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화
돌아본 아내가 방긋 웃었다.
변함없이 아름다운 웃음을 짓는 나의 천사.
리리스.
혁명이 성공하고 제국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그리고 체시어에게는 새로운 이름의 가족이 생겼다.
연인이었던 리리스는 이제 그의 아내가 되었고 체시어는 그녀의 남편이 되었다.
남들 모두 꾸리는 가정.
특별할 것 없는 관계였지만, 체시어에게는 매일매일이 이토록이나 가슴 벅찼다.
“이잉, 자기야. 간지러워….”
“뭐 만들어?”
리리스의 목덜미며 뺨에 자꾸 입을 맞추던 체시어가 물었다.
아침잠이 많은 아내가 어쩐지 먼저 일어나 있다 했더니, 불 위에서 보글보글 끓는 음식이 보였다.
“뭐, 뭘 만드냐니? 혹시 딱 봤을 때 뭔지 모르겠어?”
리리스가 당황했다.
“이거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거! 토마토랑 소고기 넣어서 끓인 스튜인데…?”
“…….”
…정말? 이게?
뻘겋게 끓고 있는 스튜에 기포가 퐁퐁 솟았다.
마치 지옥에서 갓 건져낸 악마의 음식 같았다.
“보, 보기엔 좀 그래도 분명히 맛있을 거야. 냄새는 나쁘지 않잖아? 맛 좀 봐 줘, 자기야.”
지옥불을 한 스푼 뜬 리리스가 후후 입바람을 불어 식히더니 들이밀었다.
체시어는 잠시 고민하다가 맛을 보았다.
“…….”
“어때?”
맛은… 보이는 그대로였다.
“맛있어?”
“응. 엄청.”
물론 그는, 기대하는 아내가 실망하지 않도록 선의의 거짓말쯤은 충분히 해 줄 수 있는 남편이었다.
“그런데 나머지는 내가 할게.”
하지만 아내에게까지 이걸 먹일 순 없지.
앞치마를 받으려는데 리리스가 휘휘 고개를 저었다.
“에이, 오늘은 안 돼. 맨날 자기가 음식 하잖아. 나도 양심이라는 게 있지. 생일날 정도는 내가 해 줄래.”
“아.”
맞다.
오늘이 내 생일이구나.
체시어는 새삼스레 웃음이 났다.
생일.
죽지 못해 살았던 그에게 아무 의미 없었던 날이다.
그저 수많은 날 중 하나. 챙겨 본 적도 없고 챙겨 주는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리리스를 만난 이후부터 달라졌다. 매년 제 생일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그녀 덕에, 체시어는 아무 의미 없던 날이 기다려졌다.
“생일 축하해, 자기야.”
정말, 너무너무 행복해서, 이대로 죽어도 좋을 만큼.
“고마워.”
앞으로도 평생, 네가 내 곁에서 계속 축하해 준다면 좋겠어.
생일이라는 건 참 행복한 날이야.
“앗, 내 정신 좀 봐!”
리리스가 화들짝 놀라며 여전히 제 허리를 감싸 안은 체시어의 팔을 풀었다.
“우리 왕자님 일어났나? 기저귀 봐 줘야 하는데!”
왕자님?
아, 맞아.
아들이 있었지.
태어난 지 1년 가까이 된, 리리스와 자신을 반반씩 꼭 닮은 사랑스러운 왕자님.
체시어는 앞치마를 벗으려는 리리스를 말렸다.
“내가 할게.”
“그럴래? 그럼 부탁해. 나 아침 마저 만들게.”
“응.”
돌아선 체시어의 심장은 어쩐지 쿵쾅쿵쾅 뛰었다.
왜지?
매일 보는 아들 얼굴인데.
어제도 분명, 잠 안 자고 칭얼거리며 엄마를 괴롭히기에 늦게까지 달래 주다 잠들었는데.
왜 이렇게 궁금하고, 보고 싶을까.
빠른 걸음으로 아기방에 도착한 체시어는, 멀찍이 작은 침대를 보며 멍해졌다.
“…….”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는 걸음마다 긴장이 됐다.
이윽고 침대 안을 들여다본 체시어는 그대로 굳었다.
“꺄아아.”
아빠가 반가운지 활짝 웃으며 팔을 뻗는 아들.
통통한 손가락이 꼼질거렸다.
새카만 머리와 푸른 눈.
엄마를 닮아 바다를 담아 놓은 듯한 눈동자에 체시어가 비쳤다.
“아….”
이게 무슨… 기분이지?
막 태어난 아들을 품에 안아 봤을 때도 이런 기분을 느꼈었던가?
가슴이 술렁거리는 새삼스러움에 체시어는 천천히 팔을 뻗어 아들을 안아 보았다.
“압….”
압…?
“아바, 압… 바!”
순간, 체시어의 눈이 커졌다.
아빠.
아이가, 아빠라고 했다.
‘엄마’라는 말을 제일 먼저 했던 아들.
옹알이를 시작한 지 좀 됐는데도 아직 아빠 소리는 못 해서 내심 서운했었는데.
마치, 그런 아빠 마음이라도 읽은 듯.
“압바!”
아이는 연신 체시어를 불렀다.
“아.”
그는 이내 깨달았다.
‘이거였어.’
내가 바라던 삶.
가족이 갖고 싶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가 간절히 원하던 것이었다.
다치고, 상처받고, 괴로워도….
그는 언제나 가족을 원했다.
사생아를 홀로 기르던 어머니가 매일 손찌검하며 소리치고 자신을 밀쳐내도 꾸역꾸역 곁에 있었다.
그래도 하나뿐인 가족이니까.
아버지에게 맡겨져도 비참한 삶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죽지 않고 악착같이 버텨냈다.
