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 * *
황제, 니콜라스의 집무실.
니콜라스는 모든 전황을 보고받은 참이었다.
“정말….”
체시어를 등지고 서서 벽에 걸린 커다란 지도를 마주한 니콜라스는, 흥분에 젖어 있었다.
“정말로, 수고가… 많았네.”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체시어는 감격에 부르르 진동하는 니콜라스의 등을 일별하며, 태연하게 고개를 숙였다.
“보고 받으신 레온 앙트라세의 전선 이탈, 명령 불복종에 대하여 선처 부탁드립니다.”
“응?”
니콜라스가 고개를 갸웃하며 돌아보았다.
“독단적으로 행동했지만, 경험이 전무한 소년병을 살리기 위한 이유였습니다. 결과적으로는 폐하의 숙원 사업에 이바지할 고급 전력을 허무하게 잃지 않게 되었으니, 선처 부탁드립니다.”
“아닐세.”
니콜라스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레온 경을 징계할 생각은 애초에 없었네. 오히려 공을 치하해야 마땅할 일이지. 자네 말대로, 한 명 한 명의 전력이 아쉬운 시기에 도스를 구해냈으니까.”
“감사합니다.”
“그리고.”
니콜라스가 다가왔다.
가까이 다가온 니콜라스의 표정을 마주한 체시어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감출 수 없이 올라간 입꼬리.
미친 사람처럼 반쯤 뒤집힌 눈.
그것은, 희열이었다.
“나의 검을, 자네를, 끝내 각성하게 해 준, 아주 고마운 은인이 아닌가? 응?”
“…….”
“그런 절박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자네가 그 검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었겠나?”
하이 엘레바도(High Elevado).
언젠가 체시어가 닿을 수 있기를 그토록 바라왔던, 검의 경지.
에녹 루빈슈타인만이 완성했었던 최고의 저력.
그리고….
이솔렘 왕국의 방어를 뚫을 수 있는 능력이자, 침략의 ‘성공’을 보장해 줄 열쇠.
“예.”
체시어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폐하의 지대하신 뜻을 이루고자 밤낮으로 노력했지만, 끝내 닿기 힘든 경지였습니다. 그러니 제게도 이번 전투가 좋은 경험이 되었습니다.”
“하하하….”
감격한 니콜라스가 체시어의 어깨를 붙잡았다.
“체시어.”
“예, 폐하.”
“내가 이 땅 위에 굳건하게 지켜왔던 성이,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야. 자네도 알고 있겠지.”
“예.”
“버러지들이 갉아먹고 있는 나의 성을 재건할 방법은, 바닥에 떨어진 황실의 위상을 다시 세울 방법은, 딱 하나뿐일세.”
“…….”
“나는, 더 기다리고 싶지 않아.”
체시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군대를 정비하겠습니다. 한 달 뒤, 출정을 명해 주십시오.”
“아.”
기다렸다는 듯 나오는 대답.
니콜라스가 전율하며, 떨리는 손을 들어 입가로 가져갔다.
“하, 하…. 드디어, 드디어 내가, 이, 이 제국 황실의, 오랜 과업을… 이루는 것인가….”
“제가 부족하여, 폐하께서 바라시던 경지에 더 빨리 닿지 못해 송구했을 뿐입니다.”
체시어가 눈을 빛내며 덧붙였다.
“절대 실패하는 일 없이, 승리를 바치도록 하겠습니다.”
“…….”
이제 니콜라스는 온몸을 벌벌 떨기 시작했다.
치뜬 눈에, 옅은 습기까지 고였다.
“나는… 자네를 믿고 있었어.”
흥분으로 벅찬 숨을 힘겹게 고른 니콜라스가 체시어를 끌어안았다.
“하하, 하….”
곧 감정을 갈무리하기도 버거워진 그가, 머리를 쥐어뜯듯 감싸며 돌아섰다.
“아하하하하! 하하하하!!!”
희열에 찬 웃음소리가 들끓었다.
마치, 이미 승리를 쟁취한 정복왕이라도 된 듯이.
* * *
마탑, 오스카의 집무실.
체시어는 그 길로 마탑에 방문해 있었다.
결전의 날이 정해졌으니, 제도의 핵심 세력인 마탑에 방문해 그들의 입장을 살피고 필요한 지원을 요구하라는 황제의 명이었다.
물론….
