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화
“잠깐만! 오해예요, 삼촌! 다 말씀드릴게요!”
난 호다닥 침대 아래로 내려갔다.
“오해? 무슨 오해? 지금 이 상황에서 더 말할 게 뭐가 있어?”
악시온이 화가 난 얼굴로 나와 체시어를 번갈아 노려보았다.
그래…….
조금 전 우리는 침대 위에서 찰싹 끌어안은 모습을 걸려 버렸다.
‘이거 어쩐다? 아빠는 나랑 체시어랑 사귀고 있는 것도 몰랐는데!’
붙어있지만 않았어도 어찌어찌 변명해 보겠는데, 안타깝지만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심지어 아직 옷도 못 갈아입은 나는, 사제들이 잘 때 입는 로브 차림이었으니.
‘와, 어제 입었을 땐 몰랐는데 지금 보니 이건 왜 이렇게 모텔 가운처럼 생겼지?’
절망적이었다.
* * *
결국 우린 모든 걸 실토했다.
사귄 지 두 달 된 것.
아르고니아로 사병 훈련 장소를 정한 이유가 여기서 몰래 만나 얼굴 보기 위함이었던 것.
등등…….
“연락할 방법이 없었을까?”
침대에 앉은 아빠가 나란히 무릎 꿇은 우리에게 물었다.
물론 아빠가 바닥에 무릎 꿇린 건 아니다. 체시어가 냉큼 먼저 꿇길래 나만 서 있을 수 없어서 옆에 따라 앉았다.
“체시어 너, 우리가 움직이기 힘든 상황이었던 거 알았지?”
옆에 선 악시온이 팔짱을 낀 채 물었다.
그래, 지금 아르고니아는 황제의 정예군들 수백 명이 훈련하려고 와 있는 상황.
제도에 있었던 아빠는, 대충 좌표 찍고 이동 마법을 썼다가 걸린다면 곤란했을 것이다.
‘위험 요소가 너무 많지.’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하는 시기.
그래서, 그나마 고립된 딸 데리러 간다는 명분으로 게이트를 타고 올 방법밖에는 없었겠지.
“예, 오시기 힘든 거 알았습니다. 죄송합니다.”
……?
체시어가 냅다 사과부터 박아서 나는 당황했다.
“아니, 그렇게 말하면 우리가 의도적으로 외박한 것 같잖아. 아빠, 연락 못 한 건 정말 미안해. 하지만 딱히 방법이 없었어.”
아빠가 날 물끄러미 쳐다봤다.
“아, 아빠가 사업하기 전까지 나 능력 쓰지 말라고 했고…. 또, 옆에 체시어도 있으니까 위험한 일도 없을 거고…. 그래서 그냥, 게이트가 충전될 때까지 기다렸다 가려고 했던 거야.”
“그래?”
“공작님.”
그때, 체시어가 고개 숙였다.
“사실은 제가 연락드릴 수 있었습니다. 공작님이 제도에서 여기로 오시기는 힘들어도 제가 리리스를 집에 보내기는 쉬웠으니까요.”
……?
뭐야, 얘 갑자기 왜 이래?
“체, 체시어? 나 여기 고립된 거 다 아니까 꼭 게이트를 타고 돌아갔어야 하잖….”
“서로 입을 맞춰 놓고 몰래 보냈으면 됐습니다. 공작님께 연락드릴 방법도 있고 리리스를 제도에서 재울 수도 있었습니다.”
난 입을 떡 벌렸다.
그래, 뭐. 틀린 소린 아니다.
다 이동 마법 쓸 줄 아는 사람들이니 굳이 방법을 찾는다면 못 찾을 것도 아니었지만….
‘그걸 지금 여기서 말해야 하니?’
난 힐끔, 아빠의 표정을 살피고는 소심히 눈을 깔았다.
“죄송합니다. 그런데 리리스랑 같이 있고 싶어서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
아니, 얘 뭐 이렇게 솔직해? 미친 거 아냐?
“하지만 걱정하시는 일은 없었습니다. 믿어주십시오. 죄송합니다.”
와.
어디서부터 수습해야 할지 몰라 허둥거리고 있으려니, 아빠는 한참 침묵하다가 몸을 일으켰다.
“알았다. 집에 가자, 리리스.”
그리고는 방을 나가 버렸다. 악시온이 한숨을 쉬며 뒤를 따랐다.
