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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힘을 숨김-239화 (240/261)

239화

* * *

최후의 날, D-10.

나는 자로 잰 듯 완벽한 솜씨로 도마 위의 당근을 한 조각 썰었다.

딱―!

“어이쿠, 아가씨! 손 조심!”

“마, 말도 안 돼! 우리 아가씨가 정말 당근을 자르셨어!”

“아가씨이익! 칼질은 주방장님이 하셔도 되지 않을까요?!”

나는 고작 당근 한 조각 잘랐을 뿐인데 호들갑을 떠는 세 사람을 휙 노려보았다.

제티, 쥰. 그리고 공작가의 일류 주방장 쿠냑 씨까지.

셋은 내가 주방에 들어온 후부터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 보듯 한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

“저도 당근 정도는 썰 줄 알아요. 그리구 처음부터 끝까지 제가 직접 해야 의미가 있다니까요?”

반란을 열흘 앞둔 시점.

나는 제임스 브라운 씨가 먹고 힘을 낼 수 있게, 사랑 가득 담긴 리리스 표 특제 스튜를 만들고 있었다.

보글보글 끓고 있는 냄비에 당근 조각을 넣고, 다음은 소금.

‘요거닷!’

하얀 가루가 든 양념통을 집자 쿠냑 씨가 재빨리 내 손을 막았다.

“아가씨.”

“왜요?”

“그건 설탕입니다. 이게 소금.”

“헉! 큰일 날 뻔!”

난 쿠냑 씨가 찾아 준 소금 통 뚜껑을 열며 말했다.

“이렇게 제가 헷갈릴 때만 말해 주세요.”

“네에….”

소금은 적당히….

“뚜와이씨!”

…넣으려는데 왕창!

쏟아지고 말았다!

‘아냐! 내 잘못 아냐!’

양념통 생김새가 효율적이지 못한 구조이기 때문이다.

“무, 물 좀 더 넣으면 돼요.”

급히 대안을 제시하는 나를 보며, 쿠냑 씨와 두 하녀 언니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토마토를 베이스로, 각종 고기와 야채를 있는 대로 전부 때려 넣은 루빈슈타인 공녀의 특제 스튜.

보글보글 기포를 터뜨리며 끓고 있는 새빨간 스튜는 흡사 지옥의 염화 같았다.

“어때요?”

주방장, 쿠냑은 완성된 스튜를 한 입 맛보고 숨을 참았다.

“맛있어요?”

기대하며 묻는 리리스의 얼굴이 보였다.

맛은… 맛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조리 과정을 전부 지켜보았기에 분명 접해 본 적 없는 맛이 날 것을 예상했음에도….

그럼에도 충격적이었다.

이 지옥의 스튜는 단숨에 혀의 감각을 앗아갔다.

“마, 맛이 없나…?”

반응이 없자, 리리스가 눈치를 보며 제 손톱을 탁탁 매만졌다.

쿠냑은 아가씨의 작고 하얀 손에 눈이 갔다. 살짝 베인 생채기며 덴 흔적이 가득.

‘세상에. 우리 아가씨가, 공작님 드리겠다고 이걸… 주방에서 무려 4시간 동안이나 저 고운 손 다쳐 가며 만드셨어….’

쿠냑의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도 딸 가진 아버지였다.

“아닙니다, 아가씨. 너무, 크윽! 너무 맛있어서… 잠깐 말을 잃었을 뿐입니다….”

“정말요?”

리리스가 금세 반색했다.

“저도 먹어 볼게요!”

“아가씨, 잠깐!”

쿠냑이 옆에 있는 두 하녀들에게 눈짓했다.

‘일단 치워 주시오! 이건 아가씨 입에 절대 들어가서는 안 되는 극히 유해한 맛이야!’

‘확인!’

‘롸저!’

시선만으로도 대화는 충분했다. 둘이 잽싸게 냄비를 치웠다.

