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화
* * *
최후의 날, D-15.
여기는 동부, 파르만.
북부에서 시작된 지류가 눈부시게 흐르는 이 관광 영지는, 할아버지가 내 7살 생일 선물로 준 땅이다.
그리고 지금은,
향긋한 봄바람이 흐르는 산 정상.
“야~~호!”
들뜬 아빠가 큰 소리로 환호했다.
“경치 조오타!”
그 옆에 악시온도 지지 않았다.
“최고다~!”
또 그 옆에, 조제프 아저씨도.
‘지금 뭐 하는 거지…?’
난 환호하느라 정신없는 세 남자 뒤에서 머리를 붙잡았다.
‘이게 맞아…?’
알록달록한 피크닉 매트.
그 위에 야무지게 챙겨 온 갖가지 음식들이 반쯤 동난 채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그래, 우리는 등산을 왔다.
반란의 날이 보름밖에 남지 않은 시점에, 태평하게도 말이지.
“공주도 야호 해!”
“됐어….”
나는 혼란스러웠다.
악시온, 조제프와 등산하는데 같이 가자는 아빠의 제안에 얼마나 긴장했던가?
반란을 앞두고 은밀한 계략을 나눌 것이 분명해 보였고, 내 능력이 필요한 일이 있겠거니 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진짜 딱 등산만 하러 왔다!
난 그냥 아재 세 명과 등산을 온 아이가 되고 말았고!
“공주야, 꽃 너무 예뻐.”
아빠가 분홍색 봄꽃 가지를 꺾어 내 귀에 꽂아 주었다.
“예쁘면 그냥 보기만 하지, 왜 꺾어? 환경 보호 몰라?”
핀잔주며 따라오던 악시온이 나를 보고 멈칫하더니 씩 웃었다.
“뭐가 꽃인지 모르겠군.”
“그치? 우리 공주 미모에 아주 물이 올랐다니까?”
하…….
두 아재는 정말이지 아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유일한 희망, 조제프라도….
“크으!”
…됐다, 됐어.
맥주를 원샷하며 나를 향해 척, 엄지를 세워 보이는 조제프를 보고 나는 손톱을 딱딱 물었다.
‘혁명은 실패다. 황제가 이길지도 모르겠어.’
대체 왜 이렇게 태평하단 말인가?
셋은 꼭 이미 사업 성공이라도 한 사람들처럼 걱정 하나 없이 평온해 보였다.
“아빠!”
“어!”
“지금 이럴 때야?”
“엥.”
엥, 은 무슨 엥!
난 바보 같은 아빠에게서 고개를 돌려 조제프에게 물었다.
“아저씨! 사업이 코앞인데, 뭔가 제 도움이 필요한 일은 없나요?”
“으응? 네가 뭘 하니?”
맞다, 조제프는 내가 프리메라라는 사실을 모르지.
“공주야, 저 흰색 꽃나무 예쁘지? 아빠가 화관 만들어 줄게.”
“됐어! 괜히 환경 파괴하지 말….”
“야, 키가 저렇게 큰데? 타고 올라가서 꺾게?”
“할 수 있어. 와 봐.”
아빠와 악시온은 멀찍이 서 있는 키가 큰 봄꽃 나무를 향해 달려갔다.
진짜 미치겠네!
난 잔뜩 신이 난 두 아재를 보며 마냥 웃고 있는 조제프에게 물었다.
“아저씨, 아저씨. 챔버 후작 아저씨가 제도 방비군 대장 맡을 거라면서요?”
“오잉?”
체시어에게 들었다.
챔버 후작은 조제프가 지금까지 언더커버 작전으로 측근인 척 붙어 있었던 귀족이다.
뼛속까지 계급제에 젖은 갱생 안 되는 인간.
그러니까 황제 편이면서….
‘브루스 챔버의 아빠지!’
브루스.
간만에 떠올리는 이름이었다.
양성소 시절, 체시어와 같은 방을 썼던 양아치!
어린 게 가정교육 잘못 받아서 싹수부터 노랬던 브루스는, 툭하면 평민 친구들을 괴롭혔더랬다.
내가 당연히 도스인 줄 알고 설설 기던 그는, 옥타바라는 걸 알자마자 시비 걸다가 체시어에게 된통 깨진 전적이 있었다.
‘여전히 갱생 안 됐고!’
체시어가 말해 준 바에 따르면, 아마 브루스는 이번에 제도 방비군에 편성될 거라 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아니? 공작님이 말해 주셨나?”
“아뇨, 체시어한테 들었어요. 말이 방비군이지, 아빠랑 싸울 사람들 맞죠?”
체시어가 출정하고 나서 제도에 남을 ‘방비군’들은 황제의 병력이자 아빠를 막아설 적들이었다.
“챔버 후작 아저씨 말고 방비군에 누구누구 더 있어요?”
