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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힘을 숨김-242화 (243/261)

242화

* * *

격전의 날.

황실, 군사 회의장.

사령관, 체시어 리브르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상석에 앉은 황제를 오롯이 쳐다보며 직진하는 기세에 대기 중이던 능력자들 모두 숨을 삼켰다.

“신하, 체시어 리브르가 귀환하였습니다.”

“그래, 수고 많았네.”

숙였던 고개를 든 체시어의 눈이 무심히 회의장 테이블을 훑었다.

절반이 공석이었다.

“군단장 출정 인원은 이게 전부입니까.”

“아아, 아닐세.”

황제, 니콜라스가 픽 웃으며 손을 저었다.

“성기사단장은 예상했다시피 출정 명령에 불복했지만, 나머지는 전부 이 영광스러운 대업에 함께하기로 했지. 다만 부사령관인 마법사단장 포함, 4개 군대는 내 어제저녁 미리 출정시켰네.”

“…….”

상의 없이 출정 계획을 틀었다.

하지만, 체시어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저 놀랐을 뿐.

“출정 당일, 전력이 전부 모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책사, 조제프의 예상대로였으니까.

“도스 정도 되는 고위급 병력을 한 번에 움직이는 것 자체가 크나큰 부담이기 때문이지요. 황제는 많은 변수를 다 생각해야 하는 위치이니, 군대의 반절쯤은 나누어 출정시킬 확률이 높습니다.”

“그러니 병력 분산이 있어도 당황하지 마십시오. 저희 쪽에서 미리 손을 써 놓겠습니다.”

체시어는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웃음을 걸치며 다가온 황제가 그의 어깨를 격려하듯 다독였다.

“이만 가지.”

* * *

루빈슈타인 공작저.

수많은 피가 흐를 결전의 날임이 무색하게도, 고요한 아침. 따사로운 봄 햇살이 창을 넘어왔다.

거울로 눈을 돌린 에녹 루빈슈타인은 제 모습을 가만히 보았다.

은빛 갑옷과 푸른 망토.

제국군, 성기사의 모습으로 반란을 일으킨다는 사실이 모순적이었다.

제국의 능력자, 군인, 프리메라의 종으로서 수백 번 검을 잡았던 남자.

그러나, 오늘.

마침내 자신의 검은 추악하게 물든 지배자의 목에 닿게 될 것이다.

“준비는 됐느냐?”

에녹의 고개가 돌아갔다.

부친, 노르딕 루빈슈타인이었다.

저물지 않은 풍채의 부친 또한, 그 옛날 전장을 누비던 기사의 모습으로 서 있었다.

“예.”

에녹이 방 한편에 세워 놓은 검을 들었다. 아직은 피가 묻지 않은 검신이 날카로이 빛을 냈다.

“목숨을 바치는 한이 있어도, 절대 실패하지 마라.”

부친의 목소리에, 에녹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오랜 열망에 목마른 남자의 푸른 눈이, 매섭도록 빛났다.

“반드시 성공하겠습니다.”

* * *

제도, 세라프 신전.

수많은 피, 무고한 희생들을 불러올 끔찍한 전쟁이 시작될 것이다.

‘신이시여, 부디.’

사제, 자드키엘 테롯은 걱정에 밤을 새워 젖은 눈으로, 작은 기도를 올렸다.

‘이 땅이 무고한 피로 얼룩지지 않도록 굽어살펴 주소서.’

* * *

리브르 공작저.

악시온 리브르는 은퇴 이후 오랜만에 무장한 차림으로 검을 들었다.

“저기여, 아저씨! 잠깐, 잠깐! 몬가 엄청나게 오해하구 계세요!”

문득, 꼬맹이 시절 리리스와의 첫 만남이 떠올라 악시온은 웃었다.

전우인 에녹과 그의 딸 리리스를 데려온 과거는, 남자에게 진한 자책으로 남아 있었다.

결국, 모두를 괴롭혀 왔던 싸움과 오랜 기다림이 시작되었으니까.

“끝내자.”

생사에는 초연했다. 마음에 남은 한 줌의 부채감을 덜어낼 수 있게, 그는 모든 것을 던질 생각이었다.

