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5화
* * *
파빌리온 황궁, 지하 통로.
고요한 사위에 도망치는 황족들의 발소리가 다급했다.
“반역이라니, 이본느! 정말이냐?”
6황자가 울먹이며 물었다.
불온한 움직임을 모두 꿰뚫어 보고 미리 황족들을 도망치게 하는 것은….
8황녀, 이본느 폰 파빌리온이었다.
“예, 오라버니. 자세한 얘기는 몸을 안전히 피한 뒤에 하세요. 제국 황실은 반란군을 막을 방도가 없습니다. 계속 여기에 있다간 우리 전부 죽어요.”
도망치는 황족들은 다섯 명.
6황자와 8황녀 이본느, 그리고 어린 황녀 세 명이었다.
“어찌 반란군이 이긴다고 확신해? 그렇다 하더라도, 도망치는 것이 맞니? 우린 황족이다. 끝까지 명예롭게 자리를 지켜야만….”
“명예보다 목숨이 중요하니 저를 따라오신 게 아니었나요, 오라버니?”
이본느의 말에, 6황자는 떨리는 입술을 다물고 말았다.
다시 형제들을 이끌며, 이본느는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렸다.
‘황제 폐하.’
황족이라고 해서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전투 계급이라면 예외 없이 칼을 잡았고, 황제의 자식 열네 명 중 여섯 명은 전사했다.
이 땅에 계급제를 세뇌하기 위해서는, 황족들부터 ‘계급’에 순응하는 모습을 보여야 했으므로.
“네 이름이 무엇이었지?”
“…이본느입니다, 폐하.”
3년 전.
남보다도 못한, 황궁에 함께 기거하면서도 얼굴 한번 보기 힘들었던 황제가 찾아와 이름을 물었을 때.
이본느의 나이는 열여덟 살이었다.
‘나의 아버지.’
딸이 그 나이가 되기까지, 이름조차도 기억하지 못하는 아버지….
“나에게는 새로운 검이 필요하다. 체시어 리브르를 손에 넣으려면, 보다 확실한 끈이 필요해.”
“이본느, 네가 나이가 맞는구나. 혼인을 준비하거라.”
계급이 낮은 황족은 자식 취급도 받지 못했다.
그저 다음 대의 프리메라를 낳기 위해 태어났다가, 하필 능력치까지 부족해 황제에게 버림받은….
‘실패작’들이었다.
“결혼하면 남편에게 복종해라. 눈에 거슬리는 행동도 하지 말고. 네 계급으로는 감히 넘볼 수도 없는, 가장 높은 위치에 오르게 되는 거다.”
“쓸모없는 다른 형제들과 달리, 너는 이 아비의 기쁨이 되어 주겠구나.”
평생 실패작 취급받던 딸은, 마지막까지도 황제에게 도구였다.
“다 왔어요.”
기나긴 지하 통로를 벗어난 이본느가 말했다.
묵직한 철문을 열자, 쏟아지는 빛과 함께.
“……!”
무장한 군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황족들이 이곳으로 탈출할 줄 알고 있었던 것처럼.
“이, 이게 무슨….”
6황자가 놀랐다.
군대를 이끌고 서 있는 얼굴은, 그 옛날, 수많은 전공을 세우며 제 가문을 최정상에 올려놓았던….
루빈슈타인 가문의 전대(前代) 가주, 노르딕 루빈슈타인이었다.
“이, 이본느…. 저자는….”
무심한 표정으로도 흉흉한 기세를 내뿜는 노장의 앞에서, 6황자는 벌벌 떨었다.
“…이본느?”
그때, 6황자의 얼굴이 충격으로 굳었다.
천천히 노르딕의 앞으로 걸어간 이본느가 보란 듯 그의 옆에 선 것이 아닌가.
“아.”
그 순간, 그는 깨달았다.
누이의 배신이었다.
* * *
3년 전.
“황족들의 처우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다 알면서도 불편한 마음에 굳이 묻는 에녹의 속내를, 조제프는 다 꿰고 있었다.
“당연히 전부 처형입니다.”
“…….”
“…하지만, 그러면 마음이 불편하시겠지요?”
반란의 궁극적인 목표는 ‘계급’의 완전 폐지다.
계급제로 고통받았던 이들에게 끝내 자유를 주는 것.
