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화
태어나서 이렇게 예쁜 여자는 처음 봤다.
레온은 단언할 수 있었다.
“……기요? 레온 경?”
여자가 제 눈앞에 대고 손을 휘휘 흔들자, 그제야 레온은 퍼뜩, 정신 차렸다.
“어어!”
“괜찮으세요? 혹시 더 불편한 데 있으세요?”
여자의 표정에는 걱정이 한가득 묻어 있었다. 레온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아니.”
* * *
어디 더 아픈가?
난 창백한 얼굴로 멍청하게 어버버거리는 레온이 걱정됐다.
그래도, 환각 마법을 유지하느라 초당 생명이 타들어 가는 이 순간.
마냥 시간을 낭비할 수 없어 얼른 일어나는데―
“기다려!”
레온이 날 붙잡으며 같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음, 멀쩡해 보이는구만.
“이게 무슨 상황인지 설명은 하고 가야 할 거 아냐?”
“아, 네. 그쵸.”
올 것이 왔군.
어차피 피할 생각은 없었다.
레온과, 레온이 다친 것을 봤던 카일. 둘 다 도스.
도스 두 명의 기억을 조작하는 것보다는, 몇 마디 말로 레온을 꼬시는 게 내게는 이득이니까.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요….”
“아니다. 일단, 인사가 먼저지.”
레온은 허둥거리다가 말했다.
“고맙다. 덕분에 살았어.”
“아니에요.”
“그런데, 나 분명 모탈(*치유 마법이 들지 않는 상태. 내부 장기가 치명상을 입은 죽음 직전을 가리킴)인 것 같았거든?”
“그러셨구나.”
“그러셨구나……가 아니잖아!”
쓸데없이 예리하기는.
“해명해! 너, 용병 아니야? 대체 어떻게 날 고쳤어?”
“네! 그게요….”
“아무나 쓸 수 있는 마법 아니야. 모탈 부상병을 누가 살려? 마탑주나 할 수 있는 건데?”
“네네! 그러니까 그게….”
“그리고! 대체 어디서 나타난 거지? 용병이면 후방 전력 아닌가? 아까 퇴각한 제5 격전지에 있던 용병 맞지? 아니, 그렇더라도 여길 어떻게 왔어? 이렇게 빨리?”
“네에. 저에게도 말할 기회를 좀 주시면 안 될까요?”
레온이 멈칫했다.
“미안. 그래. 말해 봐.”
간다!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철저하게 준비한 ‘로잘린 베르사체 양’의 눈물겨운 성장 서사!
흠흠, 나는 목을 가다듬고 말을 시작했다.
“저는 제국 모 귀족의 사생아로 태어나서 길거리에 버려졌었죠. 참, 거지처럼 살았었는데….”
“…갑자기?”
울컥한 척, 소매로 눈가 한번 찍어 주고.
“그러다 능력자 불시 검문을 받고 10년 전 양성소에 입소했다가, 계급 받기 전에 몰래 도망쳐 나왔습니다.”
“뭐?”
“마법을 써 보면서 제가 생각보다 높은 계급일 거라는 확신이 들었거든요.”
“아니, 그런데 왜 도망을….”
“나라를 위해 몸 바쳐 싸우시는 레온 경께 드리기에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군인이 되기 싫어서 도망쳤어요. 그 길로 이솔렘 왕국으로 불법 망명했구요.”
“…….”
“하지만, 모국이 너무 그리워 향수병에 젖어 있던 저는 결국 3년 만에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저의 능력을 펼칠 수 있는, 전쟁터가 아닌 다른 곳을 찾아갔어요. 바로 마탑이었죠.”
“아?”
“지금 마탑주님은, 저의 아버지 같은 분이세요. 제게 많은 걸 가르쳐 주셨죠. 조금 전에 레온 경을 고쳤던 마법도, 마탑주님께 배운 거구요.”
“역시! 마탑주랑 관련이 있을 줄 알았어!”
바보 레온은 홀딱 속았다.
“지금 저는 신분이 없는 상태예요. 신분을 만들면, 불법 망명한 사실이 알려지니까요. 해서, 마탑주님의 크신 은혜로, 마탑에서 숨어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 거야…?”
