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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힘을 숨김-249화 (250/261)

249화

모두 침묵했다.

넓은 대전에는, 황제의 웃음소리만 가득할 뿐.

보좌관, 라몬은 그 웃음이 매우 절망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체시어 리브르…….

황제가 자신의 검이라고 믿고 있던 자가, 눈앞에서 행동으로 배신을 표했으므로.

체시어가 홀로 당당히 여기까지 쳐들어왔다는 것은 곧, 그가 데리고 떠난 수많은 제국군 또한 의미 없는 전력임을 뜻했다.

“이럴 수가….”

니콜라스가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그의 입가에는 여전히 웃음기가 어려 있었지만, 여유로운 모습은 결코 아니었다.

그저 초연한 웃음이었다.

선택지가 없는 막다른 길에 다다라버린, 그런 초연함.

“무엇이 너를 이리 만들었을까?”

“…….”

고개를 기울인 니콜라스가 체시어에게 물었다.

“대체 무엇이, 감히 네 주인에게 이빨을 드러내게 했지?”

“…….”

“에녹 저놈의 알량한 신념이냐? 아니면, 네가 직접 정복왕으로서 내 황좌에 오르고 싶은 욕심이냐?”

한 발짝 다가선 니콜라스가, 두 사내를 쳐다보며 또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하….”

허공을 향해 고개를 젖힌 그의 입술 새로 한숨 같은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나는 프리메라이며, 이 제국의 신이다. 내가 너희를 능력자로 새로이 태어나게 했고, 또한 이 굳건한 성의 꼭대기에서 숨 쉴 수 있게 했다.”

그러한데, 감히.

“네놈들이 나를 밟고 설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느냐? 내 힘으로 태어난 나의 부속물 주제에?”

쉬익―!

에녹을 뒤로 보내고 앞으로 나선 체시어가 새카만 검기를 흩뿌렸다.

검기는 니콜라스가 직접 전개한 푸른 결계에 막혀 흔적도 없이 소멸했다.

“주인도 몰라보는 건방진 개새끼구나.”

체시어는 무심한 표정으로 니콜라스를 향해 전진했다.

세 명의 친위대 검사들이 재빨리 달려들어 그의 머리 위로 검을 내리쳤다.

챙―!

쏟아지는 검날을 한 획에 막아낸 체시어가 허공으로 검기를 쏘았다.

쾅, 쾅, 쾅―!

공격과 함께 일어난 거센 풍압에 세 명의 검사는 각각 대전의 벽으로 날아가 처박혔다.

“허…, 허어.”

지켜보고 있던 보좌관, 라몬은 그 황당한 저력에 하릴없이 신음했다.

황제의 친위대는 감히 저 사내의 발끝에 미칠 실력도 못 되었다.

막을 방도가 없었다.

그럼에도 황제는 제 앞까지 다가오는 체시어를 그저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을 뿐.

챙―!

황제의 머리 위로 내리쳐진 체시어의 검이 실드에 막혔다.

결계를 뚫어내려 힘을 주는 체시어와 니콜라스의 눈이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맞물렸다.

“네게 이 힘을 허락한 것이 누구냐?”

“…….”

“바로 나다.”

콰광―!

친위대 법사들의 공격이 체시어가 있던 자리로 퍼부어졌다.

그러나 묘하게도, 체시어는 찰나에 지척으로 물러나 있었다.

‘뭐가 저렇게 빠르지?’

숨죽이고 있던 라몬이 믿기지 않는 듯 제 눈을 벅벅 비볐다.

두 다리로 피했다기에는, 꼭 순간 이동이라도 한 듯 마법 같은 움직임이었다.

찰나에 그 묘함을 느낀 황제의 눈도 가늘어졌다.

“…글쎄. 언제까지 착각하고 있을 거지?”

체시어가 오롯이 니콜라스를 응시하며 물었다.

자신에게 이 힘을 허락한 것….

이 제국의 모든 능력자는 프리메라에게서 만들어졌으나, 딱 한 명.

체시어만은 아니었다.

눈을 감았다 뜨면 세상은 느릿해졌고 시간의 밀도는 그가 바라는 대로 뒤틀렸다.