“으음, 어디 보자…. 로저 오닉스 후작도 있고….”
체시어의 친아버지!
‘와, 끝까지 빌런 짓 하는구나.’
난 속으로 쯧쯧 혀를 찼다.
“또….”
“또?”
어째선지 조제프는 말하려다가 말고 나를 보며 씩 웃었다.
“그런데 네가 알아서 뭘 하게.”
“궁금해서 그러죠! 아니, 그리구 아저씨!”
난 답답해하며 말했다.
“황제 폐하가 가만히 앉아 있다가 당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다들 태평한 거예요? 이래도 돼요?”
“리리스.”
조제프는 나를 불러 놓고, 살랑 부는 봄바람을 깊게 들이켰다.
그리고는 말했다.
“이런 말을 내 입으로 하긴 조금 민망하지만, 아저씨는 제법 머리가 비상하단다.”
갑자기 자기 자랑?
뭐, 틀린 소린 아닌데….
“그 누구도 이 아저씨의 머리 위에 있는 사람은 없어. 황제가 무슨 몸부림을 치든 간에.”
조제프는 진지한 눈으로 나를 보며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다, 이 아저씨 손바닥 안이지.”
일견 사악해도 보이는 그 표정은 무서우면서도 든든했다.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러니까 넌 아무런 걱정도 하지 말렴, 리리스.”
조제프는 다시 온화해진 얼굴로 저 멀리 나무를 타고 있는 아빠를 쳐다보며 덧붙였다.
“공작님이 너에게 선물해 주려고 하셨던 행복하고 좋은 세상이… 곧 올 테니까.”
* * *
하산하는 길.
“다리 아파아아!”
“업어 줘?”
“업어 주랴?”
리리스와 에녹, 악시온의 다정한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조제프가 일순 날카로워진 눈으로 회상했다.
황제로부터 출정 명령이 떨어지기 전, 에녹과 이때를 대비했었다.
“조제프, 나도 황제의 뜻에 따라 출정하는 척하는 게 낫지 않겠나? 체시어의 능력이 노출됐으니 전쟁의 승기가 확실해. 그런데도 황명에 불복하는 그림이 더 이상할 것 같은데.”
“아닙니다. 끝까지 배짱을 부리십시오. 황제를 초조하게 만들 생각입니다. 황제는, 황명에 불복하고 벼랑 끝까지 몰린 각하께서 무슨 짓을 할지 염려스럽겠지요.”
“일부러 황제가 날 경계하게 하란 말인가?”
“맞습니다. 그래서, 황제가 먼저, 각하를 찍어내려고 손을 쓰게끔 할 겁니다.”
권력자 대부분이 출정하고 제도가 빈 시점.
황제는 불안감이 들 것이다.
그렇다면 전쟁 분위기로 어수선한 이때가, 또한 에녹을 찍어낼 적기이기도 했으므로―
‘황제가 선공하기에는 둘도 없이 완벽한 상황이지.’
―조제프는 그리 판단했다.
‘보나마나 평민들을 이용할 테고.’
황제라면, 지금까지 수많은 시위를 일으켰던 평민들에게 ‘불충’이라는 명분을 씌워 학살을 자행할 것이다.
그간 살 만해져 기어오르는 눈엣가시들을 처리함과 동시에, 에녹까지 잡을 수 있는 완벽한 방법.
황제는, 무고한 죽음을 외면하지 않고 끼어들 에녹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때 자길 막아서면, 공작님에게 출정 명령 불복에 반역이라는 죄목까지 덧붙여 공공의 적으로 만들려 하겠지.’
한결같은 황제였기에, 그가 어떤 궁리를 할지 정도는 전부 조제프의 계산 안에 있었다.
‘먼저 공격해 주면 고맙다. 우리는 반갑게 그 미끼를 물어 주마.’
“각하, 우리는 모든 것이 끝난 후의 일도 생각해야 합니다. 각하께서 반란을 일으키는 마지막 명분까지, 황제가 만들도록 하는 거지요.”
무고한 학살의 시작.
그를 막기 위해 홀로 검을 쥐고, 끝내 황실로 쳐들어가는 영웅.
이 얼마나 멋진 그림인가.
‘에녹 루빈슈타인의 완벽한 영웅 서사를 위해, 끝까지 악랄하게 몸부림치다가 사라져라.’
반란군의 두뇌, 조제프 뤼트먼은 사악하게 웃었다.
* * *
루덴도르프 후작저.
세 사람이 모여 있었다.
제도 방비군 대장으로 임명된 윌로우 챔버 후작.
황제의 측근인 체시어 리브르의 친부, 로저 오닉스 후작.
그리고.
셀레나 루덴도르프 후작 부인까지.
“부인께서는 아직 몸도 제대로 못 푸셨을 터인데… 괜찮으실까.”