“전 능력자의 의무를 지지 않고 도망쳤던 과거를 속죄하고자, 종종 이렇게 용병으로 출정하고는 해요. 그러니까, 레온 경.”
난 빌듯이 두 손을 모았다.
“그 점을 대견하고 가엾게 여겨 주신다면, 부디 오늘 일을, 그리고 제 신원을 모른 척해 주실 수 있나요?”
“…….”
레온은 멍하니 눈을 껌뻑였다.
“제발요….”
설마, 내가 목숨도 구해 줬는데.
착한 레온은 내 딱한 사정을 팔아넘기지 않을 것이다.
아니, 않아야 했다!
‘협조 좀 해 주라! 안 그러면 기억 조작해야 한단 말이야!’
걱정했지만, 다행히 레온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알겠어. 은인의 부탁인데, 거절할 수는 없지….”
“와, 감사합니다! 자비로우신 분인 줄은 소문으로 들어 알고 있었지만, 정말 마음씨가 바다처럼 넓으셔요!”
“아, 또 내 소문이 그렇게 났어?”
어쩐지 레온은 얼굴을 붉히며 코를 쓱 훔쳤다.
“잠깐, 너! 그러면!”
그러다 탄성을 내뱉었다.
“어쩐지! 글렙터가 적어도 뒤에 백 마리는 붙어야 하는데 생각보다 없더라니! 네가 다 잡은 거 맞지?”
엥.
뭔 소리지?
‘레온이 잡은 거 아니었어?’
그래. 사실, 도착했을 때 마수들의 사체가 별로 안 보여서, 심지어 그것들마저 다 죽어 있어서 당황하긴 했다.
‘어, 어쩐지 불길한데?’
오기 전에는 분명, 레온이 감당 못 할 숫자가 따라붙었을 테니 내가 잡아야겠구나, 하는 각오도 했고….
다 잡은 다음, 레온의 검에 죽은 것처럼 사체를 꾸며 놓을 생각까지 했었는데….
“뭐야? 네가 잡은 거 아니야?”
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저 아닌데요.”
* * *
체시어는 눈앞이 아찔했다.
전속력으로 말을 달려 뒤를 쫓고 있지만, 그는 이미 느끼고 있었다.
잡을 수 없을 것이다.
점점 멀어지기만 하는 마수들.
흥분한 글렙터들의 속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왜 이렇게 되는 걸까.’
후방에서 글렙터 새끼를 건드렸을 것이다.
선봉 격전지에서 최대한 막았을 테지만, 그럼에도 빠져나온 글렙터는 대략 백여 마리.
저들은 지금 누구를 표적으로 삼고 달리는 것일까?
레온?
리리스?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건, 표적이 누구든 저 백여 마리의 마수를 상대하는 것은 분명 리리스일 테다.
왜냐면, 이게 바로 레온에게 드리웠을 ‘죽음’이라는 운명…….
그 신호탄이 분명해 보이니까.
‘형은 저 마수들을 다 상대하지 못해.’
레온뿐 아니라 지금 전장에 있는 그 누구도 감당할 수 없다.
‘그렇다면 리리스가 어떤 식으로 마수들을 처리하든, 이 상황에 의문점이 남지 않을 수가 없어.’
정체를 들키지 않으려면, 리리스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그냥 도망쳐야 했다.
하지만… 리리스가?
리리스가, 제 정체를 숨기기 위해 레온을 포기할까?
“만약 레온 형을 살리지 못하게 되더라도… 네가 위험해지는 순간이 오면, 도망쳐. 아무것도 하지 말고.”
“응, 그럴게.”
체시어는 힘없이 웃었다.
그는 리리스를 누구보다 잘 안다.
그래서, 그 약속이 절대 지켜지지 않으리란 것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달리는 말 위에서, 체시어는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떨리는 손이 검 손잡이를 가만 쥐었다.
‘공작님.’
그는 에녹의 얼굴을 떠올렸다.
은인이자 스승.
체시어에게는, 에녹도 리리스만큼이나 그 의미가 컸다.