그렇다면 에녹은, 비전투 계급인 황족들의 최종적인 처우를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황제가 이번에 체시어 경을 손에 넣으려고, 8황녀와 혼인 동맹을 추진했었지요.”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반란군이 개혁하려는 그 ‘계급제’의 피해자일 수도 있었으므로.
“8황녀는 무슨 생각으로 황제의 뜻에 따르려 했을까요.”
“글쎄. 모르긴 몰라도, 황제의 말을 거역할 수는 없었겠지.”
“그렇겠지요. 그들의 내부 사정과 입장을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회유도 해 보고요.”
조제프는 8황녀를 떠올렸다.
철석같이 조제프가 자신의 편이라 믿고 있는 윌로우 챔버 후작을 통해, 그녀와 접촉해볼 수 있을 것이다.
“확실한 성공을 위해, 어차피 황실 내부의 조력자도 필요했으니까요.”
* * *
그로부터 3년.
8황녀, 이본느는 아버지를 배신하기로 한 후부터 반란군과 내통했다.
황족만이 알 수 있는 황실의 내부 사정, 황궁의 비밀 통로 및 대피소 같은 것들이 기록된 구조도, 그녀의 귀에 먼저 들어온 군사 계획 등을 발 빠르게 빼돌렸다.
동시에, 이본느는 자신의 형제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비전투 계급, 그중에서도 유약하고 어린 형제들만 골라냈다. 핍박받으며 자라 계급제에 물들지 않은 이들이었다.
착실히 협조한 대가로 반란군에게 선처를 구해, 목숨이라도 부지할 수 있도록.
“투항하십시오. 그러지 않는다면, 저는 이 자리에서 황족 전하들의 목을 베어야 합니다.”
노르딕이 말하자,
“이쪽으로 와.”
이본느가 떨고 있는 형제들에게 손짓했다.
세 명의 어린 황녀가 고민도 없이 달려가 이본느의 치맛자락을 잡고 매달렸다.
그 모습을 멍하니 보던 6황자는 힘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본느, 네가 어떻게 우리에게 이럴 수가 있느냐….”
6황자는 착하고 유약했다. 오히려 그렇기에 이본느는 마지막까지, 그를 데려갈지 말지 고민했다.
황족 취급도 못 받고, 황제를 닮은 형제들에게 핍박당하면서도….
계급제에 세뇌되어 그것이 당연하다며 순응해 온 사람이었으니까.
“오라버니. 다른 나라에서 일어난 수많은 반란의 역사를 보면, 우리 같은 왕족들의 최후는 하나같이 똑같았어요.”
새로운 시대를 여는 상징의 의미로도, 반란이 성공하면 왕과 그 자식들은 단두대에 올라야 한다.
사라질 왕조의 핏줄이라는 이유로 치러야 할, 무서운 대가.
“당연히 우리도 죽어야 해요. 하지만, 이렇게 목숨이나마 부지하게 해 준다고 하니….”
“…….”
“같이, 살아요.”
6황자는 눈을 질끈 감았다. 고여 있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나는… 안 된다. 그냥, 죽겠다. 황족으로서, 명예롭게….”
“우리가 태어나 한 번이라도 그들과 같은 핏줄로 취급받은 적이 있었나요?”
이본느가 한 발짝 다가섰다.
“황족이라는 허울만 주어졌을 뿐, 오히려 남들보다 못한 대우를 받으면서 버텨왔어요. 그런데, 왜? 왜 죽을 때는 황족이라는 명예를 지키며 함께 죽어야 하죠?”
“난, 나는….”
“오라버니.”
어느새 이본느는 6황자의 앞까지 다가와 섰다.
두 사람 모두 울고 있었다.
“혹시 오라버니는… 아버지에게, 이름으로 불려 본 적이 있어요?”
“…….”
누이는, 답을 아는 질문을 하고 있었다.
이름…….
한 번도 불려 본 적 없었고.
“황제 폐하는, 오라버니의 이름을 알고 있긴 하나요?”
앞으로도 불릴 일 없을 테지.
6황자, 빈센트 폰 파빌리온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끝내 오열했다.
* * *
[제국력 1786년, 5월 18일.
반역의 움직임을 읽은 파빌리온 황족 다섯이 도주하였다.]
* * *
[제도와 근방 곳곳에서 치열하게 전투가 펼쳐지는 사이, 혁명군의 수장, 에녹 루빈슈타인 공작은 오직 검 한 자루를 쥔 단신으로…….]