프리메라에게 능력을 허락받기 훨씬 전부터, 그는 ‘능력자’였다.

“…….”

니콜라스는 다시금 다가오는 체시어를 바라보았다.

도망치면 황좌를 빼앗긴다.

자신에게는 무엇도 남지 않는 것과 같다.

그것은 곧, 죽음보다 두려운 끝.

그렇다면 막다른 길에서, 괘씸한 반역자들을 응징하기 위해 골라야 할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네놈이 기어코, 내 손으로 목줄을 채우게 하는구나.”

심각한 부상을 입은 에녹보다는, 체시어를 조종하는 것이 현명할 터.

도스를 지배하려 태워야 할 생명력이 끔찍이 아까웠다. 아쉬움을 삼키며 니콜라스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

그러나, 또.

능력을 쓰며 변할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던 니콜라스는 놀랐다.

이번에는 에녹의 딸을 데려오려던 때와 달리 제 모습에 변함이 없었다.

여전히 정정한 모습…….

‘왜?’

재빨리 눈을 부릅뜨고 체시어를 세뇌하려 했지만,

“대체 언제까지 착각할 셈이냐고 묻지 않았나.”

들지 않았다.

프리메라의 정신 지배를 받지 않는 것은 성력이 없는 ‘비능력자’뿐.

체시어 리브르는 분명 능력자일 터인데, 왜….

“아.”

순간 깨달은 니콜라스가 탄성을 터뜨렸다.

성력이 없는 ‘능력자’라….

놀라웠다.

이 순간 니콜라스는 체시어가, 마치 프리메라를 제거하기 위해 신이 내린 존재처럼 느껴졌다.

“…괴물이었구나.”

그가 힘없이 자조했다.

* * *

마탑.

몸보다 훨씬 큰 로브 한 장만 입혀 놨더니, 목 부근이 쭉 내려와 하얀 어깨가 드러났다.

“어휴, 진짜.”

오스카가 쯧쯧 혀를 차며 아이의 로브를 추슬러 줬다.

“난 너처럼 숨어서 못 들어가니까, 무슨 일 생기면 불러. 이거, 파란색 깨면 바로 갈게.”

리리스를 위해 만들었던 조개 모양 마도구 두 개를 건네며 오스카가 말했다.

“그리고 무사히 끝나도 나한테 알려 줘. 분홍색 깨서.”

“네!”

“…….”

오스카는 힘차게 답하는 리리스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진짜 네 아빠 세뇌 푸는 데 그것밖에 안 들어? 어차피 나는 알 도리 없으니까 거짓말하는 거 아니고?”

“네, 진짜예요. 신님이 착한 일 많이 하니까 선물 준 거예요. 원래 훨씬 많이 들었는데 점점 줄었으니까.”

없는 소리를 하는 건 아닐 테지.

애초에 힘의 섭리를 이겨낼 수 없을 어린 프리메라가, 황제의 능력을 뚫겠다는 것부터 말이 안 되었으니.

하지만 그것을 가능케 한, 아이의 심장 속에 박힌 성물이라든가….

지금 이 순간을 오게 만든 모든 우연 속에는, 얼룩져버린 자신의 힘을 거두어가고자 하는 신의 안배가 있었을 테다.

“한번… 안아 보자.”

“…….”

갑자기 팔을 여는 오스카를 보며 아이가 동그래진 눈을 깜박였다.

“음.”

묘한 분위기에 입술을 삐죽이며 머리를 긁적이던 리리스가, 타박타박 다가와 가만히 품에 안겼다.

“스승님, 아무 데도 가지 말고 여기 꼭 기다리고 있어야 해요?”

어리광부리듯 가슴팍에 제 얼굴을 비비적거리며 말하는 아이.

오스카는 대답을 피했다.

“갔다 오면 어른 되겠네.”

“어른까진 아닌데…. 아! 전에 제가 잠깐 갔다 왔던 세계에서는요, 스무 살을 어른으로 쳐 줬거든요.”

“되도록 쓰지 마.”

“그럴게요. 저도 조금 더 어린애로 있고 싶어요.”

