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화
* * *
[제국력 1786년, 5월 18일.
제국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스 폰 파빌리온이 왕국 침략 전쟁을 틈타 제도와 근방 영지의 비능력자들을 학살하라 명하였다.
이를 받든 제도 방비군의 수뇌부에는 방비대장, 윌로우 챔버 후작과 능력자 양성소 연구원으로 역임하던 셀레나 루덴도르프 후작 부인……
제국력 1796년 편찬,
<제국의 역사> 中]
* * *
황명을 받은 제도 방비군들이 길을 나섰다.
셀레나 루덴도르프는 제도 근방 영지의 점거를 맡은 방비군 1소대에 소속되어 있었다.
‘정신 차려.’
지금 그녀는, 정신을 붙들고 있을 여력이 없었다.
하루아침에 사라진 남편.
그리고 두 아들.
남편은, 황제의 평민 학살에 동참하는 것을 혐오했었다.
두 번 다시 얼굴을 보지 않겠다던 남편의 말.
그 말이, 아들 카일의 탈영까지 손수 감행하겠다는 뜻일 줄이야.
‘괜찮아. 진정해. 아직, 아직 황제는 몰라.’
셀레나는 힘겹게 마음을 다잡았다.
자신은, 어떻게든 맡은 바 의무를 해내야 한다. 그래야 나중에 아들의 부재도 황제에게 선처를 구해 볼 수 있을 테니까.
“어째 표정이 우중충, 하시구먼.”
셀레나가 옆을 돌아보았다.
북부의 지배자, 렉터 서머싯 백작.
그는 황제의 명을 받들어 제도로 내려와, 방비군 1소대장을 맡은 능력자였다.
‘서머싯 백작까지 올 줄은….’
셀레나는 잠깐, 에녹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에게는 이제 가망이 없었다.
제도는 비었고, 황제의 군대는 강력했으며, 에녹이 지키려 발버둥 칠 비능력자들은 그의 걸림돌이 될 테지.
“도착하면, 영지를 점거하고 대기하죠. 루빈슈타인 공작이 오는 즉시 영지민들…….”
말하던 도중, 눈앞이 날카롭게 빛났다.
고요해진 사위.
셀레나는 말을 멈춘 채, 천천히 눈을 내렸다.
제 목에 들이 밀어진 검.
검의 주인은, 렉터 서머싯 백작이었다.
“…무슨 짓이죠.”
함께 있던 백작의 사병들도 일제히 셀레나를 제압하려는 태세를 취했다.
“무슨 짓이냐고, 물었어요.”
“뭐… 이해가 안 되시나?”
위협하며 검을 들이민 그대로, 렉터 서머싯이 조소했다.
“나는 저어기―”
황실을 턱짓한 그가 덧붙였다.
“―궁 안에 똬리 틀고 있는 뱀 새끼 대신, 지금 우리가 사냥하려고 하는 그 루빈슈타인 공작의 줄을 잡은 사람이야.”
“……!”
셀레나의 눈이 커졌다.
“더 쉽게 말하자면, 지금부터 내가 불을 지를 곳은 애꿎은 비능력자들 시체 위가 아니라, 당신 뒤에 있는 뱀굴이란 소리지.”
“…….”
“반, 란.”
셀레나의 숨이 거칠어졌다. 그 반응에, 렉터가 재미있다는 듯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하…! 반란이라니! 얼마나 사내의 피를 끓게 하는 단어야?”
이내 렉터가 검을 거두었다. 그럼에도 셀레나는 아무런 반격도 할 수 없었다.
방비군 1소대의 전력은 전부, 렉터 서머싯 백작의 사병들이었으므로.
“이봐. 우리, 죄짓고 살지 말자. 그 많은 비능력자들이 영문도 모르고 당신 손에 죽어 나가야겠어?”
“…….”
“얌전히 굴어 주라고. 그럼 나중에 나에게 감사하게 될 거야.”
반항의 여지가 없어 보이는 셀레나를 보며, 렉터가 픽 웃었다.
“내가, 당신 지옥 갈 때 죄목 하나 줄여 준 셈이니까.”
* * *
제도, 평민 거주 지역.
브루스 챔버는 방비군 3소대장으로, 제도 내의 비능력자들을 학살하라는 명을 받았다.
쉰여 명에 달하는 능력자 방비군들을 선두에서 이끌게 된 브루스의 어깨는 하늘 높이 치솟았다.
‘권력의 판도가 뒤바뀔 거라니.’
대륙 통일을 완성하고 절대적인 황권을 휘두르며 군림할 황제가, 친히 맡긴 임무.