* * *
“8황녀의 말에 따르면, 황제가 디에즈 계급 전력을 대규모로 모으고 있다고 합니다.”
황제가 있는 궁에 당도한 에녹이, 걸음을 멈추고 조제프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궁을 지키며 에녹의 앞을 막아선, 백여 명이 넘는 군사들.
“디에즈 군대를 만든 이유는, 아시겠지만, 각하를 막기 위함이겠지요.”
비열한 황제는 알고 있었다.
에녹을 주춤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은, 그의 힘에 필적할 만한 고위 능력자들이 아니다.
오히려 맞설 능력이 없는, 승리하리라는 가망이 없는, 그저 죽음을 각오한 채 희생될 수밖에 없는….
계급의 최하위에 있는 자들이었다.
“이는 시간 싸움입니다. 황제에게 반격의 틈을 주지 않고, 체시어 경이 제도로 회군하여 황실에 도착하는 시점을 맞춰 주셔야 합니다.”
“그 많은 군대를 살려서 제압하시다가는 늦습니다.”
“힘드시리란 것을 압니다. 알지만, 망설이시면 안 됩니다.”
에녹도 알고 있었다.
황제에게 닿기까지, 자신의 손에 무고한 피를 한 방울도 묻히지 않을 수는 없다는 것을.
‘이렇게 많은 이들을, 대체 언제….’
그럼에도 괴로웠다.
에녹은, 무기를 쥔 채 벌벌 떠는 군사들을 훑어보았다.
“길을….”
그리고는 시선을 떨어뜨리며, 의미 없는 부탁을 해 보았다.
“길을… 열어 줄 수 있겠나.”
침묵.
이내, 에녹이 천천히 고개를 들며 검집에서 검을 뽑았다.
그 순간.
챙!
챙―!
에녹이 놀랐다.
백여 명의 군사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무기를 버리며 길을 터 주었다.
‘이게 무슨….’
에녹은 그들의 표정을 보았다.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초점 없는 눈이었다.
* * *
마탑.
오스카는 두 손을 모은 채 눈을 감고 기도하는 리리스를 바라보다, 놀라 아이의 팔을 잡아챘다.
“너!”
눈앞에서, 아이의 머리가 길었다.
흥분한 오스카를 마주하며 겁먹은 얼굴도 미묘하게 변해 있었다.
“…뭐 했냐.”
“기도요….”
“기도하면 자라냐?! 어?”
“…….”
“대체 뭘 했는데…. 나한테 말은, 말은 해 주기로 했잖아….”
아무런 희생도, 어떤 피해도 없이 성공할 수는 없다.
그리고 아이는, 언제나처럼 타인의 희생보다는 자신의 생명을 태우는 선택을 할 테지.
“정말 기도했어요….”
슬그머니 오스카의 눈치를 보던 리리스가 덧붙였다.
“…아빠 앞을 아무도 막아서지 말라구요.”
“…….”
오스카는 화를 삼키며, 지그시 눈을 감고 생각했다.
“……막아서지 말라구요.”
그렇다면 아마도, 정신을 조종하는 계열의 능력…….
황제에게 닿기까지, 에녹의 검에 죽게 될 이들을 위한 기도였다.
* * *
무언가에 조종당하듯 저항 없이 길을 내어 준 이들을 보며, 에녹의 얼굴은 더 괴롭게 일그러졌다.
길을 터 준 것은 아마도,
딸이리라.
“……당신 딸. 사람들이 불쌍해서? 그런 단순한 이유로 제 수명 깎아 가며 뭔가 하려는 게 아니에요.”
“아빠 신념을 지켜 주려는 거지.”
그 언젠가, 오스카가 했던 말이 떠올라 울컥한 에녹은 떨며 입술을 꽉 짓씹었다.
“황제 목에 검이 닿기까지, 그 길에… 아빠의 신념과는 다른, 억울한 피가 없었으면 하는 거예요.”
딸이 생명을 태워 지켜낸 신념.
갚을 길은, 끝내 이 땅 위에 그 값진 뜻을 새겨 넣는 것뿐이다.
‘미안해, 공주야. 아빠가, 꼭. 꼭 해낼게.’
아직 흘리기에는 이른 눈물을 삼켜 내며 에녹은 검을 바로 쥐었다.
‘너를 위해서.’
악마의 요새로 망설임 없이 전진하는 남자의 눈이, 매섭도록 빛났다.
아빠가 힘을 숨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