* * *

정보 길드, <붉은 매>의 본거지.

무력을 지원할 행동대원들을 불러 모은 리코는 가면을 벗은 맨얼굴이었다.

“오늘이다.”

추악한 지배자의 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칼을 갈고 닦았던 나날들.

“전부 끝이 나면, 악마들의 시체를 밟고 서 있는 건 우리가 될 거야.”

비로소 그 지독한 기다림의 끝,

달콤한 과실을 취할 때였다.

* * *

용병 길드, <리리스의 들개들>.

무장한 용병들이 양옆으로 길을 나누어 도열한 끝에, 길드장 제미언 트라하가 서 있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후퇴하지 마라. 우리는 단 한 명도, 무고하게 학살당하지 않게 할 의무가 있다.”

“예, 형님!”

“목숨 바쳐 싸우겠습니다!”

만족스럽게 웃은 제미언이, 권갑을 바로 차며 오랜 기억 속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렸다.

“쟤는 사람도 아닌데….”

“평민이 어떻게 사람이야?”

브루스 챔버.

“우리 공주님 아니었으면, 네놈의 그 X신 같은 주입식 가치관에 세뇌당할 뻔했지 뭐야.”

양성소 시절부터 시작되어 온 질긴 악연은, 브루스가 제국 정예군으로―제미언이 용병으로 출정한 수많은 전투에서도 계속되었었다.

“오늘, 끝을 보자고.”

피 끓는 흥분에, 제미언은 웃었다.

* * *

제도.

출정식을 위해 무장한 제국군들이 야외에 도열했다.

“일동 정렬!”

황제의 보좌 전령이 목소리를 높여 명령하자, 열을 맞춰 선 군대가 일제히 부복했다.

체시어는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

제 앞에 선 황제의 뒤로 제도의 전경이 하나하나 눈에 새겨졌다.

웅장한 황궁.

중앙 신전.

저 멀리, 마탑까지.

오랜 관례와 달리 제도의 한복판, 야외에서 치르는 출정식은 황제의 퍼포먼스였다.

그저 추악하기만 할 뿐인 침략 전쟁을….

위대한 과업으로, 능력자들의 합당한 의무로, 주신 프리메라의 뜻으로 포장하기 위한 퍼포먼스.

“대업을 이루어, 끝내 이 제국에 영광을 가져다줄 나의 신하들이여.”

선언하는 황제의 옆에서, 대신관이 고개를 조아리며 성물을 내밀었다.

심판의 검.

황제는 대신관에게서 검을 받아 무릎 꿇은 체시어에게 하사했다.

체시어는 고개를 조아린 채 작게 조소했다.

주신, 프리메라가 예비한 성물.

추악하게 변질한 절대자의 힘을 거두어가기 위해 내린 검이었다.

자신과 에녹의 격차를 줄일 열쇠이며, 끝내 이를 하사한 주인의 목을 쳐 낼 무기.

“제국의 명운을 등에 업은 나의 충실한 신하에게 프리메라의 가호가 있을지니.”

체시어는 검을 받으며 일어났다.

“나에게 승리를 가져오라.”

황제의 만면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걸렸다.

“위대하신 프리메라께, 눈부신 승리를 바치겠습니다.”

“눈부신 승리를!”

사령관을 따라, 제국군들의 우렁찬 함성이 제도에 울려 퍼졌다.

제국력 1786년, 5월 18일.

바야흐로, 전쟁의 시작이었다.

* * *

마탑, 오스카의 집무실.

난 창문에 얼굴을 딱 붙이고 출정식을 지켜보았다. 이윽고 제국군이 떠나가는 모습까지 전부.

‘눈앞이 새하얘.’

식은땀이 흘렀다. 심장은 너무 뛰어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어떡해….’

손꼽아 기다렸던 날인데.

막상 그날이 오니, 기대가 아닌 걱정이 앞섰다.

차라리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좋겠다는 마음.

“하아, 후우.”

시야가 흔들려서, 나는 손을 들어 눈을 비볐다. 어느새 맺혀 있던 땀이 묻어났다.