“아가씨, 저의 고향 벤던에서는 결코 조리장이 주방에서 먼저 맛을 보지 않는답니다. 그러면 음식을 만들면서 바랐던 간절한 기원을, 악마가 훔쳐 간다는 속설이 있거든요.”

“헉! 그런 속설이 있다구요?”

그딴 거 없다. 방금 지어냈다.

아가씨의 손은 저주받았을지언정 혀는 정상일 테니 이 스튜를 맛보는 순간 좌절하고야 말겠지.

쿠냑은 리리스의 기특한 마음을 지켜 주고 싶을 뿐이었다.

‘몇 시지?’

쿠냑의 눈이 재빨리 주방 벽에 걸린 시계로 향했다. 7시 30분.

‘이보게들! 내가 이 지옥의 스튜를 소생시킬 시간이 충분한가?’

눈으로 묻자, 제티와 쥰이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늦었어요. 공작님이 이미 밖에서 대기 중이십니다.’

‘안 돼요, 안 돼.’

이럴 수가.

쿠냑은 좌절했지만, 베테랑 주방장답게 빠른 판단을 내린 뒤 스튜를 접시에 담았다.

꽉꽉 채우니 네 접시.

“아가씨, 혹시 저와 여기 둘에게도 오늘 저녁으로 이 맛있는 스튜를 한 접시씩 맛볼 영광을 주실 수 있을까요?”

제티와 쥰이 경악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

“네, 네! 아가씨! 저도 너무너무 먹고 싶어요!”

“저, 큽, 저도요! 제발!”

리리스가 당황했다.

“네에? 그렇게까지요…? 그럼 제가 먹을 게 없는데…?”

“아가씨 몫은, 이 훌륭한 요리를 맛볼 수 있게 해 주신 데 감사하며 저 쿠냑이 금방 새로 만들어 가져다드리겠습니다.”

“…….”

“제발요. 안 될까요…?”

아니, 그렇게 맛있나?

리리스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추며 부끄러운 듯 몸을 배배 꼬았다.

“에이, 안 되긴요. 당연히 되죠.”

* * *

“토마토소스를 베이스로 오늘 갓 잡은 송아지 안심, 돼지 등심, 닭 가슴과 오리 날개살을 아끼지 않고 넣어 만든 아가씨의 특제 스튜입니다.”

제티와 쥰이 식당에 근사하게 꾸며 놓은 테이블.

“들어간 야채들도 한번 보십시오. 일률적인 모양이 아니라 참 재미난 생김새이지요? 아가씨만의 기발한 커팅으로 매우 다채로운 생김새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쿠냑 씨가 플레이팅을 도와준 스튜 접시가 아빠 앞에 놓였다.

‘오오, 냄비에 담겨 있을 땐 무슨 지옥불이 끓는 줄 알았는데, 저렇게 담아 놓으니 제법 있어 보이는걸?’

난 흐뭇하게 웃었다.

“공작님, 저는 이 스튜를 맛보고 정신을 잃을 뻔했습니다. 정말 태어나서 처음 먹어 본 맛이었습니다.”

“…그래?”

아니, 그렇게까지?

난 나를 띄워 주는 쿠냑 씨를 보며 내심 들떴다.

“이 스튜에는 무려 4시간에 걸쳐 고생하신 아가씨의 정성과 공작님에 대한 사랑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그 맛이 실로 아찔합니다. 그러니 감히 이 쿠냑이 청하건대, 절대 남기지 말고 다 드셔 주십시오.”

“…….”

아빠와 쿠냑 씨는 잠시 침묵하며 시선을 나눴다.

“…좋아, 이해했어.”

아빠는 비장한 표정으로 스푼을 들었다.

“부디… 즐거운 식사 되십시오.”

쿠냑 씨가 나가고, 나는 기대하며 턱을 괴고 아빠를 바라보았다.

“얼른 먹어 봐.”

“공주야.”

“응?”

