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화
* * *
최후의 날, D-20.
황제에게 소집 명령을 받은 아빠가 황궁에 간 날.
난 항상 아빠와 함께 오던 세라프 신전에 혼자 방문했다.
“우와, 공녀님! 오셨어요?”
“안녕하세요, 사제님!”
바쁜 와중에도 자드키엘 사제님은 급하게 뛰쳐나와 나를 맞았다.
‘이제 곧 새 나라의 대신관이 되어주실 분!’
#악 그 자체인 최종 빌런 황제와 정확히 대척점에 서 있는 #선 키워드의 등장인물, 자드키엘 테롯.
그는 올해로 스물한 살이 되었다.
키는 훌쩍 컸지만, 봄꽃처럼 몽실몽실한 분홍 머리칼이나 소년 같은 미소는 첫 만남 때와 똑같았다.
“보고 싶었어요!”
“앗! 저를요?”
자드키엘이 부끄러운 듯 웃으며 뺨을 긁적였다.
“네. 저번 달에는 공작님만 오셨었잖아요.”
“아아, 맞다! 그때 마탑 때문에, 아빠랑 시간이 안 맞아서요. 사제님 보러 가야 한다고 마탑주님한테 딱 하루만 빼 달라고 했는데, 바득바득 안 된다고 하시는 거 있죠?”
“하하, 그러셨구나. 그런데 오늘 공작님은 같이 안 오셨나 봐요?”
“네, 오늘은 또 아빠가 시간이 안 됐어요. 황궁에 가실 일이 있어서요. 와, 그런데 사람들이… 그새 더 많아졌네요?”
제도의 아픈 사람들은 거의 모두 여기에 모여 있었다.
돈 없는 평민들은 물론, 중병에 걸린 귀족들도 중앙 신전 치료국 대신 이곳, 세라프 신전을 찾으니까.
“그렇죠. 아무래도 아픈 분들이 여기 머물다 보면, 주신의 은혜로 병이 말끔히 나으니까요.”
주신의 은혜라….
틀린 소린 아니다.
사람들을 고치는 건 나의 능력이고 이 능력은 신이 준 게 맞긴 하니까.
“이분은 일주일 전에 오셨는데, 꽤 오래 앓으셨다 하더라고요.”
“에고, 그러셨구나.”
난 신전에 오면 항상 하던 대로 자드키엘을 따라 병자들의 숙소를 의사 선생님처럼 회진했다.
깡마른 팔다리로 시체처럼 누워 눈도 못 뜨고 있는 중년 여성.
‘심각해 보이니까 한 2주 정도에 걸쳐서 낫게 하자.’
내가 하는 일은 환자의 상태를 보고, 시차를 두며 능력을 걸어 주는 것.
1sec
소모되는 생명력은 딱히 팔찌를 확인해 볼 필요도 없이 1초였다.
“이분은….”
자드키엘은 계속 나를 데리고 다니며 병자들을 살폈다.
‘이 사람은 이틀 정도.’
1sec
‘요 아저씨는 일주일.’
1sec
현대 의학으로 완치 가능한 내상 병자들은 내 선에서 무조건 치료가 가능했다.
가끔가다 백몇 년의 생명력이나 작대기가 뜨는 병자도 있는데, 그들은 약속된 수명이 다한 사람들이거나 21세기 의학으로도 치료가 힘든 경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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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시간이라도 너무 많이 아프지는 않으시길 바랄게요.’
1sec
그런 경우에는 이렇게 고통을 줄여 주는 식으로나마 타협한다. 모든 사람을 살릴 수는 없으니까.
“사제님, 고생이 많으세요.”
“아니에요. 제 기쁨인걸요.”
365일 24시간 병자들을 돌보고 마나 탈탈 털어 치유 마법 뽑아내는 자드키엘을 보고 있자니 죄책감이 밀려왔다.
치유 마법이 안 드는 내상도 자드키엘이 물수건만 몇 번 갈아 주면 천천히 낫기 시작하니, 평민은 물론 귀족들까지 여기로 모이는 것은 당연지사.
‘사실 사제님 일감이 줄지 않는 건 저 때문이에요. 미안.’
