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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힘을 숨김-228화 (229/261)

228화

* * *

대망의 살롱 견학일.

남부, 아르고니아.

눈 두는 곳마다 광활하게 펼쳐진 논밭에서는 소똥 냄새가 폴폴 풍겨왔다.

여기는 시골, 그 자체였지만….

‘고향에 온 기분!’

어렸을 때 제논에서 시골살이 7년 했던 나는 고향에 온 듯한 향수를 느끼며 나름 재미있게 즐겼다.

오전 9시에 제도의 파빌 신전에서 워프 게이트를 타고 출발해 견학을 마치고 돌아가려는 지금.

오후 3시, 아르고니아 신전.

제도 밖으로 나가본 적 없는 친구들도 다들 신기해하며 만족한 하루였다.

다만.

“리리스, 체시어 경은 안 와?”

“나 오늘 몸 상태 별로라 안 오려다가 네가 체시어 경 소개해 준다고 해서 꾸역꾸역 온 거란 말이야!”

“나 새벽부터 왜 꾸몄니…?”

“정말 여기에서 훈련하고 있는 건 맞아?”

나는 대역죄인이 되어 있었다.

‘이럴 줄 알았겠냐고요.’

계획과 달리 나는 체시어를 만나기는커녕 그의 머리카락 한 올도 못 봤다.

그도 그럴 게, 아르고니아 영주가 군대 훈련 장소는 쏙 빼놓고 영지 구경을 시켜 줬기 때문이었다.

“미안해, 얘들아….”

난 소심하게 중얼거렸다.

제국 최고의 인기남 얼굴 드디어 가까이서 보는 거냐며 기대했던 살롱 친구들은 전부 실망했다.

‘우쒸, 괜히 허세 떨지 말걸.’

기대하라고, 체시어 얼굴쯤 백 번이고 보여주겠다며 어깨가 한껏 올라 가슴을 텅텅 쳤던 과거의 나를 때려 주고 싶었다.

“얘, 너희들. 리리스한테 그러지 마. 체시어 경은 바쁘신 분이잖아. 쉽게 볼 수가 있겠니? 기회는 다음에도 있으니까….”

나의 살롱 절친, 클라라 쥘럿이 투덜거리는 아이들을 어른스럽게 달래 줬다.

정작 나는 친구들 볼 낯이 없어 소심하게 “미안.”만 연발하는데―

“…어어어?!”

―눈이 휘둥그레진 클라라가 내 뒤쪽을 보며 탄성을 내뱉었다.

모여 있던 친구들의 시선도 내 뒤로 향했다. 동시에 전부 화들짝 놀라 발을 동동 굴러댔다.

설마?

순간 기대하고 휙, 돌아보니.

역시!

“체시어!”

훈련복 차림의 체시어가, 턱 끝에 맺힌 땀을 닦으며 신전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늦을까 봐 달려왔는지, 그는 내 앞까지 와서도 계속 숨을 골랐다.

“엄마야, 엄마야. 어떡해!”

“와악! 난 몰라!”

친구들은 체시어의 등장에 어쩔 줄 몰라 하며 소리를 질러 댔다.

물론 나도 내적 비명을 지르고 있었지만, 태연한 척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면서 말했다.

“왔어?”

“…미안, 리리스. 시찰 동선이 우리 훈련 장소랑 겹칠 줄 알았는데, 아니었더라.”

“미쳤나 봐! 들었어? 미안하대!”

“세세세상에! 둘이 진짜 친한 거 맞구나!”

다 들리는 목소리로 속삭인답시고 뒤에서 조잘거리는 친구들.

대역죄인이 될 뻔했던 나는 다시 어깨가 한껏 올라간 채 친구들을 가리켰다.

“인사해, 체시어. 나랑 같이 살롱 다니는 친구들이야.”

“안녕하세요.”

“꺄아악!”

“엄마, 엄마. 나 어떡해!”

난 친구들과 일일이 인사해 주는 체시어를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어휴, 하마터면 거짓말쟁이 허세 대마왕 될 뻔.

“리리스.”

친구들과 전부 인사를 나눈 체시어가, 멀찍이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내게 돌아오며 물었다.

“그런데 왜 벌써 가? 살롱 항상 일곱 시에 끝나지 않았어?”

“응. 일곱 시에 끝나는 건 맞는데, 계속 여기 있진 않지. 제도에 가서 저녁 먹고 일곱 시에 파하는 거야.”

“…그렇구나.”

체시어가 한숨을 쉬었다.

나도 한숨이 나왔다.

기껏 힘들게 만날 자리를 마련했는데 얼굴 딱 10분 보고 헤어져야만 하는 상황.

“하아.”

난 저 멀리, 워프 게이트 앞에서 인원 체크를 하는 귀부인들을 지켜보며 시무룩해졌다.

그러다, 번뜩.

“엇, 체시어! 나 잠깐, 귀 좀.”

“응?”

좋은 생각이 났다.

난 체시어에게 속닥이며 계획을 알린 다음 귀부인들에게로 갔다.