아빠는 한 스푼 뜨다 말고, 나를 보며 갑자기 입술을 삐죽였다.

“오잉? 왜 그래?”

“너무너무 감동이라서…. 우리 공주 대체 언제 이렇게 커서, 아빠 요리도 해 주고 그러지?”

“히힛. 진작 다 컸지. 아빠 다치지 말고 무사히 사업 성공하라고 기도하면서 만들었어.”

“에이, 사업은 당연히 성공하지요. 공주는 아무 걱정도 하지 마. 황제는 아빠한테 한주먹 거리도 안 돼.”

“음, 황제 폐하 말고….”

사실, 제일 무서운 사람은 황제가 아니다.

“…체시어가 문제지.”

바로 체시어!

황제의 수명을 깎으려고 일부러 세뇌당할 아빠를, 죽어라 패야 하는 체시어!

둘 다 우리 편이지만 난 아빠를 응원할 수 없었다.

체시어가 이겨야만 비로소 끝이 나는 싸움이니까.

‘아빠 많이 다치면 안 되는데….’

원작에서 체시어는 황제의 능력에 지배당한 아빠를 제압하는 데 끝내 성공한다.

물론! 당연히!

‘…쉽게 제압한 건 아니고.’

만신창이가 된 아빠는 딱 숨만 붙은 상태였다.

그렇게 손가락 하나 까딱 못 하고 있던 와중에, 죽은 줄 알았던 내가 갑자기 튀어나와 1차 충격.

딸은 말도 안 통하는 백치 주제에 능력 팡팡 써 가며 제도를 다 불태우는데, ‘아니, 우리 딸이 프리메라였다고?’ 깨달으며 2차 충격.

이러다 사람들 다 죽겠다고 체시어가 검을 드는데, 힘이 다 빠진 터라 말리지도 못하고 내 목이 잘리는 걸 지켜보기만 하며 3차 충격.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원작은 비극! 새드엔딩 그 자체였다!’

물론 이번엔 그럴 일이 없겠지만, 체시어와 생사를 넘나드는 싸움을 해야 하는 건 변함없었다.

“공주, 남자 친구 못 믿어?”

“체시어는 믿지. 아빠를 못 믿는 거야.”

“엥?”

“아빠 너무 쎄. 괴물이잖아. 되도록 쉽게 져 주면 좋겠는데, 안 그럴 거니까.”

“…….”

아빠는 할 말이 없는지 뺨을 긁적였다.

원작과는 반란 시기도, 체시어의 성장 속도도 달라졌으니 가장 장담할 수 없는 게 아빠의 무사 생존이었다.

‘그래도 괜찮아. 체시어가 혹시나 아빠를 제압하지 못하는 일이 생긴다면….’

내가 갈 거니까!

“아빠!”

“으응.”

“있지, 으음.”

난 걱정스러워진 아빠의 표정을 보며, 평소에는 낯간지러워 못 했던 고백을 하기로 했다.

지금 말고는 말할 시간이 없을 것 같아서.

“…지금까지 나 키워 줘서 고마워요. 아빠 덕분에 사랑도 듬뿍 받고, 예쁜 옷도 입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나는 정말 행운아야. 아빠 딸로 태어났으니까.”

진심을 표현하는 건 행복하지만 조금 부끄러웠다. 그래서 아빠와 눈을 맞추지는 못했다.

“으음, 그리구… 이렇게 태어나서 미안해. 나만 없었어도 아빠는 걱정 없이 사업만 할 수 있었는데… 황제 폐하한테 나 숨기느라 안 해도 될 고생 많이 했잖아.”

원작과 달리 아빠에게 붙어 있던 내 존재는 고구마였다.

아빠는 아닌 척해도 매일 불안에 떨며 지내왔고, 원작에서 과감하게 굴었던 몇몇 기회를 포기하고 돌아가는 선택을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승리가 약속된 주인공 에녹 루빈슈타인은, 끝내 도달했다.

