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화
* * *
날카로운 궤적을 그리는 검날.
신속히 적을 꿰뚫는 첨예한 공격.
황실 기사단장, 드웨인 녹스는 이 아비규환 속에서도 마치 검무를 추는 듯 유려한 전사의 몸짓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에녹 루빈슈타인.
앞으로도 그를 능가하는 존재는 없을 것이 분명한,
제국 최고의 능력자.
그 축복받은 사내는 지금, 그에게 능력을 허락한 프리메라의 터전에 쳐들어와 있었다.
‘어떻게 된 걸까.’
황제의 계획대로라면, 드웨인이 저 사내와 황궁에서 이토록 빨리 만날 일은 없었다.
지금 밖에서는 평민 학살이 자행되고 있고 에녹이라면 분명 그 사태를 먼저 수습하려 했을 테니까.
“아무리 에녹이라고 해도, 민간인들을 전부 구해낼 방도는 없다. 아마 죽거나, 그 버러지들의 목숨을 살려 주는 대가로 투항하거나. 둘 중 한 가지 선택을 하겠지.”
“에녹의 신념은 절대 무고한 피를 바라지 않으니―”
“그는 내게 영원히 닿을 수 없다. 결국은 죽음뿐이야.”
황제의 말은 틀린 곳이 없었다.
단숨에 생명을 꺼트리고 터전을 파괴할 저력을 가졌지만, 단 한 번도 자신의 힘을 그렇게 써 본 적이 없는 에녹이었기에.
황제의 군대를 상대하려면, 에녹은 필연적으로 무고한 이들까지 위험에 빠트리게 될 수밖에 없었다.
‘설마 그걸 알고, 아예 평민들을 포기해 버린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황제가 학살을 명한 시점이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황궁에 당도했을 리가 없다.
‘밖에 있던 디에즈군까지 한 번에 학살하고 쳐들어왔다고?’
황제는 에녹을 막을 방도를 끝의 끝까지 마련해 두었다.
다만 에녹이 그 모든 희생을 외면하는 선택을 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는데….
‘아니다. 그렇다기에는… 이런 식으로 싸울 리가 없어.’
에녹은 막아서는 셉티마 계급의 황실 기사들을 하나하나 상대하고 있었다.
챙!
“크윽!”
“…….”
챙―!
급소를 피해, 다시 검을 들고 덤빌 수만 없게끔.
적을 깔끔하게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드는 공격.
단 한 명의 희생자도 만들지 않으려는 움직임이었다.
‘저자는 지금 당장이라도 우리를 전부 쓸어 버리고 황제에게 향할 수도 있다.’
황실 기사단장으로 보직이 변경된 지 10년.
그 전까지 정예군으로 활동했던 드웨인은, 에녹의 저력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열넷, 소년병 시절에 이미 검의 경지에 다다라, 대량 학살이 가능한 엘레바도(Elevado)―즉사기(卽死技)까지 만들어 낸 사내.
그럼에도 지금, 에녹의 검은 모순적이게도 ‘적을 살리기 위하여’ 움직이고 있었다.
‘한데, 왜지?’
희생자를 내지 않기 위해 검기를 쓰지 않는 속내는 이해했으나, 실드 한 겹 두르지 않은 채 싸우는 점은 의아했다.
에녹은 벌써 많은 피를 흘렸다.
하나하나가 치명상이었다.
‘전부 피할 수 있는 공격이었다. 그런데도 마치, 일부러 부상당하려는 것처럼….’
모르는 이들에게는 지금 에녹이 무식하게 모든 공격을 몸으로 받아내는 것처럼 보일 테지만, 오랜 시간 검을 잡아 온 드웨인은 알았다.
힘의 격차를 감히 가늠도 할 수 없는 실력자가, 급소만 피하며 부러 치명상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그렇기에 드웨인은, 에녹이 흘리는 피가 점점 많아질수록 외려 확실히 깨달았다.
