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화
* * *
이솔렘 왕국 침공까지 D-7.
황제, 니콜라스는 북부에 전달할 서신을 작성하고 있었다.
‘얼마 남지 않았군.’
니콜라스의 입가에 비릿한 웃음이 걸렸다.
전쟁이 시작된 후, 에녹을 잡을 것이다. 그에 필요한 방비군 전력은 전부 완성되었다.
마지막 한 명을 남겨두고.
일주일 후, 제국군이 출정한 뒤 방비를 위해 시급히 제도로 와 줄 것을 요망……
도스 계급의 능력자, 렉터 서머싯 백작.
마수 상대에 특화된 대규모 사병단을 보유하고 있는 그는, 황실 정예군에 편성되지 않은 대신 까다로운 지역을 방호하라는 황명을 받들어 지금껏 북부를 관리하고 있었다.
황제 직속의 정예군이 아닐 뿐, 도스 군단장들의 능력치를 상회하는 실력자임과 동시에―
“오랜만에 얼굴 보겠군.”
―감히 황명을 거역할 수 없을, 제국민이기도 했다.
* * *
반란의 날까지, D-7.
여기는 마탑 최상층, 오스카의 집.
럭셔리한 복층 펜트하우스 부엌이었다.
“두구두구두구! 기대하시라구요, 스승님!”
오스카의 집에 뽀송뽀송하게 세탁되어 있던 구름 잠옷에 앞치마를 두른 나는, 또 칼을 잡았다.
“야, 조심해.”
옆에는 투덜거리면서도 또 커플 잠옷을 입어 준 오스카가 엄마 잃은 병아리처럼 초조해하며 왔다 갔다 기웃거리고 있었다.
“으앙악!”
“아오, 씨! 좀!”
당근을 썰다 삐끗, 왼손 엄지가 베였다.
프로 요리사가 이런 아마추어 같은 실수를 하다니!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당근 썰랬더니 왜 손을 썰고 지랄이야!”
“힝.”
짜증을 낸 오스카가 내 손을 휙 낚아챘다. 뜨끈한 마나가 느껴지더니 상처가 금세 아물었다.
크으! 힐, 딜 완벽한 사기캐!
“내가 할 테니까 그냥 부엌에서 나가! 하는 꼬라지 보니까 요리는 무슨, 손가락 다 잡아먹겠네!”
“안 돼요! 다들 제 스튜 먹고 눈물 줄줄 흘렸다구요. 칼질은 아직 좀 서툴러도 음식 맛은 보장해요. 스승님한테도 꼭 만들어 주고 싶단 말이에요. 네?”
“하아.”
결국 또 져 주는 오스카에게 웃어 보인 뒤 난 다시 당근을 썰기 시작했다.
“히히, 리코 베이커리에 가서 초코케이크도 사 왔거든요? 아니다, 산 건 아니구 리코가 그냥 줬지만….”
“야. 짹짹대지 말고 칼에 집중해, 칼에.”
“케이크 엄청 맛있어요. 저녁 먹은 다음에 같이 만화책 보면서 케이크 먹어요! 그리고 이 닦구 같이 자기! 제가 무서운 이야기 해 드릴게요!”
아빠는, 마탑 퇴근하고 스승님 집에서 놀다 자고 와도 되냐 물으니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외박 금지령은 체시어 한정인 듯했다.
“야, 그런데 네 음식 먹고 다들 감동했다는 게 사실이냐?”
“엥?”
내가 요리하는 걸 계속 지켜보고 있던 오스카가 한숨 푹,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는 식빵과 야채, 베이컨을 꺼내 뭔가 만들기 시작했다.
“뭐 하세요?”
“네 저녁 만든다.”
“샌드위치예요? 스튜랑 같이 먹게? 저 배불러서 이것도 저것도 다 못 먹는데?”
“아니, 먹게 될 거야.”
뭐지. 난 대수롭지 않게, 끓고 있는 냄비 안에 국자를 넣어 스튜를 젓기 시작했다.
“스승님, 그런데 저 걱정되는 게 있어요.”
“뭐.”
“하아아.”
난 한숨을 푹 내쉬고 말했다.
“제가 아는 원작― 아니, 아니다. 그러니까 전생의 기억 있죠? 그게 많이 달라져서 도움이 하나도 안 돼요.”
“뭐가 어떻게 다른데?”
“일단 사업이 3년이나 빨라진 것도 있고, 원래는 전쟁이다 뭐다 이런 흉흉한 분위기 아니었거든요? 또….”
“또?”