‘해피엔딩’으로 다시 쓰일 완결에.

“아빠, 정말 고마워요….”

이번에는 나도 살 수 있어.

사랑하는 사람들이랑, 다 함께.

“아빠는 내 영웅이야.”

눈물이 났다.

뿌예진 눈을 닦고 고개를 들자, 나처럼 글썽이며 웃고 있는 아빠가 보였다.

“…이리 와 봐, 공주.”

나는 훌쩍 코를 삼키며 아빠에게 안겼다. 날 무릎에 앉힌 아빠가 내 눈물을 닦아 주며 말했다.

“아빠도 고마워. 이렇게 예쁘게 잘 자라 줘서. 그리고 아빠야말로, 우리 공주의 영웅이 될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해.”

“아빠아….”

“아빠한테는 우리 공주가 주인공이야. 아빠는 우리 공주, 태어나서 처음 만나자마자 속으로 다짐했어.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지켜 줄 거라고.”

아빠가 다정하게 내 뺨을 붙잡고 이마를 맞대 왔다.

“아빠가 항상 지켜 줄게. 그러니까 우리 공주는, 평생 행복하기만 해.”

“우으으. 으응….”

“에이, 울지 말고.”

아빠가 내 눈물을 닦아 줬다. 나는 웃으며 스튜 접시를 가리켰다.

“식겠다! 얼른 먹어 봐!”

“앗차!”

곧바로 스튜를 한 입 떠먹은 아빠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때? 맛있어?”

“…….”

맛을 음미하는지 아빠는 입에 스튜를 한참 머금고 있었다.

몇 초 후 꼴깍, 삼키는 소리와 함께 아빠의 목울대가 일렁였다.

“아…. 세상에….”

“아빠?!”

아빠의 커진 눈은 되돌아올 기미가 안 보였다. 심지어 눈물까지 핑 고였다.

“우, 울 정도로 맛있어?”

“…어. 눈물, 눈물이 절로 나오는 맛이야.”

그 정도라고?

난 내 위대한 스튜의 맛이 궁금해져서 아빠 스푼을 빼앗으려다―

“안 돼! 멈춰!”

―사색이 되어 말리는 손길에 흠칫 놀랐다.

“한 입도 줄 수 없어! 아빠가 다 먹을 거야!”

“아니, 그러지 말고 한 입만….”

“싫어! 아빠를 위해서 만들어 준 거잖아! 뺏어 먹지 마!”

제임스 브라운 씨는 환상적인 맛에 눈이 돌아가 버린 듯했다.

한 입만 달라는 내 부탁을 극구 거절하며 꼭 열흘 굶은 사람처럼 입 안으로 스튜를 정신없이 욱여넣었다.

“하, 이럴 수가. 젠장….”

욕 나올 정도로 맛있다?

“너무, 하아, 너무 맛있네…. 우리, 끄윽, 공주가 해 준… 아주 강렬한 사랑이 담긴….”

또르르, 아빠의 눈에 고여 있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기까지 하는 걸 보며 나는 놀라면서도 안심했다.

내 첫 요리, 대성공이다!

“고마워. 고마워, 공주야. 절대 잊지 못할 맛이야…. 힘이 나…. 아빤, 아빠는… 황제 서른 명도 잡을 수 있을, 끅, 것… 같아….”

“그, 그렇다면 다행이야!”

“그리고… 정말정말 사랑해.”

아빠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환하게 웃었다.

맛에 놀랐는지, 내 정성에 감동했는지, 아니면 둘 다인지는 모르지만.

“정말정말…. 너무 사랑해, 우리 공주. 내 딸…. 내 보물….”

눈물을 줄줄 흘리며 사랑한다고 거듭 속삭이는 제임스 브라운 씨에게 나는 행복한 마음으로 안겼다.

“나도 사랑해요, 아빠! 세상에서 제일제일!”

아빠가 힘을 숨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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