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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힘을 숨김-223화 (224/261)

223화

* * *

반란군의 소집 회의.

죽을상을 한 에녹과 킬킬거리는 악시온, 그리고 둘을 보며 헛웃음을 터뜨리는 조제프가 모여 있었다.

“으어어. 진짜 미치겠네.”

에녹은 눈 밑이 까매진 얼굴로 제 뺨을 쭉 쓸어내렸다.

“뭐가 걱정인데.”

에녹이 뭘 걱정하는지 뻔히 알면서도 악시온은 짓궂게 물었다.

에녹이 그를 휙 노려보았다.

“몰라서 묻냐?”

“아니,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내 아들 그렇게 생각 없는 녀석 아냐.”

리리스의 비밀 연애를 알게 된 이후로 에녹은 걱정이 많았다.

귀가 얇은 편은 아닌데, 아무래도 딸의 일이라서일까?

‘남자는 다 짐승’이라던 오스카의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정작 체시어는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이미 에녹의 신뢰를 반쯤 잃어버린 상태였다.

“오늘 체시어 경이 돌아오시니 이리 걱정이 많으신 건가요?”

조제프가 웃으며 묻자, 악시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남부로 떠났던 마수 토벌대가 귀환하는 날.

안 그래도 셋은 지금, 체시어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쟁터에 갔던 남자 친구가 돌아오는 날을, 리리스는 얼마나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을까?

“저저절대 외박 허락해주지 마라.”

에녹이 심각하게 말했다. 테이블 아래로 긴장한 다리가 덜덜 떨리고 있었다.

“내 아들이 짐승이냐? 리리스가 먼저 외박하자고 꼬실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뭐, 이 자식아? 미쳤냐? 설마 우리 공주가 그러겠냐? 어?”

에녹이 질겁하며 악시온의 멱살을 잡았다. 그 반응이 웃긴지 악시온은 놀리듯 끅끅 웃었다.

조제프는 둘의 모습을 지켜보며 웃고 있었지만….

‘에고, 걱정이네.’

속으로는 연신 한숨을 삼키는 중이었다.

“조제프, 무슨 일 있나? 표정이 영 별론데.”

악시온이 여전히 에녹에게 멱살 잡힌 채로 물었다.

예리한 질문에 조제프가 놀랐다.

‘표정 관리도 안 될 정도였나.’

조제프는 머뭇거리다가, 이내 푹 한숨을 쉬며 말했다.

“실은… 제가 작업 중이던 황실 정예군 쪽이 영, 호락호락하지 않아서요.”

반란군은 모든 준비를 마쳤다.

황제가 침략 전쟁을 명하는 그날.

그날이 곧, 거사일이었다.

에녹을 필두로 한 반란군이 들고일어나 황제의 정예군들과 맞설 것이다.

동시에, 이솔렘 왕국으로 출정했던 체시어의 군대는 회군하여 황실을 점거할 예정이었다.

“…비능력자들 때문이지?”

악시온이 어두워진 얼굴로 묻자, 조제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능력자의 수보다 비능력자의 수가 훨씬 많다. 제도는 물론, 제도 근방 영지까지.

반란이 일어나면, 황제는 에녹의 전력을 분산시키려 할 것이다.

그에 사용할 방법은 딱 한 가지.

안 봐도 뻔하다.

‘비능력자들을 학살하겠지.’

그렇다면 학살을 막으며 황제의 군대와 맞서야 하는 에녹의 전력은 분산될 수밖에 없다.

‘학살당하는 평민들을 외면하고 빠르게 황제의 목을 칠 수도 있지만, 공작님은 당연히 그런 선택을 하실 분이 아니니….’

그래서 조제프는, 황제의 뜻에 따라 학살을 자행할 정예군의 수뇌부 귀족들을 포섭하려 했었다.

거기까지 성공해야 비로소 모든 준비가 끝나는 것이다.

하지만… 쉬울 리가.

애초에 그들은 계급제에 푹 젖어 황제의 손아귀를 떠날 생각이 없는 인간들이었다.

‘모든 준비를 마쳤는데, 딱 그 점 하나만 염려스럽군. 책사가 제일 밥값을 못하고 있다니, 이거 원.’

조제프가 심각한 표정으로 걱정하는데―

“맞다!”

―에녹이 탄성을 터뜨렸다.

