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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힘을 숨김-248화 (249/261)

248화

“…….”

침묵하는 에녹을 보며 니콜라스가 분노했다.

“이리 시끄럽게 쳐들어왔으니… 버러지들의 목숨을 두고 내게 감히 협상을 바라지는 못할 테고.”

“협상?”

에녹이 피식 웃었다.

그러다 표정을 굳히고 니콜라스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나는 오늘 네놈의 수급을 이 성의 꼭대기에 걸고, 그 피로 더러워진 땅을 씻어낼 것이다.”

“…….”

“히이익!”

부복해 있던 보좌관, 라몬이 놀라 엉금엉금 기어 뒤로 숨어들었다.

침묵하며 대치하는 황제와 에녹.

“하하하….”

고요하게 얼어붙었던 사위에 니콜라스의 웃음이 흘렀다.

에녹이 이토록 짧은 시간에 제 앞에 올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대비할 새도 없이, 고작 10분 전에, 에녹이 황실 기사들을 상대하고 있음을 보좌관에게 전해 들었을 뿐.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에녹, 살려 달라 울부짖는 처절한 비명들이 들리지 않는 것인가?”

니콜라스가 한 발짝 앞으로 다가오며 대전의 널찍한 창을 가리켰다.

“네놈이 그렇게 사랑해 마지않던 버러지들이 다 죽어가고 있는데도 그걸 무시해?”

“…….”

“눈앞에서 죽지 않는다고 감흥이 없는가? 응?”

니콜라스가 뻗은 팔을 크게 한 번 휘둘렀다.

동시에,

밝은 하늘 위에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거대하고 시뻘건 불덩어리였다.

콰과광―!

이내 굉음과 함께, 공격이 땅 위로 추락했다.

멀리 보이는 곳은 평민들의 터전이었다. 저곳에는 황제가 제 손으로 직접 보낸 방비군들도 있을 터인데….

“하하하하!”

“…….”

이를 악문 채 눈을 찌푸린 에녹의 표정을 보며 니콜라스가 웃었다.

“더 하길 원하나?”

“뭘 묻지?”

그러나 금방이라도 꼬리를 내리고 선처를 구할 줄 알았던 에녹은 냉정했다.

“하던 대로 해. 항상 그래왔듯이. 그렇게 아끼는 능력을 죽이고, 파괴하는 데에만 써 왔으니 어려울 것 없잖아. 손수 제 생명을 태운다는데 말릴 필요 없지.”

에녹답지 않은 반응에, 니콜라스의 웃음이 서서히 멎었다.

* * *

제도, 평민 거주 지역.

황제의 방비군들이 곳곳에 시체로 널브러져 있는 아비규환.

대부분 수습된 상황에, 허공에서 거대한 불덩이가 생겨났다. 모두 놀라 비명 지르고 울부짖었다.

“전원!”

그 가운데, 성법사단장 율리안과,

“실드를 전개하십시오!”

수십 명의 고위 능력자, 마탑의 연구원들이 있었다.

이내 푸른색의 실드가 거주 지역 전역을 아우르며 단단하고 완벽한 결계를 만들어 냈다.

콰과광―!

잔인한 지배자의 불이 굉음과 함께 허공에서 하릴없이 스러졌다.

* * *

“무엇이 네놈의 신념을 저버리게 했을까?”

니콜라스는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에녹을 도발했다.

“여기까지 오면서 대체 몇 명을 죽였나? 네 앞을 막던 디에즈들이 살려 달라 빌지는 않던가? 아니, 비명 한번 내지르지 못하고 죽었나?”

“…….”

“나의 불쌍한 기사들은 어떻게 됐지? 그저 침입자를 막으려 했을 뿐인 충심 가득한 이들을, 가차 없이 베고 넘어왔나?”

니콜라스가 팔에 돋아난 소름을 쓰는 시늉을 했다.

“잔인하군, 에녹. 지옥에서 네놈을 원망하는 목소리들이 들리지 않는 모양이야.”

“혓바닥이 길어지는 걸 보니 내가 무섭긴 한가 보군. 도발하려는 꼴이 꼭, 밟힐까 봐 벌벌 떨고 있는 벌레 같은데.”

에녹의 말에, 니콜라스의 얼굴이 대번에 굳었다.

쉬익―!

틈 없이, 에녹이 검을 휘둘렀다.

날카롭게 뻗어 나간 푸른 검기는 황제를 감싼 성법사의 실드에 가로막혔다.

“왜….”

“…….”

“잃을 게 하나도 없는 사람처럼 구는 거지, 에녹?”

니콜라스는 마탑에 억류되어 있을 에녹의 딸을 떠올렸다.

“딸은 무사한가? 언제나처럼, 잘 다녀오라고 아버지에게 인사해 주던가?”

“…….”

“지금 당장 딸의 안위부터 확인해 봐야 하지 않겠어?”

“그래, 네놈의 목을 따고 난 뒤에 가도록 하지.”

“하!”

니콜라스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에녹의 딸을 건드리기에는 손해 보는 점이 많아, 그저 마탑에 인질로 억류해 놓고 협박할 생각이었는데….

‘역시, 눈앞에서 딸X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여 줄 수밖에 없나.’

니콜라스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능력자에게 능력을 쓸 때, 프리메라인 그는 생명력이 소모된 후의 제 모습을 상상한다.

‘……?’

순간, 상상하던 니콜라스의 눈이 번뜩 뜨였다.

‘뭐지?’

일순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제 모습.

성성한 백발과 굽은 등, 주름이 가득한 죽음 직전의 노인이 그려졌다.