이 제국에서 배짱 좋게 ‘평민도 사람이다! 아프면 치료받을 권리가 있다!’를 역설하는 세라프 신전.
황제가 이곳을 건들지 못하게 하고, 구교파의 입지를 세우면서 자드키엘의 인지도까지 굳히려면 다른 방법이 없었다.
‘신의 은총을 받는 신전인 척, 완치되어 퇴원하는 환자가 쉴 새 없이 나와 줘야만 하거든요….’
사람들을 살리는 행위임과 동시에 정치적인 의도도 다분한 정기 회진.
그래서인지 나는, 사람들이 낫는 모습에 마냥 행복해하는 자드키엘을 볼 때면 양심이 콕콕 찔렸다.
“요새 기부금은 좀 들어오나요?”
회진을 마치고 사제실로 들어온 내가 물었다. 자드키엘은 멈칫하다 “네! 그럼요!” 하고 대답했다.
‘아닌 거 알아요…. 흑흑.’
한창 세라프 신전의 입지가 높아졌을 때는 앞다투어 기부금이 들어왔지만, 제도에 전쟁 분위기가 감돌면서 다시금 모두는 황실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이제 황제에게는 체시어가 있지. 누가 봐도 전쟁은 승리할 테니까.’
대륙 통일은 곧 황실의 위상을 저 우주 끝까지 올려놓을 것이다.
황제가 다시 ‘신’으로 칭송받을 날이 머지않았으니, 귀족들은 당연히 그의 눈 밖에 날 짓을 할 수 없겠지.
“요즘 힘드신 거 알아요.”
난 사제실에 있는 기부 증서와 펜을 들고 테이블 앞에 앉았다.
“아, 그렇게 힘들지는 않아요. 요즘 귀족분들도 많이 찾아오시는데 그분들은 치료비 명목으로 많이들 신경 써 주시거든요.”
“그래도 돈 없는 사람들이 훨씬 많잖아요.”
국고로 운영하는 신전 치료국과 달리, 나라의 지원을 일절 못 받는 구교파인 세라프 신전.
그렇다고 돈 없는 이들에게 치료비를 받는 것도 아닌지라….
‘기부금이 없으면 쫄딱 망한다구.’
하지만 천사 자드키엘이 재정난에 허덕이는 이런 상황도, 곧 있으면 다 끝이다.
“오늘 아빠가 기부금 내고 오라고 해서요. 사실 이것 때문에 온 거예요.”
“…감사합니다, 공녀님.”
난 멋쩍게 웃는 자드키엘을 보며 기부 증서를 채워 나갔다. 그러다 금액 공란 앞에서 망설였다.
‘맨날 아빠가 해 와서 헷갈리네. 얼마 정도가 괜찮을까.’
아빠는 딱히 얼마를 내고 오라고 말해 주지 않았다. 그래서 고민하던 나는, 그냥 0을 마구 써넣었다.
“저, 저, 저… 공녀님?”
“네?”
잘못 썼군. 창백해진 자드키엘의 표정을 보니 오버한 모양이었다.
“너무 많이 썼어요?”
“넵. 평소에 공작님이 기부하시는 금액보다 0이 한 개 더 많아요.”
자드키엘이 다시 쓰라는 듯, 새 기부 증서를 가져와 건네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그냥 이걸로 할게요. 동그라미 한 개 정도라면, 뭐.”
“네에?”
자드키엘이 눈을 껌뻑였다.
“괜찮아요, 사제님. 받아주세요.”
“아니, 그래도 이건 너무….”
후후….
죽어라 전쟁터 굴러가며 돈 버는 사람은 제임스 브라운 씨이건만, 그 집 딸은 생각 없이 아빠가 번 돈 팡팡 쓰고 다닌다고 생각하려나?
하지만, 괜찮다!
“우리 집 돈 많아요!”
이것은 정의로운 사치이니까!
* * *
집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
나는, 오늘 내가 치료하고 돌아온 사람들이 몇 명이었는지 떠올렸다.
‘서른 명 정도였지?’
결과적으로는 많은 사람을 살린 행위이지만, 그 의도가 순수하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었다.
