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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힘을 숨김-244화 (245/261)

244화

* * *

사령관, 체시어 리브르가 이끄는 제국군은 뱃길을 통해 이솔렘 왕국으로 갈 계획이었다.

제도를 떠나 항구로 향하는 길.

위대한 제국군.

아니,

추악한 침략군이겠지.

성궁사단장, 가리온 호프만은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곧 자신의 화살촉에는 수십, 수백 명의 무고한 피가 묻게 될 것이다.

거역할 수 없는 황명임을 안다. 잘 알고 있음에도….

인간이라면 어찌 괴롭지 않을 수 있을까.

“다들 정지.”

그때.

선봉에서 진군하던 사령관이 말을 멈추고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반대편에서 군대가 오고 있었다.

‘뭐지? 질리언 경? 율리안 경?’

가리온은 당황했다.

황명을 받고 선발로 떠났던 법사단장들의 군대였다.

‘어제 먼저 배를 탔을 텐데? 왜 지금 여기 있는 거지?’

이내 선봉의 마법사단장, 질리언 발렌치아노가 다가와 말을 멈추었다.

“사령관님.”

그는 태연하게 말했다.

“죄송하지만 도저히, 남의 집은 못 쳐들어가겠습니다. 자식들 보기 영 부끄러워서 말입니다.”

……!

황명 불복?

충격적인 선언에, 곳곳에서 숨 참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단호한 표정을 보건대 질리언은 진심이었다.

이는 결코 가벼운 죄가 아니다.

왕국 정복, 그리고 대륙 통일.

황제가 얼마나 바라고 준비해 왔던 일인가.

질리언은 황명에 불복하며 목숨을 내놓을 각오를 한 것이다.

‘이, 이렇게까지….’

부끄러워진 가리온은 질리언과 눈이 마주칠까 봐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래, 인간이라면.

인간이라면 백번 옳은 선택이다.

하지만, 자신은 차마 목숨까지 내놓을 용기가 없다. 오랜 동료의 뜻을 외면해야만 하는 마음이 괴로웠다.

“그렇습니까.”

한참 침묵하던 사령관, 체시어가 입을 열었다. 얼어붙은 목소리가 흡사 죽음을 알리는 집행관 같았다.

슥―

예상대로, 사령관은 그 자리에서 검을 뽑았다.

모두 숨을 삼켰다.

그러나.

‘무슨…?’

체시어는 명령에 불복한 수하를 즉결 처형하는 대신, 고삐를 쥔 손을 움직여 말 머리를 돌렸다.

체시어와 마주 보게 된 가리온의 눈이 커졌다.

“그렇다면, 제도로 전원 회군합니다.”

* * *

[제국력 1786년, 5월 18일.

사령관, 체시어 리브르가 황명을 배반하고 중부 베델 영지에서 회군하였다. 이 ‘베델 회군’이 곧, 위대한 혁명의 시작점이었다.]

* * *

그 시각.

방비대장, 윌로우 챔버와 체시어의 친부인 로저 오닉스가 맡은 방비군 2소대도 사병들을 이끌고 출발하고 있었다.

“으음, 에녹 루빈슈타인은 어디를 막으러 갈 것 같소?”

“당연히 1소대 쪽으로 가겠지.”

잔뜩 겁을 먹은 윌로우의 얼굴을 보며, 로저는 속으로 비웃었다.

“그렇겠지?”

에녹의 병력을 분산시키기 위한 황제의 계획은 완벽했다.

제도는 심각하게 망칠 수 없으니, 전투 시 큰 피해를 내지 않는 권사들로 꾸린 3소대를 보내 평민들만 신속히 제거.

근방 영지는 대규모 전투를 감수하고 법사, 검사들로 꾸려진 1소대와 2소대를 각각 보냈다.

이를 막으려 할 에녹은 사병들을 나누어 보낼 것이다.

그리고 에녹 자신은….

“1소대 쪽은 서머싯 백작에 루덴도르프 후작 부인까지 도스가 둘이니까, 당연히 거길 막으러 가겠지. 하하하! 바보 같은 질문이었구려!”

자신은 2소대, 아들 브루스는 3소대다. 괴물 같은 에녹 루빈슈타인과 마주칠 일은 없겠지.

안심한 윌로우가 제 뒤를 따르는 사병들을 턱짓했다.

“로저 자네도 내 사병단 소문은 들었지? 루빈슈타인 사병단에 필적한단 말일세!”

윌로우는 언제부턴가 사병 모집에 열을 올리더니, 쓸 만한 전력을 꾸려 황제의 눈에 들기 시작했다.