리리스를 위해서 살겠다고 결심했지만, 그래서 기꺼이 황제를 죽이겠다고 마음먹은 것이었지만.
그 길은 또한, 에녹이 항상 바라왔던 정의이기도 했다.
이 땅에 정의를 세우려는 에녹의 고결한 목적과 리리스를 지키고자 하는 제 삶의 목표가 합치하는 결말.
그렇기에 체시어는, 이미 오래전 황제의 목숨을 거둘 수 있을 만큼 성장했음에도….
모두의 뜻을 존중하며, 숨을 죽여 달려온 것이었다.
“축하한다. 드디어 너도 검의 끝을 봤구나.”
검의 경지에 이미 도달해 있던 에녹.
그리고, 2년 전.
그의 모든 가르침을 받아 마지막 검술을 완성한 체시어.
“이건 내가 깨우친, 가장 강력한 검술이야. 초신속의 검기로 공격 사정거리의 한계치를 넘길 수가 있지.”
하이 엘레바도(High Elevado).
“이 검술이 바로… 황제가 나를 탐내왔던 이유고, 이솔렘 왕국의 철벽 방어를 뚫을 수 있는 열쇠다.”
실로 파괴적인 힘이자,
검술의 끝이었다.
“최후의 순간에 나를 상대해야 하니, 어쩔 수 없이 너에게 이 검술을 가르쳤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네가 이 경지까지 다다랐다는 걸 황제에게 들켜서는 안 돼.”
“그러면 더 이상, 황제는… 기다릴 이유가 없으니까.”
최후의 최후까지 내보여서는 안 되었을 힘.
단신으로 능력자 수백, 아니, 수천과도 맞먹는 저력을 내는 파괴적인 검술.
이를 깨우친 사실을 황제가 알게 된다면….
에녹의 말처럼, 체시어의 성장을 기다리고 군대를 훈련하며 천천히 침공을 준비하던 그는, 더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이제 반년. 딱, 반년만 기다리면 됐었는데.’
체시어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선봉의 네 격전지에서, 이탈하는 마수들을 쫓기 위해 보낸 추격대가 50명은 더 되었다.
“젠장할! 후방 공격이 어렵나?”
“어렵습니다! 공격 시전 범위를 한참 벗어났습니다!”
“뒤에서 잡을 수는 없어요! 계속 추격만 해야 합니다!”
이들이 전부… 보게 될 것이다.
지금 자신이 하려는 행동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까.
모르겠다.
다만 또 확실한 것은, 당장 내일이라도 황제가 침공을 명하리라는 사실이었다.
‘죄송합니다, 공작님.’
체시어는 검을 뽑았다.
‘당신을 닮고 싶었는데…. 역시 저는, 그럴 수 없는 인간이에요.’
전쟁.
곧 제 손끝에서 생겨날, 수많은 이들의….
피.
죽음.
희생.
그 모든 것의 무게가…….
자신에게는. 리리스, 그 한 명의 목숨보다 가볍다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쉬이이익―!
그 순간이, 체시어는.
지독히도 괴로웠다.
메마른 허공을 가르며 순식간에 뻗어 나간 흑색 검기.
손쓸 틈도 없이 벌어졌던 거리가 무색하게, 날카로운 공격은 멈추지 않고 날아갔다.
“…….”
마수들이 일제히 진격을 멈추었다.
즉사(卽死).
상상도 할 수 없는 속도에, 죽은 채로도 멀쩡히 서 있던 백여 마리의 글렙터들은, 이윽고.
“허, 허어….”
“무슨…?”
분수처럼 피를 뿜으며, 머리와 몸이 분리된 채로 처참히 나뒹굴었다.
“…….”
“…….”
히이이잉―!
모두 놀라 말을 멈추었다. 주변이 경악하며 체시어를 돌아보았다.
충격.
침묵.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말문을 잃고, 누군가는 다물어지지 않는 입을 겨우 손으로 막은 채…….
“…….”
충격적인 저력을 내보인 사령관을 주시했다.
툭.
체시어의 손에 들려 있던 검이, 힘없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아빠가 힘을 숨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