손가락 한 번만 튕기면 죽어 나갈 비능력자들을 학살하는 것은, 콰르토 계급의 능력자인 그에게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다.
인간이라고 다 같은 인간이던가?
아무런 힘도 없는 비능력자들과 자신은, 전혀 다른 세상에 사는, 서로 다른 존재다.
“빨리 도망치셔들!”
거리에 나와 있던 평민들을 향해 브루스가 킬킬거리며 소리쳤다.
뜬금없이 들이닥친 무장 군대.
반절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달아났고, 다른 반절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런. 안타까워라.”
주변을 탐색하던 브루스의 눈에, 낡은 건물에서 막 나온 두 부자가 들어왔다.
아버지의 품에 안긴 어린 남자아이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무장한 능력자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보네.”
씩 웃은 브루스가 권갑 낀 오른쪽 팔을 휘휘 풀며 거리를 좁혔다.
“아이야, 그래도 날 너무 원망하진 마라. 늦든 빠르든, 어차피 오늘 다 죽을 거니까.”
눈을 번뜩, 빛낸 브루스의 권갑에서 푸른색의 풍압이 터져 나갔다.
“안 돼!”
비명, 그리고.
찰나에 보이는 겁에 질린 눈동자.
팟―!
‘뭐야?’
브루스가 멈칫했다.
아이를 감싸 안은 아버지의 위에 펼쳐진 푸른색의 실드.
날카로운 풍압은 그 실드에 금을 내며 흔적도 없이 흩어졌다.
“으아악! 괜찮으세요? 에고, 치료받고 나가시자마자 큰일 당하실 뻔했네.”
“치, 치료사님…. 저, 저….”
건물에서 뛰쳐나온 호리호리한 체형의 사내.
치료사라 불린 남자는, 덜덜 떠는 부자를 건물 안으로 급히 다시 들여보냈다.
“어휴, 브루스! 너 아직도 이렇게 쓰레기같이 살고 있었어?”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던 브루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 저놈이 나한테 말한 건가?’
그제야 브루스는 남자의 생김새를 찬찬히 살폈다.
허여멀건 얼굴을 반이나 가린 안경과 맹한 표정.
낯설지 않았다.
분명 기억에 있는 얼굴이었다.
“너… 설마, 롬?”
“뭐야, 내 얼굴 잊었던 거야?”
“하?”
그래, 롬.
양성소 시절 같은 방을 썼던 평민 놈이었다.
개처럼 짖으라면 짖고, 벌레처럼 기라면 발치에서 기었던.
“이야, 간만이다? X신같이 말이나 더듬던 버러지 새끼가 안 본 새 얼굴 훤해졌네? 그런데, 방금 네가 나 막은 거 맞냐?”
“하핫, 나 많이 변했지? 넌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구리네. 십 미터 전방에서도 구린내가 폴폴 나서 너인 줄 바로 알아봤잖아.”
조롱하듯 웃음을 걸쳤던 브루스의 표정이 대번에 삭, 굳었다.
“…이게 돌았나?”
브루스가 롬을 향해 위협적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 순간.
쉬이이익―!
날카로운 풍압이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놀란 브루스가 그대로 멈춰 굳었다.
“여어! 우리 위대하신 브루스 경께서, 누추한 이곳까지 어인 행차이신지?”
뻣뻣한 고개를 돌려 보니, 무장한 용병들의 선봉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제미언 트라하.
“하하하, 너네 뭐냐?”
기어코 생채기를 남겼는지, 시린 코끝을 훔쳐내자 피가 묻어났다.
젬을 향해 웃어 보이던 브루스가 단숨에 입꼬리를 내리며 분노를 여과 없이 드러냈다.
“뒈지고 싶냐?”
“누가 뒈지는데. 나? 아니면, 너?”
“…….”
조롱하는 젬의 목소리에, 브루스는 잠시 침묵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제 용병단을 이끌고 온 것하며, 황명을 받은 방비군과의 싸움도 불사하겠다는 태도.
젬은 각오한 것이다.
감히, 황제의 군대에게 저항하기로.
반역이었다.
“와, 멍청한 X….”
이윽고 브루스는 숨넘어가듯 헐떡이며 웃기 시작했다.
“네 목 위에 달린 게 대가리냐, 돌덩이냐? 양성소 몇 년을 유급하고 졸업했는데 상식이 없어? 네X이 하급 버러지들 백 명, 천 명을 데려와 봐야 나 하나도 못 잡는 거 몰라?”
같은 능력자들 사이에서도 명백히 나뉘는 힘의 차이.