‘왜?’

당황스러웠다.

고작 옥타바를 끌어오는 데에 왜 이리 많은 생명력이 든단 말인가?

남은 수명을 거의 전부 끌어다 써야 하는 수준이었다.

꼭, 도스…….

아니, 웬만한 도스보다 더 많은 생명력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에녹의 딸은 분명 옥타바였다. 아이에게 능력을 써 본 적은 일전에도 있었으니까.

하위 계급의 능력자에게, 꼭 고위 능력자를 다룰 때만큼의 생명력을 소모하게 만드는….

‘설마?’

이런 듣도 보도 못한 장난질을 칠 수 있는 놈은, 제국에 딱 한 명.

“예, 폐하. 당연히, 시키는 대로 해야죠.”

“아이도 넘겨주시고, 지금껏 불손하게 굴었던 점도 잊어 주신다는데 저로서는 수지맞은 장사입니다.”

마탑주, 오스카 마뉘엘뿐이었다.

“이이…, 박쥐 같은 놈이!!!”

순간, 니콜라스가 평정을 잃고서 분노를 터뜨렸다.

‘내가 아이의 목숨을 위협할까 봐 수작을 부려두었나?’

이를 갈던 니콜라스가 어째선지 비웃듯 올라간 에녹의 입술을 발견했다. 마치 당황하는 자신을 꿰뚫어 본 듯한 표정.

이내 깨달은 니콜라스가 놀라서 온몸을 벌벌 떨기 시작했다.

‘설마…? 에녹 저놈이, 마탑주를 언제… 대체 언제 제 편으로 끌어들였단 말인가…?’

오스카 마뉘엘은 쉬이 포섭할 수 없는 권력자였다.

만일을 위해 이쪽저쪽으로 기우는 권력의 추에 편승하지 않고, 철저히 제 이득과 안위를 위해 움직이는 자.

그런 그가, 대체 왜 에녹의 편에 섰단 말인가?

무엇을 믿고?

“폐, 폐하…. 그, 그냥 다, 당장은 몸을 피하시는 것이….”

“시끄러워!!!”

보좌관, 라몬이 뒤에서 벌벌 떨며 속삭이는 목소리에 니콜라스가 분노하며 소리쳤다.

오스카가 에녹을 돕는다면….

“네놈이 바라는 것이 황좌냐?”

핏발 선 눈으로, 니콜라스가 제 뒤의 금색 황좌를 턱짓했다.

“감히, 이 프리메라의 은혜로 그 능력을 부리고 있는 주제에, 황좌를 넘봐?”

“내가 바라는 것은.”

에녹이 무심하게 말했다.

“네놈의 수급뿐이다.”

“이이…, 빌어 처먹을 놈이….”

형용할 수 없는 분노가 끓어올라 가슴을 태우는 듯했다. 니콜라스는 이를 갈며 거칠어진 숨을 골랐다.

제 옆에 있는 친위대 다섯.

이들로는 에녹을 막을 수 없다.

그것을 알기에 제 보좌관도 당장 몸을 피하라 한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에녹의 뒤에 마탑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면 이 성이 에녹의 손에 들어가는 순간, 다시 빼앗아오기 어려워진다.

어쩌면… 프리메라가 아닌 일개 능력자가 황좌를 차지하는 초유의 사태가 펼쳐질 수도 있는 것이다.

‘절대 안 돼.’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의 성을, 이 나라를 빼앗겨서는 안 된다.

‘섣불렀다.’

에녹을 상대할 자신의 검, 체시어 리브르는 이솔렘 왕국 정복을 위해 떠나버린 후였다.

그가 돌아와 자신에게 바칠 위대한 정복왕의 이름을, 에녹 루빈슈타인에게 하릴없이 넘길 수는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기필코 저놈을 막아라. 죽지 않도록 엄호하겠다.”

니콜라스가 친위대에게 명령했다.

그때.

‘……?’

에녹의 뒤로, 무너진 문 너머.

복도를 가로질러 다가오고 있는 누군가의 인영이 보였다.

‘아.’

체시어 리브르.

자신의 검이, 돌아왔다.

“하하하! 하하하하!”

니콜라스가 팔을 들어, 에녹에게 덤비려는 친위대들의 움직임을 저지했다.

“에녹.”

그는 기괴하게 웃으며, 조롱하듯 고개를 기울였다.

“이를 어쩌지. 신께서 아직, 나를 버리지 않은 모양이야.”

바로 뒤까지 다가온 체시어가 검을 뽑았다. 그 살벌한 기척에 에녹이 뒤돌아보았다.

허공에서 마주친 둘의 시선.

그러나,

당장 대적할 태세를 취하리라 생각했던 에녹은 태연하게 체시어를 바라보다 다시 황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무슨….’

묘한 불길함을 감지한 니콜라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윽고, 체시어가 에녹의 옆에 가만 섰다.

잠시간의 정적.

그 의심스러운 고요함을 가르고, 체시어가 두르고 있던 붉은 망토를 벗어 바닥에 떨어뜨렸다.

도스, 마검사의 상징.

또한, 황제에게 복종하는 능력자의 상징이기도 한 붉은색의 망토가,

“…….”

체시어의 군화 아래 지그시 짓밟혔다.

“아….”

그 반역적인 행동을 본 순간.

니콜라스는 찰나에 느꼈던 어떤 불길함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깨달았다.

“하, 하하….”

이내 핏발 선 눈이 한계까지 치떠졌다. 미쳐버린 듯한 웃음이 대전을 메웠다.

“하하하하! 하하하하하!!!”

아빠가 힘을 숨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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