“혹시 스승님, 쩌어기 위에 북부 사는 서머싯 백작 아저씨 아세요? 마수 엄청 많이 나오는 영지의 영주님인데.”
“몰라.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 아저씨 사병들이 엄청 많고 쎄거든요. 그래서 원래는 아빠 도와주러 왔었단 말이에요?”
난 한숨을 쉬며 어제 아빠를 앉혀 두고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사업을 앞두고 초조해져서 모든 준비가 됐는지 하나하나 확인해 보려 했는데….
“아빠, 내가 전에 말했던 서머싯 백작 아저씨는? 그 아저씨, 지금 제도에 와서 숨어서 대기하고 있지? 다 준비된 거 맞지?”
“아아! 아니? 그 아저씨 안 왔어. 아마 안 올 거야.”
서머싯 백작.
막판에 주인공들이 제도를 점거할 때 주요한 지원군이 될 인물이었다.
그래서 이미 옛날에, 포섭해 놓으라고 아빠에게 다 알려 줬었는데….
“이번에는 안 오나 봐요. 아빠가 그 아저씨 도움 없이도 성공할 수 있을까요?”
“뭐라고? 왜 안 불렀는데?”
“저도 잘 모르겠어요….”
“아악! 왜 그 아저씨 안 불렀어? 내가 말한 사람들은 다 필요하다고 했잖아!”
“글쎄. 조제프 아저씨가 그러는데, 서머싯 백작이 몰래 움직이면 위험하다네? 어쩔 수 없지. 북부 지원군 없어도 뭐, 아빠는 할 수 있어.”
아빠는 태평했다.
그저 똑똑한 책사, 조제프를 무한 신뢰하고만 있을 뿐.
‘에휴, 나도 그냥 조제프를 믿는 수밖에 없나.’
원작에서는 미리 서머싯 백작을 제도에 대기시켜 두었던 조제프지만….
조제프는 똑똑하니까 이번에는 또 다른 수가 있으리라 믿지만….
원작과는 전혀 달라지는 전개에 초조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에이, 씨. 갑자기 나도 쫄리네? 그 인간이 필요한 거면, 지금이라도 불러야 하는 거 아냐?”
“그러기엔 이미 늦었어요. 아빠가 다 준비해 놓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으니까요. 사업 일주일 남았는데 그 아저씨 군대가 북부에서 제도로 몰래 올 방법이 없는걸요.”
난 스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 * *
북부, 뤼알마르.
장대한 기골의 중년 사내, 영주 렉터 서머싯이 친히 방문한 황제의 전령에게서 칙서를 받아들었다.
서신의 내용은 간결했다.
제도에 와서, 제국군이 출정하면 취약해지는 제도 방비를 맡으라는 말이었다.
“일주일 후, 사병 전원을 데리고 출발하시라는 황제 폐하의 전언이 있었으니 서둘러 준비하십시오.”
전령은 모두 벌벌 떠는 렉터 서머싯의 위압적인 덩치 앞에서도 눈 하나 깜빡 안 하며 명령조로 전언을 운운했다.
건방진 태도였지만, 렉터는 굳이 지적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으니 가 보게.”
전령이 떠나고, 렉터는 그제야 이를 갈며 코웃음 쳤다.
“이이….”
마수들이 득시글거리는 북부를 거의 떠넘기다시피 해 놓고, 죽겠다고 토벌 지원이라도 부탁하면 듣는 척도 안 했던 황제.
“빌어먹을 뱀 새끼가….”
그래 놓고, 전국 방방곡곡에 출정 다니며 고생하는 일 없이 한가롭게 북부 관리나 시켜 줬으니, 자기에게 감사하는 마음이라도 있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북부에 토벌 지원군 좀 보내 달라 할 때는 들은 척도 안 하더니, 뭐? 인제 와서 필요하니까 사람 오라 가라?”
렉터가 씩씩거리며 황제의 칙서를 험악하게 구겨 뭉갰다.
“와 줄 수 있느냐도 아니고, 와라? 얻다 대고 명령질이야?”
렉터 서머싯.
이 남자는, 아주 오래전부터 반란군이었다.
“루빈슈타인 공작 덕에 이제야 내 숨통이 좀 트인 걸 모르나?”
마수 때문에 내내 앓는 소리 나던 북부가 비교적 평화로워지기 시작한 건, 7년 전.
탈영했던 에녹 루빈슈타인이 다시 제도로 돌아와 칼을 쥔 후부터였다.
마수들이 살기에 최적화된 땅이라 잡아도 잡아도 넘쳐나는 북부. 그럼에도 반년에 한 번 토벌 지원군을 보내 줄까 말까 했던 황실.