이번에 황제가 그에게 방비대장을 맡긴 것도 그 때문이었다.

“요놈! 우리 사병단장!”

윌로우가 바로 제 옆에서 말을 모는 젊은 사내를 흐뭇하게 쳐다봤다.

“우리 조제프가 찾아온 보물이야. 대체 어디서 이런 놈을 데려왔는지 몰라.”

“실력이 좋나?”

“좋다 뿐인가? 내 군대 관리에는 소질이 없어서, 사병단은 전적으로 이 친구에게 맡겼지.”

거들먹거리는 윌로우의 얼굴에는 퉁퉁 살이 올라 있었다.

로저는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멍청한 놈인데 운 하나는 참 좋아. 손 하나 까딱 안 해도 인재들이 절로 따라붙으니.’

‘그’ 조제프 뤼트먼이, 잠적했다가 돌아와 윌로우의 손을 잡았을 때.

얼마나 배가 아팠던가?

조제프의 화려한 과거를 알고 있는 제도 귀족이라면 다들 윌로우를 부러워했다.

‘조제프 그 똑똑한 자가 대체 뭘 믿고 이놈 줄을 잡았나 했더니.’

이런 날이 올 걸 예상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실력 좋은 사병단장을 구해 와 군대부터 정비하고, 황제의 눈에 들고….

이번 일이 끝나면, 윌로우 챔버는 단숨에 권력의 최정상에 오르겠지.

‘그에 비해 난….’

체시어의 친부라는 타이틀이 아니었으면 황제의 줄을 잡을 기회도 없었을 터.

이럴 줄 알았으면, 사생아라 내칠 것이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금이야 옥이야 잘 키울 것을….

눈앞에서 보물 같은 제 핏줄을 놓친 과거는 너무나도 뼈아팠다.

‘그래도 친아버지라고, 체시어는 옛날의 앙금은 다 잊었는데 말이야.’

문제는, 악시온 리브르였다.

‘그자만 없어도!’

체시어는 양부인 악시온에게 부채감이 있어 깍듯했다.

이번 기회에 악시온도 제거하면 어떻겠냐는 얘기를 황제에게 넌지시 꺼내 봤지만.

“체시어 리브르가, 생각보다 양부에게 유대감이 커. 그래서 내가 악시온을 지금까지 그냥 뒀던 거야.”

체시어를 구슬려 잘 다뤄야 하는 황제는, 악시온을 건드리지 않겠다는 입장이었다.

로저 오닉스가 그 대단한 마검사단장의 친부이면 무엇 하겠나?

악시온이 있는 한, 잘나가는 아들 덕 마음껏 보기는 힘들었다.

“워, 워!”

그때.

윌로우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의 속도를 줄였다.

“누구지?”

도스 성기사단을 상징하는 푸른 망토를 휘날리며, 누군가가 전방에 서 있었다.

“…리브르 공작?”

악시온이었다.

“어디들 그리 바쁘게 가시나.”

그는 마치 방비군이 이쪽으로 올 것을 알고 기다리던 사람 같았다.

“고, 공작께서 여기는 무슨 일이십니까? 저희는 황명을 받고 떠나는 길입니다. 큰 전투가 있을 테니 공께서는 사택에서 몸을 보전하시지요.”

윌로우가 공손하게 말했다.

황제도 눈치를 보며 건드리지 말라 당부한 자이니, 깍듯할 수밖에.

“큰 전투? 무슨 전투?”

슥―

“히익!”

대뜸 허리춤에서 검을 뽑은 악시온에, 놀란 윌로우가 말 위에서 기우뚱거렸다.

“이쪽으로 가면 롬웰인가? 혹시 롬웰을 들쑤시면서 에녹의 전력을 분산하라는 황명이라도 받았나?”

그래, 맞다. 윌로우와 로저의 눈이 커졌다.

“따를 명이 있고, 아닌 명이 있지. 둘 다 콰르토 배지 차고, 양심도 없이 그 좋은 능력을 왜 인간 학살에 쓰려 하나?”

“가, 각하? 황명입니다! 혹 저희를 막아서기라도 하실 생각입니까?”

“…? 당연하지.”

악시온이 어이없다는 듯 덧붙였다.

“내가 그럼, 여기까지 자네들이랑 무슨 소풍이라도 가려고 왔겠나? 살은 뒤룩뒤룩 찌워 놓고 어째 눈치는 하나도 안 키웠군.”

“지금, 지금 황제 폐하께 반기를 드신다는 뜻입니까?”

놀란 윌로우는 저를 조롱하는 말도 안 들리는 모양이었다.

“반역이라고요?!!!”

