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화
오스카는 힘겹게 웃음을 참고 다시 레온을 돌아보았다.
“네, 흡, 네 마음은 잘 알겠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걔가 지금 여기 없어.”
“…예?”
“로잘린 베로니카는 이틀 전에….”
“베르사체요, 스승님!”
“그래, 로잘린 베르사체는 이틀 전에 마탑을 떠났다. 이솔렘 왕국으로 갔지. 배움에 큰 뜻이 있는 아이라,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끼라고 내가 보냈다.”
“예?”
레온의 눈이 커졌다.
오스카는 안타까운 척 고개를 휘휘 저었다.
“언제 돌아올지 기약 없는 여행이라고나 할까.”
“그, 그게 무슨….”
“안 그래도 네가 찾아올 거라면서 말 좀 잘 전해 주라고 하더라. 언젠가 인연이 된다면 다시 만나자면서.”
“…….”
툭.
레온의 손에서 꽃다발이 떨어졌다.
오스카는 한숨을 푹 내쉬며 충격받은 레온을 손수 잡아 일으켰다.
“야, 이 자식아. 남자가 돼서 뭐 이렇게 아무 데나 무릎을 꿇고 그러냐.”
달래는 목소리가 오스카답지 않게 다정했다. 레온이 안타깝긴 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그래도 언젠가는 돌아오는 거 아닙니까?”
레온은 끈질겼다.
“그렇겠지. 그런데 말이야.”
오스카는 그의 어깨를 딱, 붙잡고 말했다.
“걔, 남자 친구 있어.”
* * *
“오빠아아.”
“…….”
내가 미쳤지.
정말 미쳤어.
우락부락한 근육질 아저씨로 커스터마이징할걸!
왜 하필 미인 캐릭터를 골라서!
무려 레온의 목숨까지 구해줘 놓고, 안 느껴도 될 죄책감을 느끼고 있냔 말이다!
“오빠아아!”
“…….”
충격받은 레온을 달래주라고 오스카가 조퇴를 시켜줘서, 나는 고모네까지 따라갔다.
마차에서 내린 레온은 비틀비틀 걸었다.
“그 언니 진짜 별로야. 왜 오빠 맘에 들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성격도 괴팍하고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사람이었어. 난 그 언니 이제 마탑에 없으니까 너무 좋더….”
“야!”
뒤를 쫄래쫄래 따라가며 열심히 로잘린 욕을 하던 난, 돌아보며 버럭 소리를 지르는 레온에 깜짝 놀랐다.
“왜, 왜…?”
“욕하지 마! 네가 무슨 마음으로 이런 말을 하는지는 아는데!”
레온은 입을 삐쭉거리다 이내 휙, 다시 뒤돌아 걸었다.
“내 은인이란 말이야. 그러니까 욕하지 마. 네가 이렇게까지 안 해도, 마음 정리는 알아서 할 테니까.”
와! 미치겠다!
몇 걸음 더 걷던 레온은 갑자기 멈춰 서더니, 손에 들린 꽃다발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툭.
장미 꽃다발이, 아니, 레온의 첫사랑이 허망하게 버려졌다.
“아니! 이 아까운 걸!”
난 호다닥 그걸 주웠다.
“맘에 들면 너 가져라.”
“어휴, 오빠아. 나 기왕 조퇴했으니까 우리 근처에 콧바람이나 쐬러 갈까? 맛있는 거 먹고, 오빠 기분도 풀 겸. 응?”
“됐어.”
레온은 터덜터덜 집으로 들어갔다.
따라 들어가자마자, 거실 소파에 앉아있던 반가운 두 얼굴이 보였다.
“어라? 리리스가 같이 오네?”
테오와,
“어머, 리리스!”
오랜만에 보는 에리카였다.
* * *
에리카 발레린, 19세.
특기는 짝사랑.
취향은 나쁜 남자.
9살, 양성소 동기였던 레온 앙트라세에게 홀딱 반해서 그의 뒤꽁무니만 졸졸 쫓아다닌 지 10년이었다.
그리고 오늘, 에리카는 짝사랑의 종지부를 찍으러 왔다.
“결혼하자, 우리.”
네 사람이 둘러앉은 테이블 위로 정적이 내려앉았다.
