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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힘을 숨김-224화 (225/261)

224화

* * *

살금살금.

까치발로 집을 나서려는데, 뒤에서 음산한 기운이 느껴졌다.

“공주, 어디 가?”

“깜짝아!”

대체 언제 왔는지 모를 아빠가 뒤에 서 있었다. 난 벌렁거리는 심장을 붙잡았다.

“이런 빈집털이범 같은 걸음걸이로 아빠 몰래 대체 어딜 가려는 걸까?”

“나? 나 옆집에….”

“옆집? 삼촌 집? 왜?”

“으응. 오늘 체시어 돌아오는 날이잖아. 잘 갔다 왔는지 걱정되기도 하고 안 다쳤는지도 보고…. 내, 내일 황실에 전황 보고하러 가면 당분간 집에 못 올 테니까 오늘 보려구….”

“그런데 왜 까치발 들고 걸어?”

“…사람들 다 자니까 깰까 봐.”

“초저녁에 누가 자?”

“…….”

난 할 말을 잃었다.

아빠는 씩 웃으며 내 손을 잡고 질질 끌듯이 다시 방으로 올라갔다.

“이 밤에 어딜 가려고. 걱정되면 아빠한테 물어봐. 아빠가 말해 줄게. 오늘 체시어 만나고 왔으니까.”

“그랬구나.”

“체시어는 다친 데 없이 돌아왔어. 토벌도 무사히 마쳤고.”

“레온 오빠도?”

“응. 다 무사해. 걱정하지 마.”

“다행이네.”

사실 내가 묻고 싶은 건 그런 게 아니었다.

계속 마음에 걸렸던 점.

‘레온을 쫓아오던 마수들이 없었다는 게 수상해. 레온도 이상해했으니까.’

레온에게 백 마리는 따라붙었어야 했다는 마수들.

난 능력을 써서 레온이 마수들을 다 잡은 것처럼 꾸며 놓을 생각이었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리스크가 엄청 컸겠지. 솔직히 미친 생각이었어.’

당시에는 촉박한 상황이었고 달리 방법이 없었다지만, 내가 마수들을 상대했다면 일이 무척 복잡해졌을 것이다.

우선 마수들을 잡고, 도스인 레온과 카일의 기억을 조작하는 데에 어마어마한 생명력이 들었겠지.

또, 레온이 잔뜩 흥분한 백 마리 마수를 전부 상대할 만한 실력인지 아닌지도 확실히 몰랐다.

만약 그 상황에 누군가 의문을 품게 된다면?

‘최악으로는, 황제가 프리메라의 존재를 짐작하게 될 수도 있었어.’

그래서 마수들이 따라붙지 않은 건 내게 너무나도 다행인 일이었다.

‘하지만? 꼭 신이 도와준 것처럼 일이 그토록 쉽게 풀렸다고?’

말도 안 되지 않나.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궁금해서 체시어에게 물으려던 거였는데.

“뭐 특별한 일은 없었대?”

“특별한 일?”

“아니, 뭐. 위험할 뻔했다거나?”

아빠는 방문을 열고 나를 안에 밀어 넣으며 “아!” 탄성을 터뜨렸다.

“왜, 왜? 무슨 일 있었대?”

“응. 돌발 상황이 있었나 봐. 마수들이 흥분해서 후방 격전지 쪽으로 진격했나 보더라고. 한 백 마리쯤?”

“헉!”

역시!

레온에게 따라붙은 마수들이 더 있었다!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체시어가 다 잡았지, 뭐.”

“와!”

안도하는데, 아빠가 내 겉옷을 휙휙 벗기며 덧붙였다.

“그런데 체시어도 방법이 없어서, 아빠가 꼭꼭 숨겨 놓으라고 했던 검술로 마수들을 잡은 모양이야.”

“……?”

체시어가 힘을 숨겨 왔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그게, 반란군이 모든 준비를 끝마치기 전까지 황제가 전쟁을 명하지 못하게 하려는 이유라는 것도.

“악!”

난 충격받아 머리를 붙잡았다.

‘그럼 그렇지! 체시어가 내 똥을 치운 거였어!’

딱 봐도 내가 수명을 왕창 쓰고 정체까지 탄로 날 성싶으니 자기가 대신 독박을 쓴 거다.

“아아아빠, 그, 그러면 어떡해? 아빠 사업 성공하기도 전에 전쟁 나면? 아빠는 왜 이렇게 태연해?”

“전쟁 안 나.”

아빠가 내 어깨를 붙잡았다.

그리고는 말했다.

“전쟁보다 아빠 사업이 먼저 성공할 테니까.”

