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화
“피곤하니까 올라갈래?”
“…….”
체시어의 제안에 나는 망설였다.
하루 종일 돌아다니느라 피곤한 건 맞지만, 왠지 냉큼 고개를 끄덕이기가 눈치 보였다.
“기, 기왕 이렇게 된 거 그럼….”
난 뺨을 긁적이며 신전의 창밖을 바라보았다.
노을이 지고 있었다.
“…바깥 구경 좀 더 하고 올까?”
* * *
그 시각.
제도의 갤러리 하우스.
참사가 일어났음을 꿈에도 모르는 에녹은, 살롱 장소에서 악시온과 함께 리리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살롱이 끝나면 리리스를 데리고 근사한 곳에서 외식이나 할 생각이었다.
“뭐 먹지?”
“항상 가던 데 가. 리리스가 좋아하는 데 있잖아.”
“아하, 그래야겠다.”
두 남자는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면서 갤러리 밖으로 나오는 아가씨들을 지켜보았다.
“…….”
“…….”
꽤 많은 인원이 모임을 마치고 나와 각자 마차를 타고 돌아갔다.
“…뭐지?”
에녹이 고개를 갸웃했다.
나올 애들은 다 나온 것 같은데 리리스만 안 보였다.
“공주 왜 안 나오지?”
“글쎄?”
에녹과 악시온이 의아해하며 서로 마주 보았다.
* * *
우리는 해 질 녘의 아르고니아를 실컷 돌아다녔다.
물론, 시골이라 볼 건 없었다.
광활하게 펼쳐진 논밭과 울창한 산세 같은… 특별하지 않은 풍경.
소똥 냄새와 시골길.
그럼에도 같이 두런두런 대화하며 손을 잡고 걷는 순간이 좋았다.
‘진짜로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나쁘지 않은걸.’
사업만 끝나면 이 평화로움을 평생 만끽할 수 있다니.
난 새삼 행복해져서 맞잡은 체시어의 손에 꽉, 힘을 줬다.
“공작님이 걱정하시겠네.”
나와 달리 계속 신경 쓰고 있던 체시어가 한숨을 쉬었다.
아빠….
그렇지, 아빠.
지금쯤 아빠는 내가 아르고니아에 고립됐다는 사실을 알았을 거다.
당장에 달려오려 하겠지만, 워프 게이트가 충전되기 전에는 제도에서 이곳으로 넘어올 수도 없고.
‘이동 마법으로 와도 문젠데….’
아빠가 와 봤자, 나는 게이트를 타지 않고 돌아가면 안 되는 몸.
적어도 내일 아침까지는 여기서 떠날 수 없었다.
‘아빠 어떡하냐.’
발을 동동 구를 제임스 브라운 씨가 눈에 선했다.
“음, 그래도 괜찮아. 걱정하지 마, 체시어. 너랑 같이 있는 거 알게 되면 제임스 씨도 안심하겠지.”
“…….”
체시어는 어쩐지 눈을 껌뻑이다가 또 한숨을 쉬었다.
“사실 우리가 같이 있는 그 점을 더 걱정하실 것 같아서….”
“응?”
“아니야. 이쪽으로 돌아가면 수원지가 있던데. 가 볼래?”
한참 논밭 사이를 가로지르던 우린, 산을 돌아서 난 좁고 울퉁불퉁한 길을 만났다.
“앗, 좋아! 그런데 좀 쉬었다 가자. 나 발이 좀 아파서.”
“아.”
근처의 편평한 바위 하나를 잡아 앉자, 체시어가 내 앞으로 와 무릎을 굽혔다.
“미안. 발 아플 거 생각 못 했다.”
“괜찮아. 굽 높은 구두는 아니라 그렇게 많이 아픈 건 아냐. 그냥 많이 걸어서… 응?”
손수 내 구두를 벗겨 든 체시어가 뒤돌아 등을 내밀었다.
“업혀.”
“…….”
흠흠. 이런 걸 바라고 발이 아프다는 투정을 부린 건 아니지만.
난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살며시 내리며 냉큼 체시어의 목을 안고 등에 업혔다.
