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화
* * *
아르고니아 신전.
아홉 시쯤 돌아와 보니 두 신관 할아버지들은 열심히 워프 게이트를 충전하고 있었다.
내가 하면 되는데 굳이 억지 부리면서 집에도 못 가게 하는 할아버지들이 야속했지만.
‘어쩔 수 없지.’
늙어서 걷기도 힘들어 보이는데 열심히 마나 뽑는 모습이 좀 안타까워서, 더 말을 얹지는 않기로 했다.
“좋네!”
부신관이 친히 내어준 사제들의 숙소가 나쁘지 않기도 했고.
물론 오래 안 쓴 방이라 먼지가 좀 있었지만, 체시어가 창문 열어서 환기도 하고 이불도 깨끗하게 털어 줘서 나름 쾌적하게 잘 수 있을 듯했다.
나는 씻은 다음 편한 사제복까지 빌려 입고 침대에 다이빙했다.
“잘 자, 리리스.”
“엥?”
체시어가 문고리를 잡고 나가려다 의아해하는 나를 돌아보았다.
“왜?”
“너 어디 가? 같이 있어 준다고 하지 않았어?”
“응. 안 자고 밖에서 지킬 테니까 걱정하지 마.”
“아니, 뭔….”
진짜 호위를 하겠다고?
“굳이 내 방을 지킬 필요가 있어? 여기 누가 있다고? 저 밑에서 워프 게이트에 마나 넣고 있는 할아버지 두 명밖에 없는데?”
“그래도 너 혼자 여기에서 재울 순 없잖아.”
“응. 그런데 너도 자야지. 여기가 무슨 전쟁터 한복판도 아니고 내 방 지키면서 불침번 설 필요는 없어.”
“…….”
“넌 내일 또 훈련하러 가야 하는데 밤을 새우면 어떡해?”
“괜찮아. 안 자도 돼.”
“안 돼! 자!”
체시어는 난처해하며 이마를 문질렀다.
“알겠어. 문밖에 앉아서 잘게.”
“멀쩡한 방 놔두고 왜 바닥에서 자는데?”
“너 지켜야 하니까.”
“아아니!”
답답해!
“여기서 자!”
“…….”
체시어는 완강한 나를 보며 입술을 달싹이다가, 하는 수 없다는 듯 멀찍이 있는 간이 의자에 털썩 몸을 앉혔다.
“와….”
“잘 자.”
“내가 너 잡아먹니?”
“그런 게 아니라….”
“내가 무슨 짐승이야? 너 나처럼 작고 무해한 짐승 본 적 있어?”
“…….”
“봤냐구~!”
“아니, 못 봤어.”
난 얼굴에 두꺼운 철판을 깔고 침대 위를 팡팡 두드렸다.
“…그건 진짜 아니야.”
체시어가 단호히 거절했다.
나는 한숨을 쉬며 일어났다.
“정 그러면 네가 침대에서 자. 넌 내일 훈련해야 하지만 나는 마탑 쉬는 날이라 괜찮아. 그니까 피곤해도 내가 좀 불편하게 자지, 뭐.”
“리리스.”
“왜?”
“…….”
체시어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결국, 잠깐 생각하던 그는 “알았어.” 하고 내 등을 밀어 침대로 보낸 뒤 그 옆에 앉았다.
난 다시 발랑 누워서, 차마 눕지 못하고 한숨만 푹푹 쉬는 체시어의 등을 바라봤다.
“대체 어떻게 게이트가…? 방전…? 하필 오늘…? 하아, 왜 이런 일이….”
“……?”
“말도 안 돼….”
평소에는 말수도 없던 체시어가 쉴 새 없이 중얼거리는 말을 듣고 나는 어이없었다.
“너 그거 무슨 뜻이야?”
“뭐가.”
“내가 안 했다니까?!”
난 억울해서 벌떡 일어났다.
“너랑 더 놀자고 했을 때, 진짜 난 집에 돌아갈 생각이었거든? 완전 우연히 게이트 방전된 거거든? 내가 무슨 신이야? 게이트까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은 나한테 없…!”