6계급의 디에즈들은, 비능력자가 없다면 이 계급 사회 가장 바닥에서 굴러야 할 존재들이다.
“글쎄? 잡을 수 있을지, 어떨지는 해 봐야 아는 거 아닐까?”
젬이 히죽 웃으며 덧붙였다.
“능력 떼고 붙으면 내 덩치에 한주먹감도 안 되는 비실비실한 귀족 도련님, 뭣도 없이 계급 믿고 설치는 꼬라지 두고 보느라 답답해 죽는 줄 알았는데.”
“이 미친X이 진짜―”
눈이 뒤집힌 브루스가 주저 없이 젬을 향해 공격을 날렸다.
그러나, 팟―!
또다. 또 실드에 가로막혔다.
“언제까지 입으로만 싸우게? 우리 이제 양성소 꼬맹이들 아니잖아~!”
한숨 쉬며, 젬에게로 다가가는 롬.
‘대체 저 새끼 뭐지?’
브루스는 이전의 공격도, 지금의 공격도 롬이 막아냈음을 확신했다.
그러나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제 공격을 막기 위해서는 적어도 C급 이상의 실드를 구현해야 했다.
‘저놈 디에즈 아니었어?’
롬은 분명, 최하급의 방어 마법도 시전하기 힘든 디에즈일 텐데.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당황한 브루스를 알아봤는지, 젬이 입을 가리고 웃음을 터뜨렸다.
“풉.”
* * *
마탑, 영재 교육실.
흉흉한 바깥의 분위기와는 달리, 이곳은 한결같은 학구열에 불탔다.
그 가운데, 한스가 있었다.
현존하는 모든 마법을 보다 적은 마나로 재구성해 구현하는 획기적인 마법식의 제작자.
능력자들의 격차를 없애고, 계급 간의 대등한 싸움을 가능케 한….
그러니까, 1786년 봄에 일어날 뻔했던 끔찍한 학살을 막은―
숨은 주역이었다.
* * *
“유치하게 계속 아가리 털지 말고, 한판 시원하게 붙자!”
젬이 성큼, 브루스를 향해 한 발짝 다가섰다.
“지긋지긋했다, 우리. 그치?”
브루스는 흠칫하며 한발 물러섰다.
제 방비군보다 머릿수가 두 배나 많은 젬의 용병단.
물론, 디에즈 따위들 몇백 명을 데려와 봐야, 그 힘의 격차 때문에 의미 없었지만….
‘아냐. 의미 없는 게 맞나? 저X은 왜 저렇게 당당하며, 롬 저 자식은 어떻게 날 막은 거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오늘로써 이 질긴 악연, 깔끔하게 청산하자고.”
“시끄러워, 이 멍청한 X아! 네가 지금 누구한테 반기를 드는지 알아?!”
“아주 자알 알지! 안 그래도 네놈 얼굴을 뭉개 놓고 그다음엔 저―”
젬이 멀리 보이는 황궁을 손가락질했다.
“―요새에서 두 발 뻗고 배나 긁고 있는 황제 놈에게도 한 방 먹여주러 갈 생각이거든?”
“이 미, 미친….”
브루스가 당황하는데, 뒤에 있던 누군가가 능력자 십여 명을 이끌고 앞으로 용감하게 나섰다.
셉티마 성권사단 소속의 알프레도 버빈이었다.
“아, 알프레도 경! 좋아! 저 빌어먹을 X한테 한 방 먹여주라고!”
두려움도 없는지 전진하는 알프레도를 보며, 히죽 웃던 브루스의 입꼬리가―
“대체 뭔 수작을 부렸길래 저렇게 당당한…….”
―그대로 굳었다.
다가온 알프레도의 어깨에 척, 팔을 두른 젬이 브루스 보란 듯 킬킬거렸다.
“왜? 네 편인 줄 알았냐?”
“이, 이 X발…. 알프레도 버빈…. 미친 거지, 진짜…? 가, 감히… 이 제국 황실에 반기를 들어? 고작 저 벌레들한테 붙어서?”
“시끄럽고. 누가 벌레인지는 지금부터 확인해 보자. 멀쩡히 돌아갈 생각은 마, 브루스 챔버.”
젬이 서슬 퍼렇게 웃으며 말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너, 아니면 나. 둘 중의 하나는 무조건 시체가 될 테니까.”
그를 신호탄으로, 젬의 용병단이 진격했다.
훗날 위대한 투쟁으로 기록될 제국 혁명군의 첫 움직임이었다.
아빠가 힘을 숨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