테오는 한숨을 푹 내쉬었고 리리스는 놀라 입을 떡 벌렸다. 청혼을 받은 당사자인 레온만, 전혀 감흥 없는 얼굴로 축 처져 있을 뿐이었다.
“나 너 기다린다고 지금껏 아무도 안 만났어. 들어오는 혼담 전부 거절했던 건 물론이고, 이 나이 되도록 다른 남자 손 한 번 안 잡아봤어.”
“…….”
“부모님이 걱정하셔. 혼기가 차서 얼른 아무나 만나라고 닦달해. 이제 우리 사이의 매듭을 지어야겠어.”
“…….”
“레온 앙트라세. 결혼하자.”
에리카의 말이 들리는지, 아닌지.
여전히 짓밟힌 첫사랑의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레온의 시선은 힘없이 허공만 더듬었다.
“너, 나한테 마음 없는 거 알아. 하지만 그건 모든 여자한테 마찬가지잖아?”
“…….”
“네가 좋아하는 사람 생기면 깔끔하게 포기하려고 했는데, 지금까지 없었으면 솔직히 앞으로도 뭐, 크게 달라질 것 같진 않아. 내 말 맞지?”
“…….”
“일단 결혼하고 가까운 사이가 된 뒤에 서로를 더 알아가 보자. 절대 후회하지 않을 거야. 잘해 줄게.”
“야.”
레온이 그제야 에리카를 노려봤다.
“누가 그래. 내가 좋아하는 사람 없다고.”
“…뭐?”
“누가 그르, 그.”
말하던 레온이 울컥했다.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그를 보며 모두가 놀랐다.
“오, 오빠! 울지 마! 울면 안 돼!”
“크흡.”
리리스가 허둥거리며 레온을 안아 달랬다. 산만 한 덩치로 쬐만한 여동생의 품에 안겨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
레온의 반응은 진짜였다…….
청혼을 거절하기 위한 거짓말이 아니라, 진짜.
에리카는 그 모습을 보며 충격받았다.
“너… 나 몰래 여자 만났어?”
“만나고 싶다!”
레온이 벌떡 일어났다.
“네가 뭔데 나한테 여자를 만나니 마니 하냐? 안 그래도 지금 속 뒤집히는데, 뭐? 결혼을 해? 누가, 내가? 내가 너랑? 미쳤냐!!!”
“레온 앙트라세!!!”
에리카가 지지 않고 버럭 소리를 지르며 레온을 따라 일어났다.
“너, 너…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그만 좀 해, 그만 좀! 진짜 지긋지긋하다! 좋아하는 여자 없어도 절대 너랑은 결혼 안 해! 그러니까 나 그만 괴롭히고!”
울지 않으려는지 흡, 숨을 삼킨 레온이 답답하게 목을 죄는 크라바트를 거칠게 풀어 테이블 위로 내던졌다.
“제에발 딴 놈 찾아!!!”
그리고는 쿵쾅거리며 계단을 올라가 버렸다.
“오빠아아악!”
리리스가 경악하며 그 뒤를 따라갔다.
남겨진 에리카는…….
털썩, 허탈하게 무너졌다.
“에, 에리카.”
이걸 어쩌나. 테오가 눈을 질끈 감았다.
테오 앙트라세.
쌍둥이 형제를 졸졸 쫓아다니는 소꿉친구 에리카가 혹시라도 상처받을까 달래 주던 경력, 10년.
평소에는 레온의 퉁명스러운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던 에리카지만.
이번에는 충격이 클 터.
“나, 어, 으, 으으….”
“에리카?”
에리카가 히끅거리며 돌아보았다.
그녀는 어느새 꺼이꺼이 울고 있었다. 공들여 한 화장이 번져 검은 눈물이 줄줄 흘렀다.
“울지 마. 화장 예쁘게 해 놓고 왜 울어.”
테오가 한숨을 푹푹 내쉬며 손수 에리카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내가, 어? 내가 지, 지를 며, 몇 년을 조, 어으, 좋아했는데 어, 어떻게 나한,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어어!”
“에고.”
테오가 오열하는 에리카를 안고 도닥였다. 에리카는 그의 품에 안겨 한참 울었다.