“오, 이게 그렇게 되나?”

“당연하지요!”

그때, 주고받는 둘을 보며 로저의 심장은 쿵쿵 뛰고 있었다.

‘악시온 리브르가 에녹 루빈슈타인을 도울 생각인 거야!’

틀림없었다!

악시온이 대놓고 에녹의 편에 서서, 자신들을 막아선다면?

황명 불복.

제거할 합당한 명분이 생긴다.

‘여기서 죽여야 해.’

로저의 눈이 뒤집혔다. 이것은 신이 내린 기회였다.

“아무리 공께서 강하시다 한들, 혼자 이 군대를 어찌 막으신단 말입니까?!”

윌로우의 말대로, 악시온은 검 한 자루만 든 단신이었다.

“저와 오닉스 후작의 사병들이 이리 많습니다! 전부 옥타바이고요!”

뒤에 선 군대를 가리킨 윌로우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

“이봐, 윌로우. 진정하게. 리브르 공께서 자신이 있으신 거겠지.”

로저가 말에서 내리며 허리춤에 찬 검에 손을 가져갔다.

‘제아무리 도스라고 해도, 이 많은 옥타바 사병들과 콰르토 둘을 상대할 수는 없지. 지가 무슨 에녹 루빈슈타인인 줄 알아….’

악시온에게는 승산이 없다.

분명 죽음을 각오하고, 에녹을 돕기 위해 자기 목숨으로 시간이라도 벌려는 것이다.

‘눈물겨운 우정이군.’

비열하게 웃은 로저가 말했다.

“황명에 불복하겠다 하셨으니, 공은 이 시간부로 반역자입니다. 군법대로 하겠습니다.”

“음, 그래. 후작은 이 상황이 반갑겠어? 안 그래도 나 죽이고 싶어서 안달이었지?”

악시온이 픽 웃으며 덧붙였다.

“코앞에서 내게 아들을 뺏겼으니 얼마나 상심이 컸겠어. 잘나가는 아들, 손가락 빨며 구경만 해야 하니 그간 피눈물 좀 났을 거야.”

조롱하는 말투에 로저가 이를 악물었다.

“나에게도, 후작에게도 잘됐어. 이번 기회에 서로에게 쌓였던 빚 깔끔하게 정리하고, 결과에 승복하자고.”

“괜히 입 나불대며 시간 벌….”

“으어억!”

그때, 윌로우의 비명이 들렸다.

뭐지?

돌아본 로저는 놀랐다. 챔버 가의 사병단장이라던 놈이, 제 주인의 목에 칼을 들이밀고 있는 게 아닌가.

“너 뭐, 무슨….”

상황을 파악할 새도 없이, 군대가 둘로 나뉘어 맞붙었다.

챔버 가의 사병들이 오닉스 가의 사병들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윌로우! 이게 무슨 짓이야!”

“나, 나도 모르는 일이오!”

윌로우가 허겁지겁 로저 쪽으로 달려와 몸을 피했다.

챔버 가 사병단장의 갑작스러운 배신.

로저는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아!’

그리고 이내 깨달았다.

“우리 조제프가 찾아온 보물이야. 대체 어디서 이런 놈을 데려왔는지 몰라.”

조제프 뤼트먼….

그놈이, 설마?

“하하하하!”

웃음소리에 로저가 휙, 악시온을 돌아보았다.

예상했다는 듯 태연한 얼굴.

어쩐지, 배짱 좋게도 혼자 군대를 막아선 이유가 있었다.

“좋아, 그 많다는 사병들은 해결된 것 같고.”

악시온이 검 끝으로 척, 윌로우와 로저를 가리켰다.

“난 콰르토 두 마리만 잡으면 될 모양인데.”

“가, 각하! 지금, 지, 지금 이, 이게 무, 무슨…!”

패닉에 빠진 윌로우가 말을 더듬거렸다. 악시온은 그를 본 체도 안 하고, 오직 로저만을 직시했다.

“로저 오닉스.”

“…….”

“나에게서 체시어의 ‘아버지’ 타이틀을 빼앗을 기회를 주지. 네놈이 그리 좋아하는 계급.”

악시온이 어깨에 손을 올려 망토 체인을 끌렀다.

“떼고.”

도스를 상징하는 푸른 망토가,

휙.

날아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덤비는 걸 허락하겠다.”

성큼, 한 발짝 다가선 그가 여유롭게 웃었다.

“누가 진짜 아버지인지, 우리 아들 양육권 걸고.”

겨누어진 검 끝이 빛났다.

“남자답게 한판 붙어 보자고.”

아빠가 힘을 숨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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