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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힘을 숨김-237화 (238/261)

237화

* * *

황실, 군사 회의장.

왕국 침공을 20일 앞둔 시점.

황제, 니콜라스는 능력자들을 소집했다.

사병 훈련 중이라 제도에 부재한 마검사단장 제외, 아홉 명의 도스군 단장들이 모여 있었다.

“그럼, 성기사단장 말고 이번 출정 명령에 불복할 사람은 더 없나?”

니콜라스가 둘러앉은 군단장들을 하나하나 보며 물었다.

모두 명령에 복종하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숙였다.

예상한 그림이었다.

“그렇다면, 에녹. 마지막으로 묻지. 위대한 과업을 함께할 기회를 이리 날릴 텐가? 기어코 황명을 거역할 셈이야?”

“몇 번을 더 물으셔도 제 대답은 같습니다.”

“아하하, 그래.”

어쩌면 이리도 한결같을까.

니콜라스는 흔들림 없는 에녹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어. 전쟁이 끝나면, 명령 불복종에 대한 죄를 물을 것이네.”

“…….”

“목숨으로 물을 수도 있겠지.”

매서운 협박에도 에녹의 표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다른 이들에게서 숨 참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자네 수하의 성기사들도, 자네와 같은 의견이라 생각하면 되겠나.”

그제야 에녹의 눈이 흔들렸다.

제 신념을 부하들에게 강요하며 함께 죽을 것이냐는 질문이었다.

“…아닙니다.”

에녹은 한참 만에 대답했다.

“성기사단에 소속된 능력자들은 따로 소집해 출정 명령을 내리십시오.”

“그래. 자네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가 보라는 허락이 떨어지지도 않았건만, 에녹은 바람처럼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한순간에 비어버린 성기사단장의 공석을 힐끔거리는 능력자들.

“하하하하!”

그 사이에서, 니콜라스는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이지 한결같다니까.”

* * *

마탑, 오스카의 집무실.

“이거, 한창 바쁘실 때 마탑까지 직접 오시다니요. 부르셨으면 갔을 텐데요.”

오스카는 친히 방문한 황제, 니콜라스와 마주하고 있었다.

“내 지금, 도스 군단장들을 전부 불러 모아 이솔렘 왕국 침공 출정을 명하고 오는 길이네.”

“오, 그렇군요.”

오스카가 감흥 없는 얼굴로 탄성을 내뱉었다.

황제가 침략 전쟁을 준비한다는 사실이야, 제도에 모르는 이가 없었으니까.

“다 출정한다고 하던가요?”

“뭐, 사사건건 황명에 딴죽 거는 성기사단장 빼고는 전부?”

오스카가 멈칫하더니 픽 웃었다.

“에녹 루빈슈타인이 또?”

“그래, 또.”

“배짱 하난 인정해야겠지만, 이번 건은 좀 큰데요. 대놓고 황실이랑 척지겠다는 뜻 아닙니까?”

“그렇지. 마탑주, 왜 권력자들이 전부 출정을 결심했는지 그 이유는 알고 있겠지?”

“예, 뭐. 필승일 테니까요?”

전쟁.

실패한 침공은 지도자의 위상을 낮추고 황실의 세를 약화시킨다.

반면, 성공한다면.

대륙 통일이라는 위업을 이룩한 황제, 니콜라스 폰 파빌리온은 유례없는 권력자로 이름 남길 것이다.

제국 황실의 권력은 더할 나위 없이 탄탄하게 자리매김할 것이요.

황실이 전파하는 계급제는 더욱 굳건해질 것이며.

프리메라인 황제가 곧 신(神).

쭉 이어져 왔던 신정일치를 통해 능력자와 비능력자를 가르는 선민사상은 한층 더 심화할 것이다.

바야흐로 절대권력, 황권 독재의 시절이 오게 된다.

‘―라고 생각하고 계시겠지.’

오스카는 속으로 큭큭 비웃었다.

“폐하의 측근인 마검사단장께서 친히 찾아와 말씀 전해 주시더라고요. 침공 필승의 열쇠를 깨쳤다던가?”

“맞네. 이제 이솔렘 왕국은 체시어 리브르의 저력을 막을 수 없어. 만약 이번 침공의 성패가 불확실했다면, 아마 단장 중 몇은 에녹 눈치를 보며 출정을 거부했을지도 모르지.”