체시어는 나를 업고 계속 걸었다.
평화롭고 한가로운 풍경.
익숙한 체시어의 체취.
“좋다….”
나는 체시어의 목에 뺨을 붙이고 말했다. 작은 웃음과 함께 “나도.” 하는 대답이 들려왔다.
난 문득 그를 놀리고 싶어져서 물었다.
“좋아? 뭐가 좋은데?”
“…….”
“시골길? 저녁 하늘? 아니면, 오늘 훈련 다 끝난 거?”
체시어는 또 웃으며 말했다.
“아니, 너.”
* * *
같은 시각.
갤러리 하우스에서, 마차도 타지 않고 전속력으로 달려 파빌 신전에 도착한 에녹의 얼굴은 창백했다.
같이 온 악시온도 헉헉거리며 숨을 골랐다.
“공작님?”
신전의 워프 게이트 앞에는 오늘 살롱의 대표 인솔자였던 쥘럿 부인이 먼저 와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부인. 딸이 없길래 여기로 와 봤는데….”
“아아, 네. 리리스가 견학 장소를 더 구경한다고 해서요. 그래서 저는 다른 애들 데리고 먼저 제도로 왔고요.”
“…예?”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인솔자가 애 한 명을 남겨 두고 나머지만 데리고 돌아왔다고?
에녹은 황당했다.
“분명히 살롱 끝나기 전까지 돌아오기로 했는데 너무 늦어져서 여기 와 보니까….”
쥘럿 부인이 말하는데, 워프 게이트를 살피고 있던 신관이 다가왔다.
“이거, 아무래도 한참 걸릴 듯합니다. 아르고니아 신관님들이 워낙 노쇠하신 분들이라, 게이트가 방전되면 충전하시는 데 시간이 좀 들어서요.”
에녹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표정에, 쥘럿 부인이 난처해하며 덧붙였다.
“아르고니아 신전 워프 게이트가 방전돼서 못 오고 있는 모양이에요.”
“아니, 그게….”
주신관 한 명에 부신관 한 명.
두 노신관이 전부인 아르고니아 신전을 떠올리며 에녹은 경악했다.
‘설마 그 할아버지들이 또!’
7년 전. 리리스가 능력자 양성소에서 퇴소하던 날.
딸을 마중 나가기로 했던 에녹은 하필 그날 아르고니아로 토벌을 갔다 고생했다.
게이트가 방전되는 바람에 시간 맞춰 제도로 돌아갈 수가 없었지.
방전된 게이트에 성력 충전이야 아무나 하면 될 일 아닌가?
그럼에도 노신관들은 외부인이 워프 게이트에 손대면 안 된다며, 관례까지 들먹이고 깐깐하게 굴었다.
아마 리리스가 그곳에 발이 묶여 못 오고 있는 이유도 같을 터.
“야, 야….”
그때, 어쩐지 악시온이 창백해진 얼굴로 에녹의 팔을 쿡 찔렀다.
“왜?”
“애, 애가 견학 간 곳이 아르고니아였나?”
“어. 왜?”
악시온은 대답하지 않고 침을 꿀꺽 삼켰다.
뭐야. 딸이 시골 영지에 고립된 마당에 친구의 이상한 반응까지 살필 겨를은 없었다.
에녹은 쥘럿 부인을 노려보았다.
‘게이트 방전이야 예상 못 했다 쳐도, 인솔자가 너무한 거 아닌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자기 딸 아니라고 낯선 영지에 애를 홀라당 버려두고 와? 같이 자식 키우는 부모가 부모 맘을 몰라?
한마디 해야 하나?
고민하던 에녹이 이내 쯧, 혀를 차고는 뒤돌았다.
이미 벌어진 일. 애를 거기에 혼자 둘 수는 없으니 같이 있어 주기라도 해야 했다.
“자자잠깐만!”
“뭐야? 왜?”
이동 마법을 시전하려 다섯 걸음 정도 떼던 에녹이, 악시온에게 붙잡혔다.
“너 뭐 하게? 설마 지금 아르고니아로 가려는 건 아니지?”
악시온이 속삭였다.
에녹도 목소리를 죽여 답했다.