‘감히 기사들이 상대할 수 있는 실력이 아니다. 나는 절대 저자를 막을 수 없어.’
늦든 빠르든, 에녹은 황제의 앞에 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너희는 목숨을 바쳐 황궁을 지켜내야 한다.”
“만에 하나 에녹이 내 앞에 오게 되는 일이 있다면, 그 뒤에는 너희의 시체가 있어야 할 것이다.”
황제의 명을 따라야겠지.
드웨인은 가만히 제 손에 들린 검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에녹에게 맞서는 부하들을 바라보았다.
“명예롭게 죽어라.”
죽음을 강요하는 주인을 목숨 바쳐 지켜내고,
“에녹의 신념은 절대 무고한 피를 바라지 않으니―”
오히려 자신을 살리려는 적과 맞서 싸워야 하는 것.
이 처절하리만치 모순적인 상황 앞에서 드웨인은 웃고 말았다.
“전원!!!”
이내 그가 소리쳤다.
몇몇 기사들이 주춤하며 드웨인을 돌아보았다.
“검을 버리고 투항하라!”
생각지도 못한 상관의 명령에 모두 놀라 멈추었다. 그것은 에녹과 막 검을 맞대고 있던 기사도 마찬가지.
전부 숨을 삼킨 채 드웨인을 바라보았다.
챙―!
드웨인이 검을 바닥에 내던지는 행동으로 투항의 의지를 내보였다.
그리고는, 천천히 몸을 틀어 막고 서 있던 통로를 열었다.
황제가 있는 대전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가시오, 에녹 루빈슈타인.”
순식간에 고요해진 사위.
황궁 안에서, 목숨 바쳐 황제를 지켜야 할 황실 기사단장이, 대놓고 황명에 불복하다니.
충격적인 상황에 기사들 사이에는 웅성거리는 소란이 일기 시작했다.
“…….”
길을 터 준 드웨인을 지그시 응시하던 에녹이, 만신창이가 된 몸을 끌며 천천히 걸음을 떼었다.
그 누구도 막지 않았다.
에녹이 황제에게 향하는 길로 발을 들여놓는 그 순간까지도.
황명 불복.
에녹은, 드웨인이 죽음을 각오하고 자신을 보내 준 것을 알았다.
“고맙소.”
지나치는 순간 에녹이 내뱉은 인사에, 드웨인은 웃었다.
“고마워할 것 없소. 어차피 우리는 당신을 막지 못할 것이고, 그렇다면 황제에게 죽게 될 테니.”
다만, 정말로 이 사내가, 프리메라에게 승리하는 기적과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오히려,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목숨이 아까운 사람인지라, 그나마 살 수도 있을 선택을 했을 뿐이오.”
“…….”
“…성공하시오. 건투를 빌겠소.”
그 말을 끝으로, 에녹은 전진했다.
* * *
마탑.
오스카는 이동 마법진을 그리고 있었다.
“대전 복도 오른편에 있는 독대실에다 좌표 찍는다. 어차피 지금이면 이미 난리 나서 아무도 없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남들 눈에 안 띄게 능력 쓰고 가고.”
“세상에! 스승님, 거기 가 봤어요? 어떻게 황궁 구조를 그렇게 자세히 알고 좌표를 찍어요?”
눈이 휘둥그레진 리리스를 보며 오스카가 인상을 찌푸렸다.
“뭐래. 황궁 비밀 통로부터 대피소까지 적나라하게 그려진 구조도 네 아빠가 한참 전에 빼돌려서 나한테 갖다 줬는데?”
“헐! 와, 아빠…. 나한테는 아무 말도 안 해 주고! 맨날 놀기만 해서 사업 준비 하나도 안 한 줄 알았네! 그런 건 언제 빼돌렸대요?”
“이런 거 미리 알려 주면 네가 혹시 나댈까 봐 말 안 한 거겠지. 봐, 지금도 나대려고 하잖아?”
“…….”