…끝이야? 이렇게?
“야아아!”
나는 둘이 나가자마자 체시어의 허벅지를 찰싹 때렸다.
“그렇게 말하면 어떡해? 둘러댔어야지! 우리 어제 당황해서 그런 생각까지 할 겨를이 없었잖아!”
“아니야, 리리스.”
체시어가 날 일으키며 말했다.
“지금에서야 말해서 미안해. 어제 당황했던 건 맞지만, 조금 전에 공작님께 말한 대로 널 돌려보낼 방법 정도는 생각했었어.”
“…….”
“그런데 너랑 조금 더 같이 있으려고 모른 척했던 거 맞아.”
“아, 아니….”
난 순간 부끄러워져서 체시어의 눈을 피했다.
“아무리 그래도 아빠한테 그렇게 솔직히 말할 필요는 없었잖아….”
“그런 생각 못 했다고 잡아떼는 게 더 괘씸해 보여. 차라리 같이 있고 싶었다고 솔직히 말씀드리는 게 나아. 거짓말하면 공작님이 나를 더 안 좋게 생각하실 테니까.”
“체시어….”
“빨리 안 내려오냐!”
밖에서 들리는 악시온의 고함에 나는 흠칫 놀랐다.
으으, 정말….
* * *
우리는 워프 게이트 앞에서 작별인사를 했다.
체시어는 여기에서 계속 훈련을 해야 하는 몸이었으니까.
‘지금 헤어지면 이제 사업 다 끝날 때까지 못 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수고해라, 체시어.”
“예.”
답지 않게 무뚝뚝한 아빠의 인사.
체시어는 눈치를 보며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솔직히 여기에서 만나자고 한 것도 나, 더 놀다 가자고 한 것도 나.
체시어는 아무 잘못도 없다.
나는 미안해져서 슬쩍, 체시어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걸 본 체시어도 순간적으로 자기 손을 내밀었다.
손끝이 살짝 닿는데―
“아!”
―아빠가 잽싸게 손날로 우리 둘을 끊어놓았다.
“얼른 가자.”
“아, 아빠….”
아빠가 내 팔을 당겼다.
“끼니 거르지 말고. 수고해라.”
“…예.”
악시온과 체시어도 인사를 나누는 게 보였다.
안 돼!
이대로 헤어지면 우린 한 달 동안이나 얼굴을 못 본다고!
난 결국, 고민하다가 내 간절한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짧은 인사를 남겼다.
“자, 자기야! 잘 있어!”
“……!”
워프 게이트 너머 놀란 체시어가 보였다. “응.” 하며 씁쓸히 대답하는 입 모양도.
“…….”
“…….”
“…….”
이내 한순간에 넘어와 버린.
제도, 파빌 신전.
이른 아침의 신전은 아무도 없이 쥐 죽은 듯 고요했다.
내 ‘자기야’ 소리를 들은 아빠와 악시온만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공주.”
아빠가 목소리를 깔고 말했다.
“앞으로 2년 동안 외박 금지야.”
……?
“그, 그게 무슨 소리야?”
난 어이없어 눈을 크게 떴다.
“아빠, 체시어 못 믿어? 우리 아무것도 안 했는데 왜 이래?”
“아니야. 오늘 일로 아빠는 확실히 깨달았어. 체시어는 믿어. 그런데 너를 못 믿는 거야.”
“…….”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체시어 훈련 장소 아르고니아로 정하게 한 것도 너잖아.”
할 말이 없었다.
체시어는 “제가 리리스가 견학 가는 장소를 알게 돼서 일부러 이곳에 훈련하러 왔습니다.”라고 했지만….
아빠는, 내 입김이 들어갔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아빠랑 삼촌이 백날 체시어한테 외박하지 말라고 해 봤자, 네가 먼저 꼬시면 별수 있겠어?”
“안 꼬셔! 그리고 아빠가…! 그, 아빠가 걱정하는 그런, 우리 그런 짓 안 해!”
“하는지 안 하는지 아빠가 어떻게 알아?”
“물론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나는 질 수 없었다.
2년 외박 금지라니, 그게 맞아?
여기서 물러선다면 아마 난 평생 결혼도 못 하고 아빠랑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아빠가 뭔데 내 자유를 제한해!”
“……?”
아빠의 눈이 커졌다.