“말해 주려고 했는데, 깜빡했네. 미안. 울 공주 때문에 내가 정신이 없어서.”

에녹은 웃으며 품 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뭐지? 마법식?’

그걸 본 조제프는 의아했다.

“이게 뭡니까?”

“하하하!”

에녹이 호탕하게 웃으며 마법식을 툭툭 가리켰다.

“걱정하지 마. 바로 이게, 자네가 지금 염려하는 점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니까.”

“예?”

“그 문제만 해결되면, 준비는 다 끝나는 거 맞지?”

자신만만한 에녹의 말투가 믿음직해서, 조제프는 반색했다.

“예, 맞지요. 대체 이게 뭔데 그러십니까?”

에녹이 씩 웃었다.

“우리 천재 마탑주께서 친히 제공해 주신, 최후의 비기지.”

* * *

“최고의 차기 마탑주!”

난 부끄러워하는 한스의 옆에서 열심히 손을 팔랑거렸다.

“한스, ‘천재’라는 단어는 너를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닐까?”

“그, 그만 띄워….”

에이, 좋으면서.

한스는 귀까지 빨개져 있었다.

‘이렇게 좋은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을 줄이야!’

레온을 살린 뒤, 부상병들이 속한 선발 귀환대에 섞여서 먼저 제도로 돌아왔던 나.

그런 나를 기다리고 있던 아주 기쁜 소식.

바로, 우리 마탑 영재반의 에이스 한스가, 3년을 공들여 연구하고 있던 마법식을 드디어 완성한 것이다!

‘마나가 없거나 적다는 개념이 있는 사람만 만들 수 있는 마법식이라, 연구할 수 있는 게 머리 좋은 비능력자인 한스뿐이었지.’

똑같은 마법을 보다 적은 마나로 시전하는 획기적인 마법식.

쉽게 말해, 디에즈 계급의 능력자들이 셉티마 계급의 능력자들을 무리 없이 상대하도록 해 준다.

반란의 날.

황제의 군대가 평민들을 학살하려 하면?

이 마법식으로 전력 차를 극복한 디에즈 용병들이 충분히 그들을 막을 수 있다.

‘그럼 평민들을 지키면서 싸워야 할 우리 반란군의 고급 전력이 괜히 분산될 염려도 없지.’

난 키득키득 웃었다.

“고생 많았다, 한스.”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오스카가 흐뭇하게 칭찬했다.

‘어흑흑. 최고의 마탑주! 솔직히 이번에는 스승님이 혁명 성공의 주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난 새삼 코끝이 찡해졌다.

오래전부터 평민 영재들을 모으고, 이 마법을 연구하게 했던 건 오스카였다.

“가지고 싶은 거 없냐?”

“네?”

“뭐든 말해 봐. 3년이나 내가 내준 숙제 하느라 고생했는데, 보상은 제대로 해 줘야지.”

오스카가 거만하게 척, 다리를 꼬며 말했다.

와!

재벌 회장이 갖고 싶은 걸 뭐든지 말하라고 하는 이 순간!

나는 허둥지둥 한스에게 조언했다.

“한스! 집 한 채 해 달라구 해! 마탑주님 있는 거 돈뿐임!”

“맞아. 나 있는 거 돈뿐이니까 괜히 눈치 보지 말고 아무거나 다 말해.”

“어어. 저, 그러면….”

부끄러워하는 얼굴로 한참을 고민하던 한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루만 휴가를 받고 싶은데…. 놀고 싶어요.”

오스카가 대번에 인상을 찌푸렸다.

“고작 그게 다야? 너 쉬고 싶은 만큼 쉬어. 그런 건 보상이 아니니 다른 걸 말해.”

“마, 마탑주님이랑 같이요….”

“뭐?”

덧붙이는 한스의 말에 오스카가 눈을 껌뻑거렸다.

‘아하.’

난 입을 막고 쿡쿡 웃었다.

역시, 이 오스카 바라기…….

“아뇨! 무리한 부탁이라면 괜찮습니다! 그… 바쁘실 테니까요….”

“아니야! 스승님 한가해!”

난 한스에게 팔짱을 꼈다.

“우리 할아버지가 옛날에 나 생일 선물로 주신 엄~청 근사한 땅이 하나 있거든? 거기에서 말 타고 놀래? 아, 그런데 마탑주님이랑 단둘이 놀고 싶은 거지?”