버티고 버티다 보면, 다정한 말 한마디쯤은 해 줄 것 같아서.
언젠가는 나를 가족이라고 말해 줄 것 같아서.
언젠가는 날 사랑해 줄 것 같아서.
“…….”
울컥했다. 눈가가 시렸다.
비로소 그는, 간절히 바라왔던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단단한 울타리를 누가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그 어떤 걱정도 할 필요가 없었다.
이제 이 나라는 평화로우니까.
그가, 이 평화를 만들어냈으니까.
아이는, 제 아들은….
하고 싶은 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검을 잡지 않아도 된다.
누군가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아도 되고, 누구나와 친구를 할 수 있고, 행복한 가정에서 아무런 걱정 없이 사랑만 받으며 자랄 수 있다.
“하아, 하.”
체시어의 숨이 거칠어졌다.
우는 듯, 눈물이 고였지만 웃고 있었다.
제 아들뿐만이 아니었다.
이제 모든 아이들이 그렇게 살 수 있다. 아니, 그렇게 살고 있었다.
내가 바꾼 이 나라에서.
내가 끝내 완성한, 평화 속에서.
“압바아아…!”
“그래….”
툭.
“…내가, 내가 네 아빠야.”
아이의 통통한 뺨 위로 체시어의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내가 해냈어.’
죽을 날만 기다리던 불쌍한 아이.
성도 없고, 이름도 불리지 못한 채로 길바닥을 전전하던 수백, 수천 명의 ‘체시어’.
그 아이들은 전부 사라졌다.
그리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걱정 없이 웃고 있는 수백, 수천 명의 ‘체시어 리브르’가 생겨났다.
끝내, 자신이 만든 평화였다.
“내가….”
체시어는 흐느끼듯 웃으며, 아들의 뺨 위에 떨어진 제 눈물을 닦아냈다.
“내가 해냈어….”
“어머! 여보, 왜 울어?”
체시어는 어느새 다가온 리리스를 돌아보았다.
“너는 왜 황제 폐하를 죽이려고 해?”
“내가 프리메라니까?”
“그것 말고 다른 이유는 없어?”
그래, 리리스.
나, 이제 알겠어.
“생각해 봐. 네가 진짜 바라는 게 뭔지.”
네가 나를 구해 준 순간부터.
네가 절망뿐이었던 내 삶에 희망이라는 걸 보여 준 그때부터.
나라는 사람도 꿈이라는 걸 꿀 수 있다고 알려 준 그때부터.
난 이런 미래를 바라오고 있었던 거야.
그리고, 이 나라에….
이런 행복한 미래를 누리는.
수백, 수천 명의 나를 만들어 주고 싶었던 거야.
그래서 나는, 달려왔던 거야.
“애가….”
체시어는 품 안의 아이와 함께, 아내를 힘껏 끌어안았다.
더 바랄 것 없는 충만감이 가슴 깊이 차올랐다.
“애가, 아빠라고 했어….”
그는 지금,
자신이 만든 평화로운 나라에서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 * *
“애가, 아빠라고 했어….”
중얼거리며 눈을 뜬 순간.
놀란 표정으로, 누워 있는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리리스.
아내는 어쩐지 어려져 있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아, 꿈이었구나.’
깨달은 체시어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르고니아 신전의 사제 숙소에서 잠들었었지.
어느새 아침이었다.
“너 무슨 꿈 꿨어?”
꿈…….
멋대로 리리스를 제 아내로 만들었다. 그것도 모자라 끌어안고 여기저기 쪽쪽 입을 맞춰 댔었지.
“…….”
민망해진 체시어는 허둥지둥 일어나서 리리스를 등지고 창가에 섰다.
당황해서 말없이 창밖만 내다보고 있으니―
“야아. 무슨 꿈 꿨냐니까?”
―곁에 다가온 리리스가 옆구리를 쿡 찔렀다. 목소리에 웃음기가 가득했다.
“애가 아빠라고 했다고? 너 아빠 되는 꿈 꿨지? 맞지?”
“…….”
“아하하! 뭐야~! 나 궁금해. 말 좀 해 봐. 아들이었어, 딸이었어?”
“모, 몰라.”
체시어는 달아오른 뺨을 손등으로 쓸며 리리스를 피해 도망쳤다. 리리스는 끈질기게 그의 팔을 잡고 따라왔다.
“아잉, 말해 줘어~! 애 엄마도 꿈에 나왔어? 누구였어? 나 궁금해!”
“진짜 몰라. 기억 안 나. 나 씻으러 간다.”
“치사해!”
나서는 문 뒤로 구시렁거리는 리리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탁.
문을 닫고 밖으로 나온 체시어는, 가만히 서서 꿈을 떠올렸다.
그게 정말 꿈이었나?
리리스의 체취도, 품에 안았을 때의 온기도.
아들의 얼굴도, 목소리도, ‘아빠’라고 불렀던 그 순간도 이렇게 생생한데.
‘글쎄. 꿈이 아닐지도.’
그래, 어쩌면.
꿈이 아닌 확실한 미래.
자신이 가는 길 끝에는 분명, 이 꿈이 현실이 될 미래가 있었다.
‘내가… 목숨을 걸고 검을 잡는 이유.’
그는 이제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리리스….’
너를 위해서.
그리고, 나를 위해서.
이 나라에 숨 쉬고 있는 수백, 수천 명의 너와 나를 위해서.
그들이 끝내 행복해질 수 있게.
나는 꼭, 해낼 거야.
체시어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주 환하게 웃음 지었다.
‘정말 좋은 꿈이었어.’
―라고, 생각하면서.
아빠가 힘을 숨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