“응?”

“한 달.”

“…….”

“한 달 뒤에, 아빠는 황제의 목을 치러 갈 거야.”

…내가 뭘 들은 거지?

충격으로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그게 정말이야…?”

“응. 모든 준비가 다 끝났으니까. 어차피 아빠는 더 기다리고 싶지도 않았어.”

피식 웃은 아빠가, 멍해 있는 나를 끌어안았다.

“우리 공주… 매일매일 불안에 떠는 것도 싫고, 아빠도 피가 말라가는 기분이었는걸.”

날 단단히 안은 아빠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이제, 다 끝내자.”

다짐하며 속삭이는 목소리.

“꼭, 성공할게.”

내 심장은 두근거렸다.

“우리 공주를 위해서.”

* * *

이튿날.

마탑, 오스카의 집무실.

“……그래서, 그냥 체시어가 힘 못 숨긴 김에, 한 달 뒤에 쳐들어가기로 한 모양이에요.”

자초지종을 들은 오스카는 어쩐지 충격받은 표정이었다.

“스승님, 표정이 왜 그래요? 별로 안 기쁘세요?”

“어? 어어, 아니. 기쁘지, 나도. 그냥 좀 얼떨떨해서.”

“앗, 저도요. 솔직히 아빠 사업이 이렇게 빨라질 줄은 몰라서 좀 어리둥절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되게 좋더라구요.”

난 소파에 앉은 채로 발을 휘휘 굴렀다.

“드디어 모든 게 끝난다니까 어째 기분이 좀 묘한데… 그보다는 후련하고 기대되는 마음이 더 커요.”

“…….”

“사업 빨리 끝나면 좋잖아요? 이제 아무 걱정 없이 행복할 일만 남았으니까.”

“…….”

“스승님, 우리 약속했던 대로 좋은 곳에 놀러도 가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요. 이~따만큼 추억도 많이많이 쌓고….”

“…….”

조잘조잘 말하는데 어째 오스카의 반응이 없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책상 앞에 앉은 그는 딴생각에 잠긴 듯이 멍한 표정이었다.

‘에휴.’

최후의 날이 성큼 다가왔는데도 오스카의 표정이 마냥 기뻐 보이지 않는 이유는 분명, 아직 풀지 못한 문제 때문이겠지.

지금으로부터 또 3년 뒤.

오스카는 회귀의 대가를 치르고 모두에게서 그 존재가 잊힐 테니까.

‘벌써 걱정하나 보네.’

난 폴딱 일어나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스승님.”

“어어.”

“있잖아요.”

난 책상 위에 꽃받침을 하듯 턱을 괴고, 방긋 웃었다.

“저는 절대로 스승님을 안 잊을 거예요.”

“…….”

오스카가 날 빤히 쳐다봤다.

난 아차 싶어서 허둥거렸다.

“음, 물론. 다른 사람들은 잊을 수도 있겠지만, 그건 제가 어떻게든 꼭 방법을 찾아볼게요. 아무튼.”

“…….”

“전 진짜, 스승님을 안 잊을 자신 있어요.”

내 말에, 오스카가 피식 웃었다.

어어? 안 믿어?

“왜 웃으세요? 진짠데?”

“됐고.”

오스카가 손을 휘휘 젓더니 말을 돌렸다.

“이 자식, 언제 와? 벌써 한 시가 넘었는데. 감히 바쁘신 마탑주님께 독대 신청까지 해 놓고 늦어?”

“아, 맞다!”

오늘은 오스카에게 찾아올 손님이 있었다.

바로, 레온.

목숨을 구해 준 로잘린 베르사체 양에게 바득바득 사례하겠다더니.

약속을 지키려고 오는 모양이었다.

“스승님, 스승님. 알죠? 잘 말해 주실 거죠?”

“그으래.”

레온이 찾아올 걸 예상하고, 나는 신나게 오스카를 팔았던 사정을 설명한 뒤 입을 맞춰 달라고 했었다.

“이거, 이거!”

난 품 안에서 레온의 루비 귀걸이를 꺼내 오스카에게 건넸다.

“오빠한테 돌려주시고요!”

“어휴, 진짜.”

똑똑.

그때, 타이밍 좋게 들려오는 노크 소리.

“마탑주님, 손님요. 앙트라세 공자님이신데요.”

보좌관, 로벨의 목소리였다.

“헉! 벌써?”

“들어오라고 해라.”

오스카가 소파를 턱짓했다.

“넌 거기 있어.”

허둥거리며 소파에 앉자마자 문이 열리고, 레온이 들어왔다.

‘……?’

뭐지.

