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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힘을 숨김-222화 (223/261)

222화

‘그래, 이걸로 된 거야.’

괴로움을 삼키려, 체시어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조금 전, 그의 선택은…….

끝내 한 명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수만 명의 목숨을 외면하고야 만 것과 같았다.

“저어… 사사사령관님…?”

“…….”

함께 글렙터들을 쫓던 부관 한 명이 겨우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체시어는 천천히 눈을 떴다.

덜덜 떨며, 사색이 되어, 자신을 주시하는 시선들. 모두가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더 쫓을 필요 없다. 우려했던 후방 피해는 없을 테니 굳이 표적을 찾지 마라.”

체시어는 그 누구보다 혼란스러운 상태였지만, 그럼에도 명령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탈한 마수들은 다 제거했으니 전부 주둔지로 돌아가 전열을 가다듬어라.”

혹시라도 누군가 리리스의 행적을 알게 되는 일이 없도록, 보는 눈을 줄이는 것만이 최선이었다.

“예, 예!”

“다들 격전지로 돌아간다!”

명령을 받은 군인들이 말 머리를 돌려 선봉 격전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리리스.’

마지막까지 남은 체시어는, 말에서 내려 마수들이 돌격하던 쪽을 쳐다보았다.

‘나는… 괜찮아. 정말, 괜찮아….’

그리고 세뇌하듯 자신을 달랬다.

사람의 목숨을 저울질하지 말라 가르쳤던 에녹.

그러나 꼭 저울질해야만 하는 때가 오면, 괴로워도 많은 이들을 살리라고 했던 에녹.

‘나는, 처음부터….’

체시어는 떨리는 손으로 버려진 검을 주웠다. 이윽고 다시 말에 올라 고삐를 잡고, 말 머리를 돌렸다.

‘처음부터….’

그 옛날, 죽어가던 저에게 손을 내밀었던 천사가 마음속에 무겁게 주저앉아버렸을 때부터.

‘…이런 인간이었어.’

어차피, 단 한 번도.

그의 저울은 다른 쪽으로 기운 적 없었다.

* * *

황제, 니콜라스의 방.

뒷짐을 진 채 벽에 걸린 지도를 주시하는 니콜라스의 눈빛에는 날이 서 있었다.

이솔렘 왕국 침략 전쟁.

모든 준비가 순조로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니콜라스의 신경 줄을 갉아먹는 것은 에녹의 행보였다.

‘빌어먹을 놈.’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하는 동안 손쓸 수 없이 변해버린 제도.

평민들 사이에서는 연일 시위가 일어났다. 고작 몇 년 만에 황제인 저를 향한 복종심과 경외감이 추락했다.

담대한 누군가는 계급제가 더 이상 두렵지 않다고 말하고 다녔다.

‘만족할 줄을 모르는군, 에녹.’

물론, 여전히 계급제를 유지하려 평민들을 짓밟고 홀대하는 역할을 해 주는 이들은 있다.

하지만, 일부였다.

정작 핵심 권력층과 고위 귀족은 신중하게 행동했다.

아마 걷잡을 수 없이 입지가 커져 버린 에녹의 눈치를 보는 것일 테지.

‘네놈이 끝내 바라는 것이 뭔지, 어디까지 가려는 것인지….’

알고 있다.

같은 인간과 인간 사이를 나누는 선명한 경계. ‘계급’.

그것을 파내는 것이 에녹의 최종 목표겠지.

‘여유가 없어. 더 기다릴 시간이 없다.’

이 어수선해진 분위기를 바로잡고 다시 황실의 위상을 세울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대륙 통일.

그 유일한 열쇠인 체시어 리브르.

그가 맥없이 실패한다면 니콜라스에게는 남은 전력이 없었다.

그렇기에, 확실한 성공을 위하여 천천히 성장을 기다려 왔지만….

‘대체 언제쯤, 에녹의 발치에라도 닿을 수 있는 건지.’

니콜라스는 꽉 주먹 쥐었다.

곧 들려올 기쁜 소식을 모르는 채, 평소처럼 초조해하던 어떤 날이었다.

* * *

“네가 잡은 게 아니었다고?!”

레온이 입을 떡 벌렸다.

“야야야! 그럼, 분명히 여기로 더 올 거야. 내가 오면서 새끼를 엄청 많이 죽였거든?”

“…?! 왜, 왜죠? 왜 그런 짓을?”

“내가 데리고 도망갔던 소년병이 글렙터의 표적이었어. 그 애 말고 나 쫓으라고 그랬지.”

“아니, 뭔!”

“…….”

“…희생정신이 투철하시네요.”

“야! 이럴 때가 아니야! 너 얼른 도망가! 나랑 떨어져야 해!”

“자자잠깐만요.”

난 휙 돌아서 로브 소매를 걷어 팔찌를 보았다.

‘지금 레온을 표적 삼고 여기로 오는 공룡들 다 잡으려면 생명력이 얼마나 들지?’

제발 조금만 들길 바라면서….

‘어라?’

그러나 팔찌에는 아무것도 뜨지 않았다.

난 이 반응을 알고 있다.

옛날, ‘회귀 마법의 대가로 죽는 오스카를 살리려면 생명력이 얼마나 드나?’ 물었을 때도 같은 반응이었다.

그때 팔찌에 값이 뜨지 않았던 이유?

‘전제 조건 자체가 틀렸기 때문이었지.’

회귀 마법의 대가는 오스카의 목숨, 즉 죽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마찬가지.

‘레온을 표적 삼고 여기로 오는 공룡들’이 없단 뜻.

나는 안심하고 돌아보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레온 경. 마수들은 안 와요.”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아!”

난 허둥거리다가 이내 무릎 꿇고 바닥에 손바닥을 짚었다.