돌아가면서 살롱 견학의 인솔을 맡는 엄마들.

오늘의 인솔자 대표는 클라라의 엄마, 쥘럿 자작 부인이었다.

“저어, 부인!”

“어? 응, 리리스.”

“혹시 저 영지 구경 조금만 더 하고, 따로 돌아가도 될까요? 살롱 끝나는 시간 맞춰서 안 늦게 돌아갈게요.”

“어머, 그건 곤란해. 갈 때 다 함께 가야지. 너 혼자 돌아다니기에는 보호자도 없고 호위도 없는데….”

난 냉큼, 타이밍 맞춰 다가오는 체시어의 팔을 잡아당겼다.

“마침 친구가 여기 있거든요. 오늘 안 그래도 보기로 했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남매처럼 자란 친구인데… 아마 제 보호자 겸 호위는 충분히 해 줄 수 있을 거예요.”

쥘럿 부인을 포함한 귀부인들의 눈이 전부 땡그래졌다.

리브르 공작 가문 후계자.

황실 정예군 마검사단장.

어디에 내놔도 신원만은 확실한 체시어.

결정적으로 그는 지금, 내 또래의 딸을 둔 귀부인들에게 최고의 예비 사윗감이었다.

“어머, 어머. 우리 애가 안 그래도 오늘 체시어 경 볼 수 있을 거라고 아침부터 호들갑을 떨더니 정말….”

“세상에. 이 시골 영지에는 무슨 일로 와 있었대요?”

“훤칠한 것 좀 봐. 내가 리브르 공자님 얼굴을 다 보네!”

“혹시 만나는 아가씨 있어요?”

예상대로 귀부인들은 체시어에게 홀랑 빠져들어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계획대로….’

난 소리 죽여 웃었다.

* * *

계획은 완벽했다.

다섯 시에 훈련이 끝난다는 체시어를 기다렸다가 번화가에서 저녁을 먹고 헤어지기 전 꽃집에서 장미도 한 송이 선물 받았다.

현재 시각 오후 6시 45분.

체시어와 함께 돌아온 아르고니아 신전.

이제 여기서 워프 게이트를 타고 7시까지 제도로 돌아가면 완벽했다.

그래, 완벽….

분명 완벽했는데….

“으궁, 허리야….”

“주신관님, 배는 안 고프셔요?”

고요한 신전.

두 명의 신관 할아버지들이 워프 게이트 앞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아직 멀었습니까?”

체시어가 초조하게 묻자, 주신관 할아버지가 그를 휙 노려봤다.

“떼잉, 젊은 사람이… 못쓰겠구먼! 왜 노인을 재촉하고 그랴?”

“그런 게 아니라….”

체시어가 뒤에 선 나를 힐끗 보며 덧붙였다.

“친구가 여자라서요. 귀가가 늦어지면 집에서 걱정하십니다.”

“그런 거이 걱정됐으믄! 아까 와푸 게이트 열렸을 때 친구들이랑 같이 탔어야지!”

“…죄송합니다.”

난 체시어를 혼내는 주신관 할아버지를 몰래 노려봤다.

두 신관 할아버지의 얼굴은 낯이 익었다.

왜냐고?

‘아빠랑 오스카한테 신분 빌려준 할아버지들이잖아!’

3년 전, 내가 성지 순례를 떠났을 때의 일이다.

노인 분장까지 하며 날 몰래 따라왔던 아빠와 오스카.

아마 이곳 신관 할아버지들과 연이 있어서 얼굴과 신분을 빌렸겠지.

“이를 어쩌나. 우리 주신관님이… 젊었을 때는 성력이 빵빵하셔가지고… 워프 게이트는 1초 만에 충전시키고 그러셨는데….”

“홀홀홀! 그랬지, 그랬지….”

그래, 워프 게이트는 충전형.

신관들이 미리 성력을 충전해 놔야 가동된다.

한데 내가 돌아가려는 타이밍에 딱 방전됐다는 게 아닌가?

“미안. 오늘 게이트 쓴 사람들이 많아서 방전됐나 봐. 원래 여기 오는 사람들 거의 없는데….”

체시어가 내게 사과했다.

“아냐. 네가 뭐가 미안해.”

그의 말대로 찾는 사람 없는 이 시골에 오늘은 방문객들이 많았다.

체시어와 대규모 사병들, 게다가 살롱 식구들까지.

‘아니, 그래도!’

사람들 좀 많이 왔다 갔다 했다고 워프 게이트가 방전된 경우는 또 처음 봤다.

‘풀충 좀 해 놓지, 진짜!’

그리고, 방전되었다고 한들.

충전에 30분 넘게 고전하고 있는 신관들도 처음 봤고 말이다.

‘미치겠네!’

이동 마법을 쓸 수도 없다. 내가 아르고니아에 남았다는 걸 모두가 아니까 게이트를 통해서만 제도로 돌아가야 했다.

“혹시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해요?”

난 초조해져서 물었다.

“으음, 어디 보자…. 쉬지 않고 넣으면… 내일 아침? 아니, 점심때쯤?”

