿵, 쿵!
이내 글렙터 무리는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속도로 어느 한 곳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이 반응은….’
새끼의 신변에 이상이 생겼을 때다.
“너, 이 미친 새끼야! 신호탄 쐈어?”
사색이 된 제라드가, 2인 1조로 저를 엄호하고 있던 성법사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선봉에서 토벌을 마쳤다는 신호도 보내지 않았는데, 후방에서 새끼를 건드렸을 리 없다.
“아닙니다, 지휘관님! 제가 설마 그런 실수를 했겠습니까?”
하지만, 성법사는 억울해했다.
“그리고 선봉의 동서남북 격전지에서 전부 신호탄이 보여야, 후방의 군대가 새끼를 잡기 시작할 겁니다. 누가 잘못 신호탄을 쐈다고 한들, 설사 네 구역이 전부 실수했을 리가 없어요!”
그래, 그의 말이 맞다.
제라드는 돌발 상황에 잠시 흐트러졌던 이성을 다잡았다.
“그럼, 설마….”
“후방에서 실수한 겁니다. 새끼를 건드린 거예요. 방향을 보니 서쪽 후방, 제5 격전지입니다.”
눈앞이 새하얘졌다.
후방에는 흥분한 글렙터 무리를 상대할 만한 전력이 없다.
그렇다면 분명.
많은 죽음이…….
일어날 것이다.
“쫓습니까?!”
허탈하게 서 있던 제라드가, 크게 한 번 고개를 털고 정신을 차렸다.
최대한 빨리, 명령을 내려야 한다.
“이탈한 놈들은 둔다!”
제라드는 전장에서 벗어나고 있는 글렙터들의 모습을 눈으로 좇으며 소리쳤다.
이미 잡을 수 없을 만큼 멀어진 개체는, 과감히 포기해야 했다.
“나머지만이라도 최대한! 빠져나가지 못하게 막아!”
* * *
“전부 퇴각하세요! 최대한 여기서 멀리 떨어지십시오! 당장!”
사색이 된 알프레도 경이, 퇴로를 가리키며 능력자들에게 후퇴 명령을 내렸다.
한순간에 아비규환이 된 전장.
“빠, 빨리! 너도!”
젬이 내 어깨를 붙잡았다.
“얼른!!!”
“아, 응!”
그때, 카일은 갑작스러운 명령에 당황했는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난 그에게 손을 뻗었다.
“얘! 너도 빨리…!”
“얜 놔둬!”
젬이 카일의 멱살을 틀어쥐고 내게서 떼어냈다. 그리고는 그를 벽에 거칠게 밀어붙였다.
“큭!”
“이 등신 새끼야! 너 뭐야? 안 배웠어? 글렙터 토벌할 때 새끼는 맨 마지막에 잡아야 하는 거 몰라?”
“아! 이게…? 저, 저는 이게… 그, 그 새끼인 줄 모르고….”
“닥치고!”
젬은 짧은 순간, 머뭇거렸다.
그리고는 입술을 짓씹으며 카일을 억지로 꿇어 앉혔다.
“…혼자 죽어.”
“네?”
“혼자 뒤지라고! 너 따라오면 우리 전멸이야!!!”
그때, 군대의 후퇴를 돕고 다가온 알프레도 경이 끼어들었다.
“맞습니다. 여기 남으십시오.”
“아….”
냉정한 말에, 카일은 겁에 질려 벌벌 떨었다.
순간 당황해서 침착하지 못했던 난, 둘이 카일에게 왜 이러나, 대체 이 상황이 뭔가 싶다가―
‘맞다!’
―곧 체시어가 가르쳐 줬던 마수의 특징을 떠올렸다.
“글렙터는 교감 능력이 엄청 뛰어나서, 모든 걸 느껴. 새끼가 죽었을 당시의 감정, 고통, 그리고 새끼를 죽인 대상의 흔적까지 알아봐.”
“만약 성체 토벌이 완료되지 않은 시점에 실수로 새끼를 잡았을 때는.”
마수들은 지금 이곳으로 달려올 것이다.
새끼를 죽인 대상을 인지하고 몰려오는 중이니, 카일을 따라다니며 공격하겠지.
“모여드는 성체들을 전부 상대할 전력이 안 된다면, 새끼를 공격한 대상 한 명만 남겨 두고, 최대한 빨리, 전부 흩어져야 해.”
‘지금 카일은 수백 마리 마수들의 어그로를 끌었다는 소리야.’
인간 폭탄이 되어버린 것이다.
“다 죽을 수는 없습니다. 두 분도 어서 퇴각하세요. 글렙터의 속도라면 십 분도 안 걸릴 겁니다.”
알프레도 경은 냉정했지만, 지휘관으로서는 최선의 판단을 내렸다.
“…….”
카일은 계속 떨었다.
알프레도 경도, 젬도 어쩔 수가 없다지만….
열두 살 어린아이에게 혼자 죽으라고 다그치기만 하는 상황을 지켜보는 마음이 괴로웠다.
‘자, 침착해. 침착하자, 리리스. 할 수 있어.’
나는 심호흡을 했다.
128가지의 변수나 예상했었는데도 거지 같은 운명은 꼭 나를 놀리듯 상상도 못 한 방법으로 찾아왔다.
마수들에게 공격당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해 봤고, 갑자기 지진이 나서 땅이 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다 해 봤는데….
‘설마 티라노사우루스 수백 마리가 전부 공격력 최대로 찍고 한 사람 잡으러 모일 줄은 생각 못 했다!’
그래도, 침착해야 한다.
