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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힘을 숨김-227화 (228/261)

227화

“…아아앙뭐하시는 거예요!!!”

경악하는 리리스.

체시어의 구세주처럼 등장한 그녀에게로 두 남자의 시선이 향했다.

* * *

사건 발생 네 시간 전.

여느 때와 다름없었던 아침.

하지만, 우리에게는 평소와 달리 카운트다운이 시작된 날이었다.

혁명의 날까지 D-30!

제국이 선포된 이래 첫 반란!

한데….

“제임스 씨!”

“우웅.”

역사서에 전례가 없는 중대사를 앞두고 있음에도 초조한 건 나뿐.

아빠는 리본을 입에 물고 내 머리카락을 땋는 데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머리는 내가 해도 돼. 언니들도 있는데 다 쫓아내 버리고 대체 아침부터 와서 왜 이러는 거야? 뭐 할 말 있어?”

“할 말? 아니, 없는데? 그냥 오늘 눈이 일찍 떠진 김에 오랜만에 우리 공주 머리 직접 묶어 주려고 그러지.”

아빠는 양 갈래로 땋은 내 오른쪽 머리 끝자락에 리본을 매며 웃었다.

아침부터 다 큰 딸의 머리를 묶어 주러 온 이 남자가 반란군의 수장이라니.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진짜 할 말 없어? 있잖아, 혹시 내가 아빠 사업하는 날 해야 할 건 없구?”

“그런 거 없어.”

아빠는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확인하더니 방긋 웃었다.

“예쁘게 잘됐다앙, 우리 공주.”

난 아빠를 휙 돌아봤다.

“내 능력이 필요한 일! 진짜 없어? 아니면 내가 그때까지 준비해야 할 거라든가?”

“없다니까? 그렇게 아빠를 도와주고 싶어?”

“응!”

“흐음, 그러면….”

“응응!”

고민하는 아빠를 보며 난 반짝 눈을 빛냈다.

“지금까지랑 똑같이, 아주 태연히 굴어 줘. 괜히 뭐 하고 있다는 티 내지 말고. 아침에 마탑에 출근했다가 집에 와서 자고, 휴일에는 친구들 만나 놀고.”

“뭐야? 그게 다야?”

“응, 그게 다야. 늦겠다, 얼른 가.”

“아니, 그럼….”

난 반란의 ‘반’ 자도 모르는 평범한 귀족 아가씨 리리스 루빈슈타인의 스케줄을 떠올려 보다가 물었다.

“나 내일모레 살롱에서 정기 견학 가는 건? 그것도 빠지지 말고 그냥 그대로 가?”

“빠질 생각이었어? 당연히 그대로 가야지. 항상 갔었는데 갑자기 안 가는 것도 이상하잖아.”

영 레이디 살롱(Young lady salon).

아직 데뷔탕트 나이가 안 된 귀족 아가씨들, 그중에서도 옥타바 계급 이하만 참여하는 사교 모임.

책사, 조제프 아저씨가 고안한 이 살롱은 하위 계급의 선을 흐리기 위한 혁명 준비의 일환이었다.

시행된 지 3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살롱은 그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어디로 간댔지?”

“아르고니아.”

살롱은 두 달에 한 번씩 외부로 정기 견학을 다녔다.

“이런. 왜 하필 또 그 시골이래?”

아빠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기 견학은, 쉽게 말하면 그냥 반나절 정도 제도 밖으로 소풍을 다녀오는 것이다.

물론 이 또한 살롱 설립 취지에 철저히 기반한 행사.

비능력자 인구 밀도 99%를 자랑하는 지방 영지를 구경하며 노는 동안, 우리는 소귀족인 영주, 그리고 평민인 영지민들과 자연스레 안면을 트고 대화를 나누고는 한다.

평민은 사람 취급도 안 하는 제도 분위기에 평생 젖어 살아온 아가씨들에게, 정상적인 조기 교육을 하기 위해서랄까?

“아무튼, 가야지. 오히려 평소랑 다르게 굴었다가 괜히 꼬리 밟혀. 아빠 사업은….”

아빠는 내 얼굴 앞에 자기 얼굴을 바짝 붙였다.

“…평범한 날, 평범한 사람들이 평범하게 지내다가 갑자기 뒤통수를 그냥 확!”

“히익!”

아빠가 씨익, 하고 조금 무서운 웃음을 지으며 덧붙였다.

“칠 생각으로 준비해 오고 있었으니까 말이야.”

* * *

그래…….

아빠가 내 도움 없이도 꼭 성공할 거라 안심시켜 준 덕분에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출근한 길이었다.

영재반 오전 연구를 마치고 여느 때처럼 오스카랑 점심을 먹으려고 그의 집무실에 왔을 뿐인데.

“스승님!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데요?”

난 일단 뒤엉킨 둘을 떼어놓으려 달려들었다.

오스카로부터 목숨의 위협을 받고 있던 상황이 맞는지, 체시어는 기다렸다는 듯 잽싸게 일어나 내 뒤로 숨었다.