“……?”

부신관의 말에 난 귀를 의심했다.

나만큼이나 놀란 체시어가 잽싸게 끼어들었다.

“그건 안 됩니다. 조금 더 빨리는 안 될까요.”

“아니, 그럼 워쩌라구…. 재촉해 봐야 빨리 안 차…. 가뜩이나 늙어가지구 속상헌디… 아, 맞다!”

구시렁거리던 주신관이 탄성을 내뱉었다.

뭔가 방법이 있나?

“부신관, 밥 좀 먹고 와서 다시 하드라고….”

“홀홀. 그럴까요….”

띠용.

진짜 밥 먹으러 가려는지 깡마른 다리를 후들거리며 일어나는 두 신관 할아버지들.

“자, 잠깐만요!”

난 울먹이며 그들을 붙잡았다.

성력이야 아무나 빵빵한 사람이 넣으면 되겠지.

‘보자, 체시어는 성력이 없으니까 안 되고….’

난 능력을 쓰면 된다.

5sec

가성비 좋고.

“죄송해요. 저 집에 빨리 가 봐야 해서요. 제가 충전해 드리면….”

“떽!!!”

“깜짝아!”

힘도 없어 보이더니, 대체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기세로 주신관이 내게 빽 소리쳤다.

“큰일 날 소리! 부정 타!”

“…네?”

“요 신전에서 이 와푸 게이트를 관리하는 것은… 우리에게 마지막 남은 사명 같은 것이여! 외부인이, 응? 함부로 만지고 그러는 것 아녀!”

“그럼요, 맞지요. 젊은 친구들, 양해 부탁해…. 우리 신전의 오랜 관례라서….”

“그게 무슨?”

황당하네.

‘불법으로 신분 양도하는 할아버지들이 무슨 관례 타령이야?’

어이가 없었지만, 노인을 공경하라 배운 나는 한판 붙고 싶은 마음을 감추고 불쌍한 표정으로 두 손을 모은 뒤에 말했다.

“저 집에 가야 해요. 아빠한테 연락 못 해서 걱정하실 거예요.”

“그러니까 아까 친구들 갈 때 같이 가지 뭣 혔냐고!”

“에고, 주신관님…. 더 놀고 싶었나 본데 어린 친구한테 너무 화내지 마시고….”

그나마 얘기가 통하는 부신관이 방긋 웃으며 덧붙였다.

“걱정하지 마, 여기 방 많어!”

“네?”

“여기가 시골이라… 어린 친구들 다 제도나 큰 영지로 가 버리고… 신입 사제가 한 명도 지원을 안 한 지 몇 년은 됐단 말이지…. 해서 숙소 다 비어 있어. 방 많어!”

지금 그 문제가 아니잖아요…?

황당해서 어버버거리는데, 쯧쯧 혀를 찬 주신관이 십자가 모양의 키를 빼서 성력 충전구를 닫아 버렸다.

아마도 몰래 워프 게이트를 건드릴까 봐 의심하는 모양.

“밥 먹으러 감세!”

“예이, 뭐 드실래요?”

유유히 떠나가는 둘을 보며 체시어가 “하.” 하고 황당한 한숨을 터뜨렸다.

‘뭐야, 이거 지금?’

난 머리가 새하얗게 비어 버렸다.

‘막차 끊겨서 외박해야 하는 상황이야?’

가슴에 손을 얹고 맹세하건대 나는 전혀 이런 상황을 의도하고 여기 남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 정말 묘했다.

“여기 신관님들, 공작님 아시는 분들 맞지?”

체시어가 물었다.

“전에 성지 순례 갔을 때 공작님이랑 마탑주님이 신분 빌리신 분들 같은데.”

어쩐지 체시어의 목소리에 의심이 묻어 있는 것 같아 나는 펄쩍 뛰었다.

“나나나는 모르는 일이다?”

“…….”

“아빠가 아는 사람들이겠지! 나는 진짜 몰라! 정말 우연한 상황이야! 내가 의도하고 그런 거 아니다?”

체시어는 변명하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런 뜻으로 한 말 아닌데.”

“하! 아니, 진짜!”

진짜 뭐지?

‘그럼 어떡해? 저 할아버지들이 워프 게이트 충전해 줄 때까지 나 여기 있어야 해? 오늘 여기서 자야 하는 거야? 나 혼자? 체시어는 군대 숙소로 돌아갈 텐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으려니 체시어가 말했다.

“어쩔 수 없지. 여기서 자야겠다. 호위가 없으니까 내가 있어 줄게.”

“…….”

난 꼴깍, 침을 삼켰다.

갑자기 체시어의 얼굴을 보기가 민망해져서 절로 고개가 돌아갔다.

“하, 차차참 나!”

열심히 손부채질했지만 어째선지 뜨거워진 얼굴은 가라앉지 않았다.

“무무무슨 이런 일이! 하, 진짜! 하!”

나는 정말 집에 가고 싶은데~?

진짜 어이없네~?

왜 이렇게 되는 거야~?

아빠가 힘을 숨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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