윌로우 챔버가 콧수염을 씰룩이며 셀레나에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셀레나의 무심한 표정에 윌로우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독한 년.’
출산 후 채 추스르지도 않은 몸을 이끌고 황제를 찾아갔다 들었다.
그 후.
침략군으로 편성되었던 첫째 아들, 카일 루덴도르프는 출정 병력에서 제외되었고, 대신 모자(母子)는 제도 방비군이 되었다.
아들을 전장에 내보내지 않기 위한 깔끔한 협상이었다.
“말이 방비군이지, 에녹 루빈슈타인을 찍어내려 폐하께서 모은 사람들인데.”
로저 오닉스가 못마땅한 눈으로 셀레나를 일별했다.
“사감으로 대업을 그르치는 일은 없겠지요?”
셀레나와 에녹의 관계를 아는 이들이라면 오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실로 우스운 걱정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폐를 끼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어휴, 그럼요. 부인만큼 든든한 지원군이 어디 있다고요. 그래도 아이 엄마인데, 아무렴 에녹 루빈슈타인도 함부로 못 하겠지.”
윌로우가 히죽 웃으며 물었다.
“이번에 그 옛날 이름 날리셨던 실력, 볼 수 있는 겁니까?”
“얘기 끝났으면 나중에 또 뵙겠습니다. 조심히 돌아가 보세요.”
무심한 축객령에 윌로우가 입을 삐죽였다. 곧 두 남자는 응접실을 빠져 나갔다.
“이 기회에 에녹을 잡을 생각이야.”
홀로 남은 셀레나는 황제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나를 돕는다면 아들의 출정은 면해 주지. 어려울 것 없어.”
승리가 확실한 전쟁.
대륙 통일을 이루면 황제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것이다.
모든 권력자가 황제에게 얌전히 머리를 조아리는 와중에, 이번에도 에녹은 제 신념을 버리지 못했다고 했다.
어리석은 결정이었다.
“아이는 어떻게 되나요.”
“루빈슈타인 공녀? 걱정하지 말게. 그 애의 안위가 보장되지 않으면 눈이 뒤집힐 이들이 꽤 많거든. 나는 에녹만 찍어내면 돼.”
그렇다면 셀레나에게는, 더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버러지들을 태워 버리면 에녹이 기어 나오겠지. 그때부터 에녹은 ‘반란 세력’이야.”
이솔렘 왕국 침략 전쟁과 동시에, 제도에서는 평민 학살이 시작된다.
에녹 한 사람을 잡기 위한 황제의 계획이었다.
‘망설일 필요 없어.’
제 손에 무고한 피를 묻히는 것쯤이야 괜찮았다.
전쟁, 그 아비규환 속에 아들을 던져 넣는 것보다는 훨씬 나으니까.
그리고, 전쟁이 끝나면 곧 절대권력을 행사할 황제의 줄을 잡는 편이 현명하겠지.
생각을 마친 셀레나는 일어났다.
“…….”
응접실을 나서려던 순간.
남편, 필릭스 루덴도르프 후작이 초점 없는 눈으로 멍하니 서 있었다.
아들이 소년병이 된 후부터 남편과의 사이에는 골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번에 셀레나가 황제를 찾아가 새로운 협상을 하고 왔을 때.
어그러진 관계는 절정으로 치달았다.
“생각, 안 바뀌었어?”
“응.”
“당신은….”
남편을 무심하게 스쳐 지나가던 셀레나가 멈춰 섰다.
“…대체 어디까지 추악해질 셈이야.”
날이 선 목소리. 남편의 붉어진 눈에는 혐오가 형형했다.
“자기 능력도 제대로 써 본 적 없는 아이가… 정말,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길 원해? 그게 정말 우리 아들을 위한 일이야?”
“어차피 침략군이 되어도 무고한 이들을 학살해야 하는 건 똑같아. 그럴 바에, 더 안전한 선택을 하게 하는 것뿐이야.”
“비능력자들을 죽이는 게 안전한 선택이야?”
“그래.”
필릭스가 허탈하게 웃었다.
“차라리… 도망가자.”
“…….”
남편의 호소에, 셀레나는 오래전 에녹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조소했다.
“…같이 가자, 그럼.”
그 대단한 에녹도, 결국은 끝을 앞두고 있었다.
절대자, 프리메라에게 반기를 든 능력자의 최후란 그런 것이다.
“미안해. 당신을, 카일을, 그리고 우리 모두를 위해서야.”
“아니.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니야.”
“…….”
“그냥, 인간이길 포기하는 거지.”
지그시 눈을 감은 셀레나가 등을 보이고 뒤돌았다.
“제발 멈춰. 이대로 가면, 난 두 번 다시 당신을 보지 않을 거야.”
애처로운 마지막 부탁에도, 여자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모든 게 끝나면….
당신도 나를 이해해 주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아빠가 힘을 숨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