“형을 집행하는 중이었다.”

“혀, 형이요? 갑자기 무슨? 체시어가 뭔 잘못을 했는데요?”

“저 녀석의 죄목은 연령에 맞지 않는 교제 진도다. 감히 사귄 지 하루 만에 입술을 비벼?”

“…….”

헐.

나는 그제야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정확히 파악했다.

“도망쳐.”

재빨리 뒤의 체시어에게 반쯤 고개를 돌리며 말하자, 그는 지체하지 않고 나갔다.

쾅, 문 닫는 소리.

나는 오스카가 따라가지 못하도록 양팔을 쫙 벌려 앞길을 막았다.

“살려 주시죠.”

“죽일 생각 없었는데?”

“뭔 소리예요! 형을 집행하는 중이셨다면서요!”

“사형이 아니라 왼쪽 팔만 날리는 불구형이었어. 그렇게 경고라도 해 놔야지. 안 그러면 말리는 사람 없으니까 아주, 좋다고 불순한 짓거리는 다 하고 다닐 거 아냐?”

“부, 불순한 짓거리라니….”

“너 아직 미성년자야. 알아?”

“알죠! 근데 미성년자는 남자 친구 못 사귀나요?”

“내가 사귄다고 뭐라 했냐? 신체 접촉 진도가… 이게 맞아? 만난 첫날에 주둥이를 비볐다고? 한 달 뒤엔 애도 생기겠는데?”

난 노골적인 오스카의 지적에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부, 부, 불순한 건 스승님이다!”

난 손부채로 벌게진 얼굴을 식히면서 항변했다.

“저희 순수하게 사귀고 있단 말이에요! 오해하지 마세요!”

“너 말고 저 새끼가 안 순수하다니까? 비켜! 나는 형 집행을 마저 하러 가겠다.”

“자자자잠깐! 진정!”

나는 오스카를 억지로 밀어 앉힌 다음 태연하게 말을 돌렸다.

“그런데, 뭐지? 체시어가 여기 왜 왔어요? 스승님 보러 왔어요?”

“뭔 개소리? 내가 저놈이랑 얼굴 보고 수다 떨 사이냐?”

“그럼요?”

불만스럽게 팔짱을 낀 오스카가 고개를 휙, 돌리며 말했다.

“곧 전쟁 난다며. 황제가 저놈한테 마탑 분위기 살피고 오라고 보냈나 보지.”

“아항!”

토벌을 마치고 돌아온 지 딱 사흘밖에 안 되었건만.

황제는, 체시어의 저력을 알게 되자마자 출정 날짜를 잡고 빠르게 움직이려는 모양이었다.

‘추진력 무슨 일이야?’

난 혀를 내두르다 문득, 체시어를 떠올렸다.

한 달…….

한 달 남았다.

사업 준비를 해야 하는 체시어와 얌전한 귀족 아가씨처럼 굴어야 하는 나.

할 말이 많은데 우리는 그동안 만날 시간도, 명분도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밖에는!

“스승님.”

“뭐.”

“있잖아요, 저 체시어 얼굴 한 번만 보고 오면 안 돼요? 지금 아니면 만날 수가 없는데, 사실, 이것저것 물어볼 것도 있고 해서….”

“장난해?!”

“제발요…. 금방 올게요…. 사실 체시어 이미 도망친 것 같아서 지금 가 봤자 잡기 힘들겠지만….”

“…….”

“스승니임.”

오스카는 지그시 눈을 감고 열 받은 얼굴로 숨을 고르다가, 이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10분 준다. 딴 짓거리 하지 말고 딱 인사만 하고 와라.”

“우와! 감사합니다! 스승님 최고!”

난 그 길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집무실 문을 닫자마자―

‘헉! 아직 안 갔어?’

―고요한 복도에 멀찍이 서 있는 체시어를 발견했다.

매 순간 목숨을 위협받아야 하는 오스카의 서식지를 떠나지 않고, 언제 나올지도 모르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을 체시어.

그의 행동은 실로 용감했다!

“으으.”

감동한 난 호다닥 달려가 힘껏 발을 굴렀다. 체시어가 점프한 나를 가볍게 받아 안았다.

“…보구 싶었어어.”

“나도.”

난 체시어의 목에 한참 뺨을 비비다가 그의 어깨를 툭툭 쳐서 내려달라고 했다.

시간이 없었다.

“체시어, 할 말이 많은데 딱 10분밖에 없어. 너 혹시 나 쉬는 날 시간 돼? 그때 내가 삼촌 집에 갈게.”

“아.”

체시어는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나 모레부터 제도에 없어. 출정 전까지, 침략군으로 차출된 귀족 가문 사병들 훈련시키러 가거든.”

“……?”

“머릿수가 많으니까 제도에서는 훈련할 여건이 안 돼. 지방 영지로 내려가 봐야 해.”

난 놀랐다.