이번 전투에서 내가 유념해야 할 사항은 두 가지.
1. 리리스 루빈슈타인이라는 진짜 신분을 들키지 않을 것.
2. 프리메라만 쓸 수 있는 능력을 사용하지 않을 것.
‘프리메라’의 존재를 숨기며 움직여야 하는 상황.
보는 눈이 있는 곳에서는 보통 능력자들과 같은 수준의 마법만 써야 했다.
‘내가 지금 카일에게 끌린 마수의 어그로를 푼다면?’
그런 마법은 없다.
대상을 조종하는 계열의 능력은 프리메라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글렙터 새끼가 죽은 걸 조금 전 이 자리에 있던 모두가 다 봤는데, 성체가 반응하지 않는다?
그 자체로 ‘여기 프리메라가 있다!’ 동네방네 광고하는 꼴이다.
‘그렇다면 공룡이랑 싸워야 하는 상황은 피할 수가 없어.’
그리고, 아마 지금, 이곳으로 오고 있을 레온은….
‘어그로 끌린 카일을 돕다가 위험해지겠지. 내 눈엔 다 보인다, 다 보여.’
태평하게 하품이나 쩍쩍 하다가 선봉의 부대가 성체를 토벌하면 한가로이 도마뱀 사냥이나 하면 되었을 후방에서….
하필 출정 경험이 없는 소년병이 문제를 일으켰고….
그게 생사를 걱정해야 하는 중차대한 상황으로 번졌다면….
‘카일의 잘못이라기에는, 이건 누가 봐도 운명의 장난이야.’
난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하며 심호흡을 시작했다.
오히려, 예상대로 착착 진행되고 있을 뿐인 거다.
‘이제 레온만 와 주면….’
그때.
“…레온 경?”
알프레도 경이 눈을 가늘게 뜨고 놀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군마.
흩날리는 금발만 보고도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다.
‘그래! 와라, 운명아!’
히이이잉―!
고삐를 당겨 말을 멈춘 레온이, 놀란 표정으로 내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뭐야. 무슨 일이야.”
모두 퇴각하고 썰렁한 격전지.
문제가 생겼다는 것쯤은 뻔히 보일 것이다.
“레온 경? 여긴 어떻게….”
예상치 못한 레온의 등장에 당황하던 알프레도 경이, 곧바로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실수로 글렙터 새끼를 잡았습니다. 제 불찰입니다. 이곳은 제가 맡을 테니, 레온 경께서도 서둘러 몸을 피하십시오.”
레온의 눈이 빠질 듯 커졌다.
난 단숨에 사색이 된 그의 표정을 보고 침을 꼴깍 삼켰다.
‘대체 글렙터가 얼마나 무섭길래 전장에서 몇 년이나 구른 오빠도 저리 놀라?’
나는 안 겪어 봐서, 지금 이들이 느끼는 공포에 도무지 공감할 수가 없었다. 어떤 의미로는 다행이랄까.
“경! 그게 무슨 소리예요?! 이게 왜 경의 잘못인데요! 이 자식이 혼자 일 친 건데!”
젬이 카일을 가리키며 목에 핏대를 세웠다.
“당신이 여길 왜 맡냐고요! 개소리하지 말고 같이 도망쳐요! 빨리!”
“아뇨, 저는 지휘관입니다. 책임을 져야 할 의무가 있어요. 이렇게 입씨름할 시간도 아까우니, 어서 도망치세요.”
지휘관은 도망쳐선 안 된다.
승리하지 못했다면, 그 전장에는 꼭 지휘관의 시체가 있어야 한다.
언젠가 악시온이 전장에서 죽을 뻔했던 경험담과 함께 내게 말해 주었던….
잔인한, 군인의 의무.
“얘가 죽였어?”
그때, 상황 파악을 마친 레온이 떨고 있던 카일을 턱짓했다.
그는 왜인지 묘한 눈으로 카일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너, 혹시…? 네가 카일이야? 카일 루덴도르프?”
레온의 질문에, 카일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 헛웃음을 터뜨린 레온이 이내 핏발 선 눈으로 허공을 향해 소리 질렀다.
“이런 X발!!!”
그는 분노한 듯 이를 갈았다.
“이럴 줄 알았어….”
꽉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애를, 대체 왜! 왜 전쟁터에 보내냐고!!!”
죽어 있는 새끼 마수의 사체.
벌벌 떨고 있는 어린아이.
참담한 상황에, 괴로운 고민에 빠진 레온은 이를 악물었다.
“너희들.”
곧, 레온이 카일을 들쳐 안았다. 그리고는 자기가 타고 온 말에 그를 태우며 우리에게 말했다.
“죽어라 뛰어.”
“예?”
알프레도 경은 당황했다.
“레온 경, 대체 지금 뭘 하시려는 겁니까? 그 소년병은 지금 글렙터 성체의 표적입니다!”
“나도 알아.”
“최대한 그 소년병과 떨어지셔야 한다고요!”
놀란 알프레도 경의 목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레온은 카일의 뒤에 훌쩍 올라타 고삐를 잡았다.
“혼자 놔두면 그냥 얘 혼자만 개죽음이지만, 내가 있으면 어떻게든 살 수 있을지도 몰라.”
“레온 경!!!”
레온은 우리를 내려다보며 마지막으로 당부했다.
“죽어라 뛰어. 나랑 반대로. 살고 싶으면, 절대 멈추지 마.”
그리고는 박차를 가했다.
두 사람을 태운 말이 퇴로와 반대 방향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아빠가 힘을 숨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