정확히는, 내가 오늘 신전에 온 이유. 그것은 내 능력을 ‘가성비 좋게’ 업그레이드하기 위함이었다.
‘아냐, 리리스. 죄책감 갖지 말자. 좋은 일 했으니까. 솔직히 내 능력 업그레이드하는 데 도움 안 됐어도, 어차피 1초밖에 안 드는 일이니 했을 거잖아?’
프리메라의 능력.
나는 이제 능력을 다루는 데 매우 자유롭고, 또, 황제는 절대 모를 이 능력의 비밀에 대해서도 깨우쳤다.
비밀이 뭐냐고?
‘첫째, 프리메라의 능력은 이타적이다.’
이거야 옛날부터 짐작했었다.
죽이고 파괴하는 데 능력을 쓰면 가성비가 더럽게 안 좋지만, 사람을 살리고 치유하는 값은 무척 저렴하니까.
여기에서 더 나아가 내가 깨우친 사실은, 능력을 쓰는 데 드는 수명은 고정값이 아니라는 점.
‘처음 막 세라프 신전에 찾아와서 사람들 치료하는 일을 시작했을 땐, 얼마 들지 않는 생명력이라도 사용료가 꽤 다양했었는데….’
어차피 생명력을 소모해 자라야만 하는 몸.
거듭 ‘치유’에 능력을 쓰던 나는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을 살리면 살릴수록, 그만큼 치유에 드는 값이 줄어든다는 걸.
이제 병의 경중과는 상관없이 현대 의학으로 고칠 수 있는 병자라면 1초를 넘기는 법이 없었다.
신이 이 능력을 어떻게 쓰길 바라는지는 너무나도 명백했다.
‘쯧쯧. 좋은 데 쓰라고 준 건데 허튼짓하고 있으니 빌런이지! 멍청한 황제 놈!’
더불어 이 능력의 비밀, 두 번째.
소모하는 생명력이 점점 줄어드는 경우는 한 가지 더 있었다.
‘황제의 친위대, 그중 마검사 아저씨에게 걸린 세뇌를 푸는 데에 드는 생명력! 이제 얼마지?’
1month
“야호!”
전에는 분명 친위대들의 세뇌를 푸는 데에 3달이라는 생명력을 요구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한 달.
그렇다.
혁명을 위해 무고하게 죽어야만 하는 운명들을 돕는 데에 드는 생명력도 천천히 줄고 있었다.
이쯤이면 신은 대놓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프리메라의 능력은, 최대한 사람들 많이 살리는 데에 써라!
―라고.
‘자아, 두구두구두구. 그럼 20일 후에… 제임스 브라운 씨에게 걸릴 세뇌를 풀려면?!’
난 팔찌를 보고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1년이나 줄었네!’
오늘 서른 명 살리고 온 보람이 있었다.
‘좋아! 이 정도라면, 혹시나 하는 상황이 생겨도….’
최후의 날, 내가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
나는 그 모든 준비를 마쳤다.
‘할 수 있어.’
의지를 다지며, 나는 황제를 떠올렸다.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전쟁과 대륙 통일에 눈이 멀어, 혼자 헤헤거리고 있다가 반란군에게 얌전히 뒤통수 맞고 퇴장하는 걸까?
정말로?
그, 황제가?
‘우쒸, 뭔가 불안한데….’
* * *
“자네가 해 줄 일이 있네.”
황제, 니콜라스가 맞은편에 앉은 사내에게 말했다.
“제국군의 출정 당일을 전후해서 인질을 자네 손에 좀 억류해 두게.”
“…누구, 말씀이신지?”
“누구겠나?”
경계하는 사내의 반응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니콜라스가 조소했다.
“…에녹의 딸이지.”
상대의 얼굴이 대번에 굳었다.
니콜라스는 그걸 보며 가까스로 웃음을 참았다.
내내 한결같이 건방졌던 표정에 떠오른 당혹감이, 이렇게 보기 좋을 수가.
“그 애만큼 좋은 패가 없거든.”
독을 품은 뱀처럼 니콜라스의 눈이 빛났다.
아빠가 힘을 숨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