에녹 루빈슈타인에게는, 그런 북부 사정을 헤아려 줄 이유가 전혀 없었지만….
“오랜만이오, 백작! 근처에 왔다 백작 생각이 나서 들렀소!”
“어이쿠! 아니, 2주일 전에 왔는데 그새 또 이렇게 난리가 나 있나? 역시 북부는 살기 참 팍팍하네. 백작이 고생이 많아.”
출정 명령이 없는데도 오며 가며 부지런히 토벌을 도와줬다.
고마운 에녹과는 그때부터 인연을 이어온 데다, 안 그래도 황제에게 반감 가득한 렉터였으니….
반란군이 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달까.
“조제프 뤼트먼은 나의 책사이자 우리 반란군의 핵심이야. 앞으로 자주 볼 테니, 조제프의 말이 곧 내 뜻이라 생각하고 따라 줘.”
에녹이 소개해 준 책사, 조제프 뤼트먼과도 벌써 오랜 시간 교류해 온 렉터였다.
다만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조제프와는 카드 게임을 하거나 시답잖은 수다를 떠는 게 전부여서, 렉터는 조금 불안했다.
에녹이 사람 보는 눈이 없진 않을 텐데….
어째 책사랍시고 한 자리 차지한 양반이 허구한 날 카드만 치고 다니는데, 영 못 미더웠달까?
그 불신은 이번에 정점을 찍었다.
“이보게, 대체 그게 무슨 소린가? 제도에 가지 말라니? 공작님이 내가 필요 없다 하던가? 나는 이날만 기다렸는데?”
“흐음. 아뇨, 아뇨. 오지 마시라는 게 아니고, 상황을 조금 신중히 지켜볼 필요가 있단 뜻입니다.”
반란을 코앞에 둔 시점.
계획대로라면 렉터는 진작 사병을 꾸려 제도 근방에 자리를 잡고 숨어 있어야 했다.
그런데 조제프가 갑자기 계획을 틀었다.
“혹시라도 황제가 북부에 왔다가, 백작님이 자리를 비운 걸 발견하면 어떡합니까?”
“아니, 뭔 소리야! 황제가 북부에 왜 와!”
“아무튼 계속 여기 계세요!”
렉터는 답답해 미칠 것 같았다.
에녹과 직접 연락할 수도 없는데 조제프는 무작정 기다리라는 말만 하고.
그렇다고 조제프를 무시하기에는, 에녹이 무조건 그의 말에 따라 달라 당부했으니까.
“이미 늦었어! 늦었다고! 당장 지금 출발해도 시간 못 맞춰!”
“에휴, 절 믿고 좀 기다려 보세요. 게이트가 떡하니 있는데 무슨 걱정이신지? 제도에는 워프 게이트 타고 가면 되잖습니까?”
…미친놈인가?
“으아악! 너 책사 아니지! 평생 칼만 쥔 나보다도 머리가 안 돌아가? 이 많은 군대를 이끌고 게이트 타고 제도에 가라고? 반란하러 왔다고 동네방네 시끄럽게 소리치며 등장하라는 거야, 뭐야?!!!”
그때 렉터는 확신했다.
속았다!
조제프 뤼트먼, 이자는 에녹의 목을 치기 위해 황제가 심어 둔 이중 첩자임이 틀림없어!
―그렇게 생각했는데.
‘진짜 게이트 타고 가게 되었네?’
렉터는 제 손안에서 처참히 구겨졌던 황제의 서신을 다시 펼치며, 침을 꿀꺽 삼켰다.
조제프의 말대로, 렉터는 늦지 않게 제도에 에녹을 도우러 갈 수 있게 됐다.
그것도 합법적으로, 황명을 받고.
“아마 황제가 뭘 하든 조제프가 그의 머리 위에 있을 거야. 솔직히 난 조제프만 한 인재를 본 적이 없어. 가끔은 너무 똑똑해서 소름 돋을 정도라니까.”
에녹의 무한 신뢰가 이해되는 순간.
응접실 뒤의 티 룸에 급히 몸을 숨겼던 누군가가, 문을 열고 빼꼼―
“어휴, 무서워라. 하마터면 걸릴 뻔. 전령은 갔나요?”
―얼굴을 내밀었다.
오늘도 한가로이 렉터와 카드나 치고 있다, 전령이 왔다는 소식에 급히 숨었던 조제프였다.
“후후, 백작님~? 제가….”
그는 전령이 무슨 소식을 가져왔는지 듣지 않아도 아는 사람처럼, 씨익 웃으며 말했다.
“게이트 타고 제도 가자고 했죠~?”
아빠가 힘을 숨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