전부 짜고 치는 판.
당연히 체시어와 오스카 사이에 따로 나눠야 할 이야기는 없었다.
그저 마탑에 방문했다는 사실을 외부에 보이기만 하면 될 뿐.
‘20시간은 지난 것 같은데.’
그러나 고작 2시간.
체시어는 오스카의 집무실에 갇혀 애꿎은 시간만 죽이고 있었다.
‘30분만 더 있다 가자.’
둘 사이에는 아무 대화도 없었다.
쥐 죽은 듯 고요한 집무실.
책상 앞에 앉은 오스카가 종잇장 팔랑거리는 소리만이 전부.
“야.”
“예.”
침묵하며 앉아 있던 2시간 만에, 오스카가 체시어를 불렀다.
“괜히 시간만 죽이지 말고 그날 뒷이야기나 해 봐라.”
“그날이라니요?”
“2월 7일.”
오스카가 손을 모아 턱을 괴며 방긋 웃었다.
2월 7일이라면….
리리스와 사귀기 시작한 날이었다.
“네가 했는지 애가 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둘 중에 누군가가 사귀자고 고백한 그날 말이야.”
오스카에게 걸렸다는 사실은 리리스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마차 타고 집에 돌아가던 길. 네가 박력 있게 마차 등받이에 손 얹고 애를 가둔 다음, 그 뒤로 뭐 했는지를 내가 못 들었거든?”
이렇게 세세하게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체시어의 눈이 흔들렸다.
“애한테 정확히 스물네 번 그다음 얘기를 하라고 했는데, 안 해. 뭔가 엄청난 일이 있었나 보지?”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거짓말하면 팔모가지 날아간다.”
“…….”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
체시어의 눈이 계속 흔들렸다.
“말해라.”
오스카 마뉘엘.
제 전부를 바쳐 리리스를 살리고 모두에게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 준 사람.
고마운 그에게 납작 기어야 하는 것쯤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존중할 생각이었고 굳이 갈등을 만들고 싶은 마음도 없다.
‘그런데 그 뒤의 일을 말하는 게 맞나? 그게 이 사람을 존중하는 일인가? 오히려 속을 뒤집어 놓을 일일 텐데. 아니야, 사실 그런 거 다 떠나서….’
나는 살 수 있을까?
잠깐 고민하던 체시어가 말했다.
“예, 말하겠습니다. 그런데 한 달 뒤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죽게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적어도 황제의 목은 친 다음이어야 했다.
“오호라. 지금 말하면 네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일이 있었나 보네?”
오스카는 예리했다!
“지금 말하면 살려 주겠다. 하지만 나중에 말하면 죽일 거야.”
“…….”
“약속하지. 난 약속한 건 무조건 지키는 사람이야.”
어떡하지?
결국, 고민하던 체시어가 천천히 떨리는 입술을 떼었다.
* * *
“…네가 좋아하는 게, 나야?”
숨이 섞일 만큼 가까운 거리.
“나, 나는….”
진지한 체시어의 질문에, 리리스는 대답을 망설였다.
“대답… 해 주라.”
“나나나는, 그, 그러니까….”
질끈 눈을 감은 리리스가 작은 숨을 몰아쉬었다.
“…맞아.”
이내,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이 열리고 다시 보인 눈동자.
“나도 네가 좋아….”
긴장하고 있으면서도, 보석처럼 푸른 동공은 언제나처럼 예쁘게 반짝거렸다.
체시어는 잠시, 숨이 멎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는 리리스의 얼굴을 바라보며 홀린 듯 중얼거렸다.
“사실 나… 너 좋다고 고백하는 녀석들 보면 기분이 안 좋아.”
“…….”
“네가 마탑주님 좋아하는 줄로 알고 있어서, 어차피 네가 받아 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데도 괜히 신경 쓰이고 밤에 잠도 잘 못 잤어.”
“…….”
“차라리 너에게 연인이 있어서… 그런 걱정, 안 해도 되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어. 그런데.”
쿵쿵쿵쿵쿵.
“다른 놈들 말고, 내가.”
뛰쳐나갈 듯 뛰는 심장 소리가, 분명 리리스에게도 들릴 것 같았다.
“내가… 하고 싶어.”
“…….”
“…하게 해 줘.”
떨리는 목소리.