말 타고 놀자는 내 말에 한껏 들뜬 표정이 된 한스가, 휙휙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너 있어도 상관없는데….”

그리고는 살며시 오스카의 눈치를 봤다. 오스카만 있어 주면 좋은 모양이었다.

“참, 나.”

픽 웃은 오스카가 일어났다.

“좋아, 가자. 말 나온 김에 지금 당장.”

“우와!”

난 만세를 했다.

“한스, 말 타러 가기 전에 우리 의상실도 가자! 너, 옷 사게!”

“…옷?”

두꺼운 안경.

한스의 시그니처나 다름없는 체크무늬 와이셔츠.

‘휴가 받은 김에 이 공대 너드남 스타일도 좀 바꾸자고!’

나는 들떠서 발을 굴렀다.

“그리고, 고기! 고기도 먹자! 고기 사 주세요, 스승님!”

“그놈의 고기는….”

큭큭 웃은 오스카가 회장님처럼 멋진 포즈로 겉옷을 휘릭 걸치고 손을 까딱했다.

“가자, 애기들.”

* * *

“…죄송합니다.”

체시어는 고개를 숙였다.

스승 에녹을, 아버지 악시온을, 책사 조제프를….

반란에 사활을 걸었던 모두를 볼 낯이 없었다.

“이번 전황이 보고되면, 황제가 당장 출정을 명할 겁니다. 군대를 정비하겠다는 명목을 내세울 생각이지만, 제가 벌 수 있는 시간은 길어 봤자 한 달 정도일 것 같습니다.”

체시어는 토벌을 마무리하는 내내, 괴로워하며 고민했다.

아직 준비를 마치지 못한 반란군.

그러나, 자신이 숨겨 놓았던 저력을 내보임으로써 그 전에 발발하고야 말 전쟁.

“제가 모든 것을 책임지겠습니다.”

명분이 있는 반란을 완성하고, 함께 살고 싶었다.

살고 싶었으나….

이제는 그럴 수 없었다.

체시어에게 리리스 한 명의 목숨은 수만 명의 목숨보다 무거웠으나….

자신의 목숨은 그렇지 않았다.

저울질할 필요도 없었다.

자신이 한 선택의 대가는, 자신이 치러야 했다.

그것이 체시어가 며칠 동안 고민하며 내린 결론이었다.

“…….”

모두를 볼 낯이 없어 고개 숙이고 있던 체시어의 앞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에녹이었다.

“체시어 리브르.”

분노한 표정. 그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냉정한 얼굴로 속삭였다.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긴 하나. 내가 그렇게 능력을 숨기라고 당부했는데.”

“죄송합니다.”

눈을 감은 체시어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제가 모든 것을 책임지고, 출정을 명 받는 날, 황제를….”

“풉.”

순간, 못 참고 터진 웃음소리에 체시어의 고개가 들렸다.

“아하하하!”

에녹이 배를 잡으며 웃고 있었다.

“참, 짓궂으셔.”

조제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일어났다.

“그럼 뭐, 잘됐네요. 거사일은 한 달 뒤로 잡으면 되겠군요.”

“어휴, 진짜. 길었다, 길었어.”

악시온도 기지개를 켜며 따라 일어났다.

체시어는 이해할 수 없는 그들의 반응에 당황했다.

“체시어.”

한참 웃다가 다시 진지한 표정이 된 에녹이, 체시어의 어깨에 손을 턱 올렸다.

그리고는 말했다.

“외박하지 마라.”

“…예?”

“아하하하하!”

“그만 좀 해라, 그만 좀.”

다가온 악시온이 쯧쯧 혀를 차며 에녹의 어깨를 밀쳤다.

눈꼬리에 눈물까지 매단 채 밀려나던 에녹이, 안쓰러운 눈으로 체시어를 보았다.

“며칠 동안 혼자 속 썩었겠네.”

“…….”

“지금까지 고생 많았다, 체시어. 오히려 잘됐어. 우리도, 어차피 더 기다릴 이유가 없으니까.”

체시어는 멍하니 에녹을 보았다.

그의 푸른 눈은, 언제나처럼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제 모든 걸 끝낼 시간이다.”

아빠가 힘을 숨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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