“아?”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내 허리를 낚아채 올렸다.

“…스승님?”

오스카였다. 난 그에게 안긴 채로 어리둥절해서 돌아봤다.

“리리스 루빈슈타인.”

“네?”

“지금부터 나는 너를 유괴하겠다.”

“…….”

“아무 데도 못 가!”

“우, 우와.”

난 놀란 척했다.

“유괴라니, 너무 무섭다. 어떡해. 너무 무서워.”

건조하게 말하는 나를 보며 오스카가 어이없다는 듯 한쪽 눈썹을 쓱 올렸다.

“저기요, 무서운 표정이라도 하고 말하시지?”

“안 무서워 보이세요? 너무너무 무서워요. 어쩌지? 천재 마탑주한테 유괴당하면 빠져나올 수가 없을 거야. 아빠도 날 구하지 못할 텐데.”

“하, 개뿔이.”

오스카가 피식 웃었다.

난 지금부터 마탑에 붙잡혀 있을 예정이었다.

황제가 오스카에게 직접 찾아와 나를 인질 삼으라고 했다고.

“야.”

긴장한 내 귓가에, 오스카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쫄지 마.”

“…….”

“네 아버진 잘할 거야. 그리고 네 남친도. 네가 잘 키워 놨잖아.”

“…….”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날 안심시키려는지 오스카는 다정하게 웃었다. 그제야 긴장으로 미친 듯이 뛰던 심장이 점차 평온을 찾아갔다.

“네!”

그래, 이제 모든 게 끝난다.

세상은 평화로워지고, 나는 자유로워지고.

걱정 없이 행복한 꿈만 꿀 수 있을 거야.

“스승님, 스승님. 저랑 약속했죠? 사업 끝나고, 우리 같이 집 구하러 다녀요!”

“그놈의 집 타령은.”

“헤헤.”

난 한참 웃다가, 내 허리를 꽉 안은 오스카의 팔을 잡으며 물었다.

“그런데 스승님, 안 힘들어요? 절 이런 불편한 자세로… 이렇게 번쩍번쩍 드시다니?”

“응. 전혀 안 힘든데? 너, 내 근육 알지?”

앗. 그렇게 말하는 오스카의 이마에는 땀이 삐질, 나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말 잘 꺼냈다는 듯 나를 냉큼 내려주며 말했다.

“잘 먹더니 애가 몰라보게 무거워졌어. 살 좀 빼야겠다, 너.”

“뭐래? 아니거든요! 왜 스승님이 약골인 걸 제 무게를 탓하세요?”

“뭐래? 내가? 이 천 쪼가리로는 미처 가릴 수 없는 터질 듯한 근육들의 함성이 안 들리냐?”

“하나도 안 들리는데요?”

발끈한 오스카가 눈살을 찌푸리며 나를 노려보더니, 이내 뒤돌아서며 얄미운 목소리로 놀렸다.

“응, 아니야~ 네가 돼지야~”

난 지지 않고 그의 뒤를 졸졸 따라가며 받아쳤다.

“아니야~ 스승님이 약골이야~”

“응, 아니야~”

“응, 나도 아니야~”

“시끄러, 이 기지배야!”

“악!”

* * *

황제, 니콜라스의 방.

한가로이 뒷짐을 진 채, 황제는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출정식을 마친 제국군이 떠나고 제도는 고요했다.

우스울 만큼 따뜻한 봄 날씨.

평화로운 땅.

나의 나라…….

곧 들려올 대륙 통일이라는 기쁜 소식을 기다리며, 황제는 마지막 한 가지의 과업만을 남겨 놓고 있었다.

“날이 참 좋구나.”

굳건하게 쌓아 올릴 나의 성.

‘오늘에서야 이 질긴 연을 끊어낼 수 있겠군, 에녹.’

그를 위협하는 존재를 제거하는 것이 마지막 과업이었다.

“지체하지 말고, 내 성에 득시글거리는 버러지들을 태우기 시작하라.”

이윽고, 명이 떨어졌다.

제국력 1786년, 5월 18일.

제도, 평민 학살의 시작이었다.

아빠가 힘을 숨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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