가슴에 가만 손을 얹은 채 한참을 침묵하던 리리스가, 이내 수줍게―
“좋아.”
―하고 대답했다.
‘아.’
그 순간, 체시어는 굳었다.
그때의 감정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그냥 좀, 가슴이 벅찼다.
그리고 가까이 보이는 리리스의 얼굴에서 눈을 떼기가 힘들었다.
예쁘다.
정말로.
평소와 다를 게 없는데도, 서로의 관계가 ‘연인’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명명되는 순간.
모든 것이 새롭게 느껴졌다.
“……?”
그 묘한 기분에 취해 멍해 있던 제 모습을, 오해한 걸까?
올라온 리리스의 팔이 체시어의 목을 살짝 붙들었다. 여전히 시선은 마주쳐 있었다.
부끄러워하면서도, 내심 반짝이는 눈동자.
푸른 동공이 서서히 사라졌다.
살포시 감은 눈.
파르르 떨며 고이 모은 입술.
‘갑자기…?’
체시어는 아무것도 몰랐다.
하지만, 이 타이밍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정도의 눈치는 있었다.
의도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분명 기대하고 있는 리리스를 무시할 수는 없었기에….
체시어는 긴장하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리리스의 입술 위로 제 입술을 내려 붙였다.
그저 도장 찍듯 꾹,
두 입술이 맞붙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심장은 미칠 듯 뛰었고 온몸의 피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날카로운 첫 키, 아니.
첫 뽀뽀의 추억이었…….
* * *
흠칫.
체시어는 놀랐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오스카가 위협적으로 제 멱살을 붙들고 있었다.
“이 스키그 날즈흐느?(이 새끼가 날조하네?)”
이를 악문 그의 눈은 서슬 퍼렇게 빛나고 있었다.
“아무것도 몰랐다, 의도한 상황은 아니었다, 도장 찍듯 입술만 대고 있었다…….”
“…….”
“이상 세 부분. 다 거짓말이지?”
“진실입니다.”
“응, 안 믿어.”
“…….”
“사귄 지 첫날에? 입맞춤?”
“…죄송합니다.”
“다음 날에는 뭐 했냐?”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뭘 아무것도 안 해?”
눈을 희번덕이며 뒤집은 오스카가 체시어의 멱살을 바짝 당겨왔다.
“너 진짜 뒤질래?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아주 발라당 까졌네?”
슬슬 숨쉬기가 힘들었다. 체시어가 힘겹게 말했다.
“분명히 살려 주신다고 약속을….”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했지, 멀쩡하게 돌려보내 주겠다고 한 적은 없다?”
“아.”
“내가 널, 불구로 만들지 않겠다는 약속도 했던가? 그런 기억은 없는데?”
…맞네.
말장난 허위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사기 피해자 체시어는 할 말이 없었다.
“성인이 안 된 레이디에게 신체 접촉을 가한 대가는 치러야겠지? 하나 골라라. 넓은 아량으로 선택권은 네놈에게 주마.”
체시어의 멱살을 내버리듯 놓은 오스카가 지옥의 수문장처럼 휙휙 턱짓하며 말했다.
“왼쪽 팔, 왼쪽 다리, 오른쪽 팔, 오른쪽 다리.”
“……?”
“넷 중 하나만 날리도록 하지. 나로서는 무척 선심을 베푼 거야.”
체시어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진심인가?
그냥 겁주려고 하는 말이라기엔, 오스카의 눈에 형형하게 들어찬 저 감정은….
살의!
체시어는 마른 입술을 쓱 훑으며 재빨리 머릿속으로 셈에 들어갔다.
‘다리는… 안 돼.’
그렇다면 두 팔 중 하나.
‘오른팔은….’
검을 잡아야 했다.
결정한 체시어가 말했다.
“…왼팔로 하겠습니다.”
“오냐.”
오스카가 체시어의 왼팔을 잡고 어깻죽지에 손을 댔다. 즉시 마나가 모였다.
‘지, 진심이었어?’
끝의 끝까지도 설마 진짜로 날리기야 하겠냐는 마음이었던 체시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때, 벌컥.
타이밍 좋게 문이 열리고 누군가 요란하게 등장했다.
“스승님의 귀염둥이! 등자….”
리리스였다. 그녀의 상황 파악은 빨랐다.
“…아아앙뭐하시는 거예요!!!”
아빠가 힘을 숨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