“사실 제가 고도의 감지 마법으로 알아보았습니다.”

“……?”

레온이 눈을 껌뻑였다.

“그런 마법도 있어?”

“네. 실은 마탑에는 공개되지 않은 마법들이 꽤 있거든요. 전부 마탑주님이 만드셨죠. 제가 여기로 빨리 올 수 있었던 것도… 대충 아무도 모르지만 어쨌든 존재하긴 하는 어떤 마법 때문이었달까요?”

“…….”

레온은 멍하니 내 말을 듣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 죽은 사람도 살리는데 뭐, 그런 마법도 있겠지.”

역시. 오스카 팔면 안 먹히는 게 없군.

“그런데, 레온 경. 이게… 당연히 알려지면 안 되는 거라서요….”

“알아, 알아.”

레온은 선뜻 고개를 끄덕여 줬다.

“네가 쓴 마법들이랑, 너 마탑에 숨어 살고 있다는 거랑, 네 신원이랑 다 모르는 척해 주면 되지?”

“우와아! 네!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데….”

레온이 난처한 듯 이마를 짚었다.

“나 다 죽어가던 건, 같이 온 애가 알고 있거든.”

그는 심각하게 고민했다.

“모탈 상태였다는 거야 잘 모르겠지만, 오른팔 날아갔던 건 걔가 다 봤는데….”

“…….”

“아! 아아, 있다. 입 맞춰 줄 사람 있으니까 괜찮겠다.”

그래, 있겠지.

레온이 생각하는 사람은, 이번 출정 병력인 성법사단장 율리안 경이 틀림없었다.

참고로 율리안 경은 3년 전에 우리 반란 세력에 합류했다.

“그럼 전 레온 경만 믿고 이만 가 보도록….”

“잠깐!”

오빠, 제발!

지금 귀여운 여동생의 수명이 1초마다 줄고 있단 말이야!

난 울먹이며 가려던 걸음을 다시 돌렸다.

“너 마탑에 사는 거면, 혹시 알아? 리리스. 내 사촌 여동생이야.”

“앗! 음, 네에. 알죠?”

그게 바로 저예요.

“리리스도 너 알아?”

“엄, 네에.”

“그렇구나.”

“그럼 전 이만 가 볼….”

“이름이 뭐야?”

아오!

끈질겨!

“제가 사정상 본명을 안 쓴 지는 오래 됐구요….”

“가명이라도. 뭐, 불리는 이름 있을 거 아냐?”

“로잘린 베르사체예요.”

“로잘린. 그래….”

고개를 끄덕인 레온이 말했다.

“정말 고맙다. 너 아니었으면 죽을 뻔했어. 잊지 않고, 꼭 사례할게.”

“아뇨, 괜찮아요.”

“아니야. 빚을 졌으면 갚아야지. 가만있자….”

잠시 뭔가 생각하던 레온이 “아!” 탄성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제 오른쪽 귀에 달린 루비 귀걸이를 빼서 내게 건넸다.

“…이걸 왜? 이게 사례인가요?”

비싼 거긴 한데.

“아니야. 내 목숨을 살려 줬는데 고작 보석 하나로 퉁칠까 봐? 그거 가지고 나 기다려. 받으러 갈게.”

“네? 아아니, 뭐, 사례 때문에요? 저를 찾아오신다구요? 진짜 그러실 필요 없는데?”

“가지고 있어.”

레온은 억지로 내 손에 귀걸이를 쥐여 줬다.

‘아, 왠지 거짓말했다가 일 커진 것 같은데.’

하지만, 1초마다 생명력이 타들어 가고 있는 와중에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난 하는 수 없이 레온의 귀걸이를 품에 넣고 인사했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레온 경, 부디 몸조심하세요! 꼭 살아 돌아오셔야 해요!”

“어어, 그래.”

레온은 헛기침하며 제법 다정하게 손을 흔들어 줬다. 난 그 모습을 눈에 담고 재빨리 달아나기 시작했다.

* * *

로잘린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던 레온은, 터덜터덜 걸어가 글렙터 사체의 아가리를 벌렸다.

‘로잘린….’

그리고, 글렙터의 머리에 박혀 있던 제 검을 뽑아내며 그녀의 이름을 되뇌었다.

가명이라고 했지만….

어쩐지, 붉은 머리카락과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흠.”

레온은 제자리에서 두어 번 뛰고 팔도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말끔히 나았다.

분명 죽기 일보 직전이었는데.

‘제5 격전지 용병이었으면, 내가 애 데리고 도망갔던 걸 봤나? 걱정되니까 따라온 거겠지?’

로잘린의 행동은 상당히 무모했지만, 어쨌든 그녀가 아니었다면 레온은 꼼짝없이 죽을 뻔했다.

사례는 정말, 제대로 해야겠어.

―생각하면서 레온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때.

쿵, 쿵, 쿵, 쿵, 쿵.

“뭐야!”

글렙터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안 온다며?!”

레온은 당황하며 검을 바로 쥐고 바짝 경계했다.

쿵, 쿵, 쿵, 쿵, 쿵.

불길한 소리는 계속 났다.

“…….”

그런데, 어째.

자세히 들어 보니, 글렙터의 발소리는 아닌 것 같다.

“뭐야…?”

쿵, 쿵, 쿵, 쿵, 쿵.

소리의 근원지를 찾은 레온은, 제 가슴 위에 가만히 손을 올렸다.

심장이 꼭,

육중한 마수의 발소리처럼 울리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레온 경, 부디 몸조심하세요! 꼭 살아 돌아오셔야 해요!”

떠나는 순간까지 자길 걱정해 주던 미인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는다…….

“아, 씨. 뭐야, 진짜~!”

괜히 투덜거린 레온이 서둘러 발을 떼었다.

아빠가 힘을 숨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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