몰래 한숨을 내쉰 오스카가 품 안에서 리리스를 떼어내고 마법진 앞에 무릎 꿇었다.

“늦겠다. 준비해.”

“네!”

긴장한 표정으로 대답한 리리스의 모습이 지워졌다. 그러자 로브만 둥둥 떠 있게 되었다.

“아오, 멍청아! 옷까지 같이!”

“아악, 맞다!”

허둥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곧 아이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무슨 일 있으면, 나 꼭 불러.”

“네, 그럴게요!”

밝은 목소리에 픽 웃은 오스카가 바닥을 짚고 마나를 흘려 넣었다.

그러자, 푸른 빛이 스미며 천천히 마법진이 지워졌다.

“…….”

조금 전까지 리리스가 서 있었을 자리. 그 위로, 남자의 손이 아쉬운 듯 오랜 시간 맴돌았다.

어차피 승리하는 결말이 정해진 싸움이었다. 아이가 자신을 부를 일은 생기지 않겠지.

그러니, 조금 전.

그것이 서로의 마지막이었다.

“…안녕.”

그가 서글프게 웃으며 인사했다.

* * *

친위대 다섯은 전부 치명상을 입고 쓰러져 있었다.

죽을 때까지 황제를 위해 싸워야 하는 그들이지만, 전투 불능 상태가 되었는데도 육체의 한계를 무시하고 일어날 수는 없었다.

니콜라스는 친위대 전부를 ‘살린 채’ 제압한 체시어를 지켜보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프리메라의 목만 베어내면 세뇌를 풀 수 있을 테니, 살려 둔 것이다.

아아,

이 얼마나 오만한 자비인가.

챙―!

또다시 체시어의 검이 황제의 머리 위로 쇄도했다.

실드 한 겹을 사이에 두고 둘은 지독한 힘겨루기를 이어갔다.

“언제부터였지?”

황제가 물었다.

“언제부터, 나를 헤집을 발톱을 갈고 있었느냐?”

체시어가 보란 듯 비웃었다.

“네놈이 나를 능력자로 다시 태어나게 했다는, 오만한 착각을 했을 때부터.”

“…….”

프리메라가 능력자를 탄생시키는, 저에게 머리를 조아릴 어린 종들을 만들어 내는, 제국 양성소.

“으하하하하!”

니콜라스는 만났던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체시어를 떠올리며 미친 사람처럼 웃었다.

“대단하구나!!!”

한계까지 치뜬 그의 눈에 핏발이 어렸다.

“정말, 정말 대단해! 그때부터 내 심장에 칼을 박아 넣기 위해 살고 있었다니!”

에녹의 신념을 닮지 않은 것처럼 굴었던 모습.

아주 짧은 목줄로도 다룰 수 있는 개처럼, 감정적이었던 눈.

순순하게 조아리던 고개.

그 모든 것들이 전부, 자신을 베기 위해 날카롭게 갈고 있던 검이었다니.

“정말, 대단해….”

니콜라스는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전율했다.

“…….”

“…….”

이내 둘의 사이에, 매서운 고요가 스며들었다.

동시에.

“……!”

체시어의 눈이 커졌다.

순식간에, 황제의 얼굴이 변하고 있었다.

눈부신 금발이 하얗게 세었고, 젊고 아름다웠던 얼굴에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주름이 피었다.

곧았던 등이 굽으며,

“컥! 크으….”

한계까지 생명력을 끌어다 쓴 지친 육체가 마른기침을 내뱉었다.

‘드디어.’

재빨리 검을 세운 체시어가 뒤돌았다.

쉬―익!

동시에 매섭게 날아오는, 푸른색의 검기.

쾅―!

찰나에 막아냈음에도 체시어는 그 파괴적인 공격에 하릴없이 날아가 벽으로 처박혔다.

부서진 벽의 잔해에서 피어올라, 시야를 가린 연기.

“…….”

체시어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피 섞인 침을 뱉어냈다.

서서히 가라앉는 연기 너머―

오롯이 선 에녹이 보였다.

황제를 지키듯이 막아선, 그의 초점 없는 눈.

비로소 시작된,

최후의 싸움이었다.

아빠가 힘을 숨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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