“…….”
없진 않지.
나 못하는 거 없지, 참.
“그으래! 할 수 있긴 하지만 진짜 내가 안 했다구! 억울해!”
“알아. 나는 네가 했다고 말한 적도 없는데 왜 그래.”
“네가 날 자꾸 이상하게 보니까 그렇지!”
“이상하게 안 봤어.”
“…….”
“굳이 침대에서 자라고 강요하는 건 좀 이상하지만.”
“난 그냥 네가 바닥에서 자는 거 보기 싫어서 그런 거야! 그리고 너!”
난 이렇게까지 질색하는 체시어에게 섭섭했다.
“나 싫어? 나랑 그냥 같이 눕는 것도 싫은 거야? 옛날엔 자주 같이 낮잠도 자고 그랬잖아?”
“아니, 안 싫어. 그리고 그땐 어렸잖아. 지금은… 공작님도 걱정하시고 괜히 죄짓는 기분이라 그래.”
“이게 뭐가 죄야? 우린 남자 친구, 여자 친구인데. 내가 뭐 이상한 짓 하자고 했어? 그냥 손만 잡고 자자는 건데!”
난 체시어의 손을 잡고 다시 발랑 누웠다. 그가 당기는 내 손길에 딸려 엉거주춤 누웠다.
“하아….”
“이제 자자!”
우리는 손을 잡고 정자세로 나란히 누웠다. 정적이 흘렀다.
힐끗 옆을 봤더니, 체시어는 나와 눈도 안 마주치려는 듯 반대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너무해. 네가 이렇게 예민하게 구니까 왠지 더 나쁜 짓 하는 거 같아.”
“나쁜 짓 안 해. 걱정하지 마.”
“연인끼리는 나쁜 짓 아니거든?”
“우리는 아직 어리니까 나쁜 짓 맞아.”
뭐야, 이 조선시대 마인드는?
설마 나처럼, 얘도 조선시대 선비 가문에서 여기로 환생했나?
“혹시 선비세요?”
“뭐?”
“아니야. 그런데 너, 성기사단에 있는 라울 경이라고 알지? 이번에 둘째 낳았대.”
아빠한테 들었다. 라울 경은 체시어랑 동갑인 18살의 성기사다.
“……?”
내 말에, 체시어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벌떡 일어났다.
“나 그냥 저기서 잘게.”
그리고는 다시 의자로 가려 했다.
“어허.”
놀리는 거 재미있어. 나는 쿡쿡 웃으며 체시어의 팔을 붙잡았다.
“장난 한번 쳐본 거여, 총각! 왜 심각해지구 그려~!”
“…….”
음흉한 아줌마처럼 말하는 나를 야속하다는 듯 노려본 체시어가 후, 한숨 쉬며 다시 누웠다.
난 체시어 쪽으로 돌아누워서 그를 빤히 쳐다봤다.
“히히.”
“…….”
“체시어.”
“…왜.”
“고마워.”
뻣뻣하게 천장만 보던 체시어의 고개가 내게 돌아왔다.
“뭐가?”
“음.”
한 번쯤 말하고 싶었다.
지금이라면 딱 좋은 타이밍이겠지.
“날 위해서 아빠랑 같이 사업해 주잖아. 네 목숨 걸고.”
“…….”
“근데 나, 너한테 고맙기 싫어.”
체시어가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있지, 너는 왜 황제 폐하를 죽이려고 해?”
“…….”
“내가 프리메라니까? 황제 폐하가 살아 있으면 내가 무사히 살아갈 수 없으니까?”
“응.”
“그것 말고 다른 이유는 없어? 내가 프리메라가 아니었다면 넌, 사업 안 했을 거야?”
체시어는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아니, 그래도 했겠지. 황제 한 명만 사라지면 좋은 세상이 오니까.”