당신 누구야.

난 눈을 의심하며 비비적거렸다.

‘진짜 누구세요?’

깔끔하게 뒤로 넘겨 정돈한 금발.

위아래로 쫙 빼입은 블랙 수트.

멋진 수컷의 냄새를 폴폴 풍기며 등장한 레온의 손에는 웬 장미 꽃다발까지 들려 있었다.

“오, 오빠?”

“어, 리리스.”

날 발견한 레온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슬쩍 손을 들어 보였다.

“우와아. 오빠 오늘 완전 멋있다. 어디 가?”

“…멋있어? 진짜?”

내 칭찬에 입꼬리를 씰룩거리던 레온이, 아차 싶었는지 고개를 휙휙 젓고 오스카를 보았다.

“마탑주님, 안녕하십니까. 이렇게 인사드리는 건 처음입니다. 바쁘신 시간 내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레온 앙트라세입니다.”

난 오스카를 향해 90도로 허리를 숙이는 레온의 모습에 놀라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레온이 저렇게 예의 바른 말투로 격식을 차릴 줄도 알다니.

‘뭐, 모태 귀족이니까 할 때는 하는 거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적응 안 돼.

소름 돋은 팔을 쓱쓱 쓰다듬는데 오스카가 일어나 레온에게 다가갔다.

“그래. 왜 보자고 했는데?”

“예.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이번에 출정했던 전투에서….”

“어, 그래. 들었다. 긴말할 필요 없어.”

오스카가 레온의 손에 들린 장미 꽃다발을 턱짓했다.

“그건 나 주려고 가져왔냐?”

“……?”

레온이 흠칫 당황하며 꽃다발을 뒤로 숨겼다.

“혹시 꽃 좋아하십니까? 그러면 제가 다른 거로 하나 구해다 드리겠습니다.”

“아니, 안 좋아해. 남자한테 받는 건 더 안 좋을 것 같아. 그럼 그거… 뭐냐, 로잘린 베로니카한테 주려고?”

“베, 베르사체! 베로니카가 아니라 베르사체요, 스승님!”

놀라 끼어들자, 오스카가 “아.” 하고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쩌고 베르사체. 내가 걜 항상 이름으로만 부르다 보니 헷갈렸네. 여하튼, 걔한테 주려고? 고작 그 꽃다발이 사례야?”

“아닙니다. 로잘린 양에게 주려고 가져온 건 맞지만, 당연히 사례는 이보다 더 크게, 차차 해나갈 생각입니다.”

“…차차? 아니, 그럴 필요 없이 그냥, 줄 거 있으면 내놓고 가. 내가 전해 줄 테니까.”

“직접 전하고 싶습니다.”

“그건 곤란한데.”

“직접 만나서, 꼭 해야 할 말이 있습니다.”

“할 말이 뭔데? 고맙단 말은 그때 충분히 했다지 않았어?”

“마탑주님.”

슬슬 약간의 귀찮음이 묻어나오기 시작하던 오스카의 말을, 레온이 잘랐다.

“뭐.”

“실은, 도움을 받았던 그날 이후로 로잘린 양이 제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뭐, 라고?”

“그래서 오늘 로잘린 양을 만나서 감사 인사를 제대로 다시 하고.”

진지한 표정의 레온이 후, 심호흡하며 덧붙였다.

“혹시 생각이 있다면, 저와 좋은 관계로 만남을 이어가 줄 수 있을지 물어보려고 합니다.”

???

순간, 뇌 정지…….

‘저, 저, 저 인간이 지금 뭐래?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야?’

난 입을 떡 벌린 채 머리를 붙잡았다.

“마탑주님이 로잘린 양의 아버지 같은 분이시라고 들었습니다. 제가 마탑주님을 먼저 찾아온 건.”

레온이 꼭 오스카에게 고백하듯 무릎 꿇었다.

“미, 미친….”

오스카가 흠칫 놀라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그의 앞에 무릎 꿇은 레온의 모습 위로 프러포즈 BGM이 깔리는 환청이 들렸다.

“교제를 전제로 만남을 부탁하기 전, 먼저 아버지께 허락을 구하는 것이 응당 도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

오스카의 등이 들썩였다. 이내 그가 천천히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저, 끅.”

와…….

영혼이 쏙 빠진 나를 돌아본 오스카가, 입을 가린 손을 내렸다.

웃음을 참으려 잔뜩 일그러진 표정.

꺽꺽, 힘겹게 소리를 죽여 웃는 얼굴이 얄미웠다.

“저런~~”

“…….”

“야, 얘 어쩌냐~?”

아빠가 힘을 숨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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