오늘, 이로써 두 사람의 첫사랑이 막을 내렸다.
잔인한 봄날이었다…….
* * *
“아, 웃겨 죽겠네.”
레온이 한바탕 소동을 일으키고 돌아간 뒤.
한참 웃다 겨우 진정한 오스카가 자리에 털썩 앉았다.
“…….”
왜인지,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서서히 지워졌다.
“…한 달 남았다고? 진짜?”
실감이 나지 않았다. 최소한 반년 정도는 더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모든 것이 끝나는 날.
그날은.
“이거 미치겠네….”
오스카가, 홀로 떠나기를 결심한 날이었다.
‘아직 마음의 준비도 못 했는데. 한 달은 좀 너무하잖아.’
고개를 젖힌 그가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무거운 손이 두 눈을 덮자, 드러난 입매가 괴로운 듯 일그러졌다.
회귀 마법을 시전한 이에게 주어지는 대가.
그것은, 존재의 소멸.
자신을 알고 있던 모두가, 자신을 ‘오스카 마뉘엘’로 인지할 수 없는 상태.
말 한마디, 또는 행동 하나….
사소한 실수로라도 누군가가 자신에게서 ‘오스카 마뉘엘’을 읽어내는 순간, 금제는 목숨을 앗아간다.
그러니 죽지 않으려면, 자신을 아는 모두로부터 도망쳐야 했다.
‘그래도….’
죽는 건 아니라서 다행이야.
먼발치에서 아이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나쁘지 않겠지.
―그렇게 생각했는데.
‘인간은 참 간사하다니까. 만족을 모르는 짐승이야.’
오스카는 픽 조소했다.
언젠가부터 그는 욕심이 생겼다.
내 진짜 이름은 잊히더라도 상관없으니….
아이를 직접 마주 볼 수 있고, 말할 수 있고, 아이가 내 존재를 알아줬으면 좋겠다.
지켜보기만 하는 건 너무 괴롭고 비참하잖아.
―그것이, 오스카가 멀리 떠나려는 이유였다.
살아서 아이를 다시 만나기 위해서는 ‘오스카 마뉘엘’이라는 존재를 버려야 했으니까.
말투, 행동, 습관, 기억…….
‘오스카 마뉘엘’로 있었던 시간을 철저히 도려내고 아예 새로운 인간으로 다가가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꼭 아이가 아니더라도 자신을 알던 많은 사람 중 누군가가, 약간의 흔적이라도 느껴서는 안 됐다.
존재를 인지당하는 순간 모든 게 물거품이 될 테니까.
‘쉽지 않겠지.’
전생의 삶까지 합쳐 상당히 오랜 시간을 살아온 그다.
지금까지 몸에 밴, 남들이 ‘오스카 마뉘엘’을 떠올릴 만한 모든 흔적을 지워내는 노력은 하루 이틀로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떠나서….
다시 아무렇지 않게 너와 만나고, 말하고, 웃을 수도 있는 다른 사람이 되어 돌아오려 했는데.
‘한 달.’
분명 염두에 뒀던 이별임에도.
막상 모래시계가 뒤집혀 돌아가기 시작하자, 그의 마음은 착잡했다.
“아니야. 차라리 잘됐지, 뭐.”
오스카는 힘없이 웃었다.
“사업 빨리 끝나면 좋잖아요? 이제 아무 걱정 없이 행복할 일만 남았으니까.”
“스승님, 우리 약속했던 대로 좋은 곳에 놀러도 가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요. 이~따만큼 추억도 많이많이 쌓고….”
어차피 사라질 ‘오스카 마뉘엘’이라는 존재로 아이에게 추억을 남겨 놓는 것은 잔인한 짓이다.
아이는 평생을, 그 추억을 꺼내 보며 괴로워할 테니까.
그러니까, 정말 미안하지만.
괜한 기억은 남겨두지 않는 편이 나았다.
‘한 달…….’
오스카는 힘없이 책상 위에 엎드려서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를 위해서는 꼭 와야만 하는 날이지만, 그래서 간절히 기다렸던 날이지만.
그럼에도 영원히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 모순적인 생각을 하면서.
아빠가 힘을 숨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