“가야지, 그럼.”
“애 데려오게?”
“데려오진 못하지. 거기 발 묶인 거 다 아는데.”
“그럼?”
“그래도 혼자 둘 순 없잖아. 내가 가서 같이 있어 주게.”
“미쳤냐? 아르고니아에도 보는 눈이 있을 텐데, 게이트도 안 타고 거기 뿅 나타나서 어쩌게? 이동 마법 소문낼 생각이야?”
왜인지 악시온은 필사적으로 에녹을 말렸다.
“애 혼자 있으면 신전에서 묵으면 되겠지만, 너까지 가면 어떡하라고? 보는 눈 없는 데로 딸 데리고 가서 노숙이라도 하게?”
“어어, 그래. 네 말도 맞는데….”
“정신 차려. 지금 제일 신중하게 움직여야 할 시기야. 괜한 짓 했다 꼬리 밟히지 말자.”
에녹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게 무슨 꼬리 밟힐 일씩이나 돼? 거기 가 봤자 노신관 두 명이 전부인데. 내가 바보도 아니고, 문제 안 만들 테니까 걱정하지 마.”
“…….”
“너 좀 이상하다?”
다시 신전을 나서려는데 악시온이 또 에녹을 붙잡았다.
“야, 진짜 안 돼.”
“왜!”
“실은 다른 이유가 있어.”
“뭔데!”
“…거기 사람이 좀 많다. 실은, 네가 지금 제일 가면 안 될 곳이야. 혹시 걸리기라도 하면 큰일 나. 그게, 거기가… 황제가 정예군 사병 훈련 보낸 장소라서….”
“……?”
순간, 에녹이 멍해졌다.
정예군 사병 훈련?
소식은 안다.
지체 없이 전쟁을 계획한 황제가 곧바로 귀족 가문의 사병들을 차출했고, 체시어에게 그들의 훈련을 명했으니까.
한데 훈련하는 장소가 어디인지는 아직 몰랐다. 아마 체시어가 정했을 텐데….
“설마 아르고니아야?”
당황한 에녹의 눈에 다가오는 쥘럿 부인이 보였다.
“공작님, 괜찮으세요? 어쩐지 표정이 좀 이상하셔서. 체시어 경이 같이 있으니 크게 걱정하실 건 없을 텐데요. 들어보니까 아마도 리리스랑 약속이 된 것 같았거든요. 알고… 계셨죠?”
“…….”
세상에.
그랬구나.
그래서였어.
어쩐지 살롱 인솔자가 귀족 아가씨를 시골 영지에 냅다 버리고 온 게 이상하다 했다.
‘그러니까 지금 이 모든 상황이… 계획된 거란 말인가?’
에녹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리리스의 살롱 견학 장소가 아르고니아로 정해진 것은 한참 전.
체시어가 사병 훈련 장소를 정한 것은 그 이후다.
“에, 에녹. 나는 리리스가 아르고니아로 견학 가는 건 전혀 몰랐다.”
악시온이 슬쩍 발을 뺐다.
“알았으면 체시어가 아르고니아로 훈련 장소를 정했다고 할 때… 이상해서 말렸을 거야. 진짜로….”
“…….”
에녹의 눈앞이 새하얘졌다.
외박하지 말라고 했더니 웬 깡촌 영지까지 가서 기어코 남자 친구를 만난 리리스.
여자 친구 얼굴 한번 보겠다고 사병 훈련 장소까지 치밀하게 정한 체시어.
“아, 아.”
머리를 짚고 비틀거리는 에녹을, 악시온이 놀라 부축했다.
“야! 괜찮냐?”
“와, 아니. 아….”
그리고, 딸 둔 아버지의 애간장을 제대로 녹여버리려는 듯.
타이밍 맞춰 청춘남녀를 고립시킨 워프 게이트…….
“……연애하는 남자가 얼마나 음흉해질 수 있는지는…….”
걱정하던 오스카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환청처럼 울려 퍼졌다.
“……지금부터 체시어 그 녀석을,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라고 생각하세요.”
“신이시여….”
영혼이 빠져나간 에녹이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아빠가 힘을 숨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