슬그머니 입을 다무는 리리스를 보며 오스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진짜 꼭 가야겠냐? 남자 친구 못 믿어?”
“체시어는 믿죠. 제임스 씨를 못 믿는 거예요. 괴물이니까….”
…그래.
아이의 말은 일리가 있다.
최후의 순간에 서로에게 검을 맞댈 에녹과 체시어.
회귀하기 전, 오스카는 그 싸움을 직접 지켜보았었다.
‘어쨌든 체시어 그 녀석이 제압에 성공하긴 했었지만.’
딱, 한 끗 차이였다.
에녹은 저를 상대할 체시어를 위해 일부러 치명상을 입은 상태였다. 그럼에도 당황스러울 만큼 엄청난 저력이었고….
그런 에녹을 죽이지 않고 제압해 낸 체시어의 능력도, 당시에는 황당하게 느껴졌었다.
그야말로 괴물들의 전투였달까.
‘그때처럼 성공하리라는 보장은 없지.’
많은 것이 달라졌다.
그렇기에, 가장 큰 변수는 최후의 싸움에서 체시어가 에녹을 제압하는 데에 성공하느냐―하는 것.
제압하기 힘들다는 판단이 들면, 체시어는 에녹을 죽이는 선택을 할 것이다.
‘그랬다간 큰일 나.’
에녹은 살아야 한다. 무조건.
그렇지 않으면….
‘이 기집애는 또, 자기 목숨으로 아빠 살린다고 할 테니까.’
아빠 대신 죽겠다고 엉엉 우는 그 꼴을 두 번 보고 싶지는 않았다.
죽은 사람을 되살리려 몇백 년의 생명력을 쓰는 것보다는, 애초에 죽지 않게 하는 것이 이득이었다.
체시어가 압도적으로 상황을 끝내 아예 수명을 태울 필요도 없다면 더욱 좋고.
하지만, 그 어느 것 하나 확신할 수 없는 지금.
혹시나 하는 상황을 해결하러 직접 숨어들겠다는 리리스의 판단은 어느 모로 보나 최선이긴 했다.
‘하, 그래도 이게 맞는 거냐….’
오스카가 괴로운 표정으로 입술을 짓씹었다. 하얀 분필을 쥔 손의 움직임이 문득문득 멎었다.
* * *
황실, 대전(大殿).
에녹은 쥐죽은 듯 고요한 복도를 성큼성큼 가로질렀다.
피를 많이 흘렸지만 정신은 또렷했다. 남들에게는 치명상일 부상에도 검을 휘두를 여력은 차고 넘쳤다.
자신을 상대하게 될 체시어를 위해 최대한 육체를 망가뜨리고 힘을 소모하려 했는데도….
마지막 난관이 될 자신의 지치지 않는 몸뚱이가, 그는 새삼스럽게도 저주스러웠다.
하지만.
더는 물러설 수도, 지체할 시간도 없었다.
길의 끝에,
굳게 닫힌 요새의 문.
쉬익―!
주저 없이 검기를 날리자 화려한 금문이 반으로 갈라져 무너져내렸다.
에녹은 그 안을 훑어보았다.
재빨리 달려와 상황을 알렸는지, 엎드려 벌벌 떨다가 번뜩 고개를 드는 황제의 보좌관….
그리고,
정신을 지배당해, 황제를 위하여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하는 친위대 다섯….
그 가운데.
이 순간, 그토록 마주하길 고대하였던 악마, 니콜라스 폰 파빌리온이 있었다.
에녹은 천천히 걸었다.
그리고 황제의 얼굴이, 그 표정이 보이는 거리에서 멈춰 섰다.
“…….”
“…….”
가만히 에녹을 응시하던 황제가 웃음을 터뜨렸다.
“에녹 루빈슈타인.”
이내 매섭게 굳힌 표정으로 내뱉은, 서릿발 같은 음성.
“네놈이 기어코, 내 성을 함락하러 왔는가.”
아빠가 힘을 숨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