“에이, 그렇게 간 큰 놈은 없겠죠. 이제 폐하에게는 에녹 루빈슈타인에 대적할 새로운 검도 있고, 전쟁에도 승리할 테니 대륙 통일이 코앞인데 미치지 않고서야?”

오스카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나저나 루빈슈타인 공작은… 똑똑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시류도 못 읽는 반편이였나 봅니다.”

“아니야. 그가 무지해서가 아니라 그저 한결같을 뿐이지. 에녹은 자기 신념에 어긋나는 짓은 하지 않아.”

니콜라스가 일순, 사납게 눈을 빛냈다.

“그 신념이 이렇게 자기 숨통을 조이는 순간마저도 말이지.”

“…어째 말씀이 좀 무서우신데? 루빈슈타인 가문을 찍어내실 생각이라도 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그 인간이 말 안 들어 먹은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요.”

“당연한 수순이네. 나는 더 이상 에녹의 능력이 필요하지 않고, 그는 내 굳건한 성에 흠집을 내는 반동분자이니까.”

대번에 돌아온 대답에 오스카의 눈이 커졌다.

‘뭐야. 둘 다 서로 목 칠 생각 하고 있었잖아?’

“전쟁이 끝나면 에녹은 물론 그의 가문 전부 흔적도 없이 태워 버릴 예정이야. 에녹에게는 뭐, 두 가지의 선택지가 있겠지.”

“…….”

“옛날처럼 도망가든가, 아니면 죽을 날을 기다리든가.”

“…….”

“어떤 선택을 하든 나는 환영이야. 에녹이 제도에 계속 남아 물 흐리는 일만 없으면 되거든.”

“…안 도망치면 어떻게 됩니까?”

오스카가 슬쩍, 니콜라스와 시선을 맞췄다.

“아버지야 멍청해도, 애는 잘못이 없는데. 아시죠?”

“아하하하! 하하하하!”

오스카가 눈치 보며 던진 말에, 니콜라스가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참 재미있는 친구야. 안 그래도 오늘 에녹의 딸 얘기를 하러 온 걸세. 자네가 그 애에게 마탑을 맡기려 이래저래 공들인 나날들을, 내 아주 잘 알고 있지 않나.”

“알아주시니 영광입니다.”

“전쟁이 시작되면, 제도에는 고위급 병력이 부족해지지. 남아 있는 쓸 만한 도스라 해 봐야 에녹뿐이야.”

“…….”

“혹여 제도의 방비가 취약한 틈을 타 에녹이 말썽이라도 부릴까… 내 걱정이 크단 말이지. 알량한 신념을 지키려고 죽음까지 각오했는데, 뭘 못 하겠나?”

순간, 오스카가 숨을 삼켰다.

‘이 새끼… 눈치 봐라?’

니콜라스가 고민하듯 턱을 쓰다듬었다.

“제도를 방비할 병력은 따로 준비하겠지만, 더 확실한 방패막이 있었으면 하거든. 그래서.”

“…….”

“자네가 해 줄 일이 있네.”

웃음기가 빠진 얼굴로, 니콜라스가 말했다.

“제국군의 출정 당일을 전후해서 인질을 자네 손에 좀 억류해 두게.”

“…누구, 말씀이신지?”

“누구겠나? 에녹의 딸이지.”

오스카의 얼굴이 굳었다.

“그 애만큼 좋은 패가 없거든.”

“에녹 루빈슈타인이 무슨 짓을 할지 확신도 없는 상황에서 딸을 인질 삼고 휘두르시겠다는 말입니까?”

“무슨 짓을 하든, 하지 않든. 이번 전쟁이 끝나면 에녹은 사라져 줘야 해. 한데, 그 딸.”

“…….”

“딸 때문에 내가 고민이 많아. 해서, 자네에게 이리 찾아온 걸세. 애써 키워 놓은 인재인데 아비 따라서 죽는 꼴은 보기 싫겠지?”

침묵하던 오스카는 애써 태연한 척 물었다.

“…이해했습니다만, 폐하께서 직접 손을 쓰는 게 빠른 방법 아닙니까? 왜 저한테?”

“그건 곤란해. 체시어 리브르 때문이야.”

니콜라스가 내려놓았던 찻잔을 들며 덧붙였다.