“아빠가… 뭔데? 너 지금, 아빠가 뭔데, 라고 했어?”
“아, 아니….”
말이 좀 심했나.
하지만 억울한 걸 어떡해.
“미, 미안해. 당황해서 말이 잘못 나왔어. 근데….”
평소였다면 아빠 말 잘 들었을 텐데, 왠지 오늘만큼은 답지 않은 반항심이 울컥 치고 올라왔다.
“난 아빠 딸이지만! 그래도 아빤 날 마음대로 할 권리가 없잖아!”
“누가 널 마음대로 하겠대?”
높아지는 언성에 악시온이 우리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래, 리리스. 그런 말이 아니다. 네 아버지가 어제 얼마나 널 걱정했는지 알아?”
“…….”
“너는 아직 부모님 보호 아래에 있는 미성년자야.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아빠 말에 따라야지.”
“그치만….”
“미성년자 외박 안 시키겠다는 건 네 아버지의 교육관이야. 평생 외박 금지도 아니고, 2년이면 너 성인 될 때까지만 참으라는 거잖아.”
아씨….
구구절절 맞는 소리였지만 정말 억울했다.
여기서 물러서면 정말로 2년 동안 외박 금지인데.
한 달 뒤, 사업만 끝나면.
‘마음 놓고 놀러 다니려고 했는데. 체시어가 경치 좋은 여행지 Best 10도 꼽아 줬는데….’
단란한 1박 2일 여행을 꿈꿨던 나는 좌절했다.
그동안 열심히 내 수명 깎아 가며 아빠의 사업 준비를 도왔던 가장 큰 이유가 뭔가?
고생 끝, 행복 시작!
모든 게 끝난 뒤에 사랑하는 사람들과 마음 편히 놀러 다니고!
맛있는 것도 먹으러 다니고!
그런 행복하고 자유로운 일상을 위해서였는데!
그런데?
2년?
‘아빠 미워!’
울컥한 난, 짝다리를 짚고 서서 손톱을 딱딱 물었다.
“하? 공주 너, 그 불량한 자세 뭐야? 아빠가 너! 이렇게 가르쳤어? 아빠 말 안 듣고 걱정시키고 외박하라고? 응?”
“…….”
“다리!”
난 바로 섰다.
비굴했지만, 그래도 내 반항심을 보여 주고 싶은 입만은 쭉 내밀어 두었다.
“이쁜 입!”
주둥이는 안 돼.
진짜 포기 못 해.
“너어?!”
아빠 목소리가 더 커졌다. 힐끗 보니 표정도 무시무시했다.
“…….”
난 소심히 입을 밀어 넣었다.
결국 지는구나…….
하지만, 역시 내 실망한 마음은 보여 줘야겠다.
그래서 말했다.
“쳇.”
“……?”
내 반항심 가득한 모습에 아빠가 이마를 잡고 비틀거렸다.
“오, 신이시여.”
“…….”
“안 되겠다.”
아빠는 휙 몸을 틀었다.
안 되겠다?
뭔가 불길한 대사였다.
아니나 다를까, 아빠는 걸음을 옮겨 밖으로 나서며 말했다.
“마탑주한테 공주 외박한 거 말할 거야.”
“……?”
뭐라고? 난 호다닥 달려가 아빠의 팔을 잡았다.
“스승님한테 그걸 왜 말해?”
“아빠가 말하면 안 듣잖아.”
“아, 알았어. 들을게. 앞으로 외박 안 할게.”
“그래. 하지만, 공주 스승님한테도 말해 놔야지. 그래야 아빠 마음이 놓일 것 같아.”
“안 돼! 아빠! 잠깐만!”
미쳤다!
난 필사적으로 아빠의 팔을 잡고 말렸지만 역부족이었다.
힘 빼면 시체인 아빠를 내가 어찌 말릴 수 있겠나!
“아빠? 아빠! 제발!”
난 도살장에 억지로 끌려가는 소처럼 아빠 팔에 매달려 질질 당겨질 뿐이었다!
“아빠!!!”
“이거 놔, 공주!”
눈앞이 새하얘졌다.
오스카는… 오스카는 아니지!
진짜 선 넘었지!
“아빠아아! 미, 미안해! 한 번만! 한 번만 봐줘! 제발! 내가 잘못했어!!!”
아빠가 힘을 숨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