“와, 이게 무슨 소리야? 대놓고 사병들 모아서 전투 훈련 시킨다구? 황제 폐하는 동네방네 곧 전쟁할 거 알릴 셈이래?”

체시어는 내 의문에 눈을 껌뻑거렸다.

“…숨길 필요 없지. 곧 전쟁하는 거 모르는 사람도 없는데.”

“크흠, 하긴. 그건 맞지.”

실은 체시어와 만날 마지막 기회까지 없어진 게 억울해서 투정 한 번 부려 본 거다.

‘아니, 그럼? 지금 헤어지면 체시어를 다시 보는 게, 사업 다 끝나고 난 이후라고?’

충격이었다.

“어디로 가?”

“글쎄. 아직 안 정했지만, 대규모 훈련을 하기 좋은 곳은 거의 다 넓은 남부 쪽이니까. 남부 영지 중에 하나 골라서 가면 되지 않을까.”

“엇!”

정말?

“그럼 아르고니아는 어때?”

“아르고니아?”

내 제안에, 체시어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도 나쁘지 않지.”

“거기로 가! 거기!”

“왜?”

“나 사실, 모레 살롱에서 거기로 견학 가거든! 만약 너 같은 곳에 훈련하러 가면, 우리 완전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 거 아냐?”

“…….”

멈칫한 체시어의 눈이 이내 나만큼이나 반짝였다.

“그렇겠다. 알았어.”

“우와아아!”

난 팔을 벌렸다. 체시어가 웃으며 나를 끌어안았다.

‘아잉, 헤어지기 싫당….’

사귄 지 두 달.

제일 풋풋한 지금이 하필, 사업이 가장 바쁜 시기라니.

억울해도 너무 억울했다.

체시어도 나만큼이나 헤어지기가 아쉬운지, 우리는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떨어질 생각 없이 계속 안고 있었다.

하지만 딱 10분의 여유뿐인 신데렐라의 처지.

난 먼저 체시어를 밀어내고 급히 말했다.

“이, 있잖아. 우리 뽀뽀 한번 할래? 시간 없으니까 후다닥….”

“…….”

시간 없다는 말에 체시어는 망설이는 기색 없이 내 어깨를 잡고 입을 맞춰 왔다.

‘음.’

좋다. 좋아.

그런데, 뽀뽀.

정말… 말 그대로 뽀뽀.

오스카는 체시어를 경계했지만 사실 순수하지 않은 건 나다.

체시어는 도장 찍듯 그냥 입술을 대고 있는 행위 이상으로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사귄 지 두 달이면 키로 시작해서 스로 끝나는… 그러니까 뽀뽀에서 조금 발전한 스킨십을 시도해 볼 법도 한데.

‘설마 이러다가 평생 뽀뽀만 하는 거 아니겠지?’

나야 키스의 이론은 알지만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어서 먼저 시도하기 어려웠다.

민망하기도 하고.

‘오늘도 이게 다겠군….’

아쉬워하는 순간이었다.

‘뭐지?’

등 뒤에서 느껴지는 한기.

동시에, 멈칫하며 입술을 떼고 몸을 세우는 체시어의 얼굴이 보였다.

어쩐지 창백해진 낯빛.

내 뒤로 향해 있는 시선.

‘아, 망했다.’

난 본능적으로 느꼈다.

꼴깍, 침을 삼키고 뻣뻣한 움직임으로 고개를 돌려 보니.

“이, 이….”

역시 오스카가 서 있었다.

그는 머리끝까지 열이 올랐는지 팔을 벌벌 떨며 우리를 향해 삿대질했다.

“바, 바퀴벌레 같은 것들이 감히….”

체시어를 살려야 한다.

본능적으로 판단한 나는, 뛰어오는 오스카에게 달려갔다.

“스승니임!”

“비켜!”

그리고 당장이라도 체시어를 죽일 듯한 그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도망쳐!!!”

내가 고개만 돌려 소리치자, 체시어는 어쩔 줄 몰라 하며 허둥거렸다.

“뭘 도망쳐! 미쳤어?! 오늘 내가 저 새끼 주둥이 지져 놓은 다음에 팔 한쪽 분질러 놓을 거야!!!”

“안 돼요! 봐주세요!”

“어~ 봐줄게! 칼 들어야 하니까 오른쪽 말고 왼쪽 팔만 날리면 될 거 아냐?”

“그것도 안 돼요!”

난 힘겹게 오스카를 막으며, 체시어를 향해 한쪽 손을 뻗었다.

“난 괜찮아, 체시어!”

사라져가는 오작교 너머의 견우를 보며 눈물 흘리는 직녀가 된 심정이었다.

“스승님이 아마 나는 죽이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너만 살면 돼! 우리 살아서 다시 만나!”

체시어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 일단 살아야….”

중얼거리던 그의 고민은 짧았다.

“…미안해, 리리스.”

작은 목소리로 사과를 남겨둔 채, 체시어는 뒤돌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 개자식아!!! 거기 안 서?!!”

분노한 오스카의 비명이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아빠가 힘을 숨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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