“전쟁이 끝나고 나면, 그는 권력의 최정점에 서게 될 걸세. 나는 대륙 통일의 일등 공신을 합당하게 대우해야 하지. 쉽게 말하자면, 눈치를 안 볼 수 없단 말이네.”

“…….”

“체시어 리브르를 다루려면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될 것들이 몇 가지 있어. 나와 그의 사이에 있는… 불문율이라 해야 할까?”

“…….”

“내 능력으로 위협하거나 휘둘렀다가 잘못하면 그 사내의 심기를 거스를 수 있는 존재. 그중에 에녹의 딸이 있거든.”

예리한 판단에 오스카는 말문을 잃었다.

‘빌어먹을 뱀 새끼. 앉은 자리에서 내다볼 건 다 내다보고 있었네.’

황제는, 모든 것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에녹을 찍어내는 데에 그의 딸이 가장 좋은 패라는 걸 알면서도 써먹지 않을 수 있겠나?”

오스카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러니까, 나를 이용해서 손 안 대고 코를 푸시겠다?’

리리스를 직접 건드려 생명력을 낭비할 생각도 없고, 아이를 인질 삼아 체시어의 반감을 살 일도 만들지 않겠다.

다만 에녹을 통제하려면 그의 딸을 이용하지 않을 수 없으니, 아이를 위협하는 역할은 오스카에게 떠넘기겠다는 뜻이었다.

“루빈슈타인 공녀를 인질 삼겠다. 한데, 그 후폭풍… 체시어 리브르의 화는 오롯이 제가 감당하라, 뭐 이런 말씀이시죠?”

“왜, 못 하겠나?”

“…….”

“오스카 마뉘엘.”

니콜라스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비열하게 웃었다.

“이제 권력의 추가 한쪽으로 기울었어. 더 이상 중립 운운하며 얄미운 박쥐처럼 이쪽저쪽 간 보는 짓은 관둬.”

몸을 기울인 니콜라스가, 매섭게 덧붙였다.

“내게 시건방지게 굴었던 과거를 청산하고 계속 제국에서 권력자로 지내고 싶다면, 이 정도 성의는 보여 줘야지?”

오스카는 멍하니 니콜라스를 마주 보며, 속으로 인정했다.

‘대가리 하나는 더럽게 잘 굴려.’

황제의 판단은 틀린 곳이 없었다.

에녹의 움직임을 예상하고 그를 먼저 찍어내려 하는 것.

그를 통제할 방법으로 딸을 인질 삼으려 하는 것.

추후 권력의 흐름을 생각해 직접 손쓰지 않고, 오스카에게 그 역할을 떠넘김과 동시에….

중립을 고수하던 마탑을 확실히 제 쪽으로 넘어오게 하는 마무리까지.

‘소름 돋네. 만약 이게 첫 시도였다면… 다 이놈 뜻대로 됐겠는데?’

전생의 오스카는 적당히 제 밥그릇만 챙기면 그만인, 그저 귀찮은 게 싫은 권력자였다.

중립이니 뭐니 하는 배짱도 부릴 상황에서나 부렸지, 말마따나 권력의 추가 기운 이런 상황에서는 고민하지 않았을 것이다.

시키는 대로 리리스를 인질 삼았겠지.

그러면 모든 상황이 어그러지고야 말았을 테고.

하지만.

‘네놈의 패착은.’

모른다는 것이다.

이것이 두 번째 시도임을.

또한….

오스카와 리리스, 둘 사이에 있는, 타인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깊은 유대.

이제는 ‘사라진 시간’.

그 끔찍했던 전생의 기억까지도.

“예, 폐하.”

오스카는 환하게 웃었다.

“당연히, 시키는 대로 해야죠.”

중립인 마탑주를 협박해 아이를 넘긴 선택.

이는 확실히 현명했지만.

“아이도 넘겨주시고, 지금껏 불손하게 굴었던 점도 잊어 주신다는데 저로서는 수지맞은 장사입니다.”

안타깝게도 그것은 ‘실패한 시간’들이 없었을 때나 최선이었다.

끔찍한 실패를 겪고 돌아온 회귀자에게, 제 목숨을 버릴 수도 있을 만큼 아이를 사랑하게 된 오스카에게―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겼네, X신.’

―인질을 건네준 것만큼 최악의 선택이 있을까.

아빠가 힘을 숨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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