“너도 그걸 간절히 바라고 있어? 솔직히 말해 줘. 사람들 다 행복한 좋은 세상을 만들려는 건, 제임스 씨가 사업하는 이유잖아.”
처음에 체시어가 검을 배운 건, 자신을 거두어 준 아빠에게 은혜를 갚기 위함이었다.
후에 자기 목숨까지 걸고 혁명에 집착했던 건, ‘황제를 없애야’ 한다는 강박 때문이었다. 내가 프리메라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난 너한테 고맙기 싫어. 너한테 나 말고 다른 이유도 있으면 좋겠어.”
체시어가 걸어온 7년 동안의 길.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어디에도 체시어 자신만의 의지는 없었다.
대의를 위해서도 아니고, 혁명이 성공한 뒤 그가 바라는 세상이 있어서도 아니다.
난 그 점이 항상 마음에 걸렸다.
“사람마다 각자의 이유가 있는 거지. 내 이유는 너인 거고.”
“물론 그렇지만, 난 너에게… 그런 맹목적이고 단순한 목표 말고, 다른 이유가 있으면 좋겠어. 생각해 봐. 네가 진짜 바라는 게 뭔지.”
“나는 너를 살려야겠다는 목표만으로도 충분히 목숨을 던질 수 있어. 그러니까 지금 내 이유에 만족해. 다른 이유를 생각하라고 하면 당장은 모르겠어.”
난 두 번 생각하지도 않는 그의 답변에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
“체시어.”
“응.”
“너 혹시, 꾸고 싶은 꿈 있어?”
“꿈?”
“응. 지금 당장 네 앞에 펼쳐지면 행복할 것 같은 상황을 떠올려 봐.”
“…….”
“맛있는 걸 배불리 먹는다거나, 1년 내내 아무것도 안 하고 침대에서 뒹군다거나, 귀여운 고양이를 쓰다듬는다거나….”
난 엎드려서 턱을 괴고, 체시어를 보며 웃었다.
“상상해서 말해 봐.”
“글쎄.”
“어휴, 이게 뭐 어려워? 그냥 상상 한번 해 보라니까?”
“진짜 일어날 일도 아닌데 굳이 왜 그런 걸 상상해야 하는지 모르겠는데.”
“…….”
후.
나는 하는 수 없이 포기하고 바로 누웠다.
“그럼 그냥, 상상하지 말고 ‘좋은 꿈을 꿔야겠다’ 정도만 생각하고 자. 무의식중에 네가 바라던 꿈이라도 꿀 수 있게.”
“…….”
“저기요!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
“알겠어.”
체시어는 고개를 끄덕이고 눈을 감았다.
난 그가 잠이 들 때까지 얼굴을 한참 지켜보다가, 슬금슬금 옆구리를 안고 찰싹 붙었다.
“손만.”
헉.
잠든 줄 알았던 체시어가 날 쭉 밀어내고 손을 잡았다.
“손만 잡자, 우리….”
“쳇.”
“…….”
체선비구먼.
결국, 난 포기하고 굿나잇 인사를 남겼다.
“좋은 꿈 꿔, 체시어.”
1sec
* * *
짹짹짹.
지저귀는 새 소리.
창으로 비쳐든 따사로운 햇볕에 체시어는 눈을 떴다.
아침인 모양이었다.
“여보오오, 언제까지 잘 거야?”
익숙한 목소리.
체시어는 누운 채로 바깥을 향해 고개 돌렸다.
열려 있는 문 너머, 부엌의 풍경이 보였다.
맛있는 음식 냄새.
불 앞에서 등을 보인 채 서 있는 아내의 뒷모습.
‘뭐지.’
분명 익숙한 풍경이건만 어쩐지 오늘따라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체시어는 웃으며 일어나 아내를 향해 다가갔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
가까워지는 걸음걸음마다 심장이 뛰었다.
“잘 잤어?”
아내의 뒤에서 허리를 끌어안은 체시어가 드러난 목에 작게 입을 맞추며 대답했다.
“응, 잘 잤어.”
아빠가 힘을 숨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