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화
잠시간의 정적이 흐르고―
서로를 응시하던 에녹과 체시어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검을 털어 날 위에 마나를 입혔다.
검사들이 서로의 실드를 무시하고 싸우기 위해 가장 먼저 취하는 행동.
예상했던 대로, 에녹은 황제에게 세뇌당했지만 지극히 본능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해내야 해.’
체시어는 가만, 눈을 감았다 떴다.
붉은 동공에 비치는 세상이 느려졌다.
살의가 형형한 눈으로, 에녹이 검을 든 팔을 느릿하게 휘두른다.
뻗어 나오는 푸른 검기.
그러나 그 검기만은,
모든 것이 느려진 세상에서 유일하게 빠르고도 날카로웠다.
쾅―!
검을 들어서 막아내는 순간,
‘역시.’
저릿하게 전율하는 팔의 떨림을 느끼며 체시어는 실소했다.
수십, 수백 번의 대련 속에서도 결코 에녹이 보여주지 않았던 저력이었다.
* * *
한 달 전.
“이번에는 눈을 뜨고 싸워 봐.”
전쟁 준비를 앞두고 에녹과 검을 맞댔던 마지막 대련일.
‘눈을 뜨고 싸우라’는 에녹의 말은, 체시어에게만 있는 능력을 개방하라는 뜻이었다.
그러니까 시간의 밀도를 조절할 수 있는 눈.
눈을 뜨면 시간은 느릿하게 흘러가며 모든 공격은 천천히 다가온다.
이는 분명 필승의 비기였으나….
쉬익―!
“어떠냐? 전보다 좀 느려졌어?”
단 하나, 에녹이 던지는 검기에는 들지 않았다.
검사마다 검기의 속도와 공격력, 공격 범위는 제각각.
그리고 안타깝게도 에녹의 검기는, 최대한 묵직하게 만든 시간의 밀도마저 뚫고 들어왔다.
“…….”
어두워진 낯빛으로 고개를 젓는 체시어를 보며, 에녹이 옆에 다가와 털썩 주저앉았다.
둘은 말없이 한참 침묵했다.
“…체시어.”
“예.”
“난 너와 대련할 때 항상 최선을 다해 왔지만, 그게 내 최대의 전력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에녹은 제 손바닥을 쫙 펼쳐 내려 보며 덧붙였다.
“지금은 아마 본능적으로 몸이… 널 죽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싸울 테니까.”
“…….”
“하지만, 황제에게 세뇌된 이후의 나는 다르겠지. 오로지 너를 죽여야 한다는 본능으로만 움직일 거다. 그럼 나조차도 몰랐던 저력이 나올 테고.”
“…….”
“상대하기 힘들다는 판단이 서면, 가장 먼저, 내가 검을 들지 못하게 양팔을 노려서 베어라. 그러면 제압하기 쉬울 거야.”
체시어는 대답하지 않고 입술을 짓씹었다.
그렇게 된다면 에녹은 회복하기 힘들 것이다. 너무나도 강한 능력자이기에, 되돌리려면 리리스의 능력으로도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함을 알고 있다.
“너는 성물을 가지고 싸우겠지만, 사실 그건 너와 나를 동일 선상에 놓아줄 수만 있을 뿐이야.”
성물, 심판자의 검.
상대의 공격을 막아내면, 검은 그 공격에 담긴 마나를 흡수해 사용자에게 전달한다.
같은 도스이지만 현저한 마나량의 차이. 그러나, 그 선천적인 격차를 메워 줄 검.
하지만….
“공작님은 지치지 않으시겠죠.”
“…아마도.”
에녹의 말마따나, 성물은 그저 둘을 동등하게 싸울 수 있도록 해 줄 뿐.
수백, 수천 번의 검기를 날리게 해도 에녹을 지치게 할 수는 없었다.
“너는 나를 이길 수 없을 거야.”
에녹은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최후의 싸움.
그날의 결과는 체시어의 패배로 기울어졌다는 것을.
‘실패했던 시간’과 달리 에녹에게는 지켜야 할 딸이 있었고, 딸을 위해 강해지겠다는 기도는 그를 매 순간 성장하게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길 수 없을 거야.
하지만,
“…이겨야 해, 체시어.”
이겨야 해.
체시어에게는, 에녹이 못내 감춘 말이 선명히 들렸다.
이겨야 해, 체시어.
…나를, 죽이는 한이 있어도.
* * *
쾅, 쾅, 쾅―!
에녹의 검기가, 한순간의 공백도 없이 연이어 날아갔다.
그의 저력을 눈앞에서 보고 있는 황제의 보좌관, 라몬은 두려움에 벌벌 떨었다.
‘사람 맞아…?’
괜히 제국 최고의 능력자라 일컬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체시어라도 에녹을 이길 수는 없을 듯한데….
‘저, 저건 또 뭐란 말이야?’
틈 없이 퍼부어지는 공격에 절대 거리를 좁히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체시어는.
쾅, 쾅, 쾅―!
에녹의 공격을 피하고, 흘리고, 반은 검으로 막아내며 섬광처럼 접근했다.
믿을 수 없는 움직임.
‘역시, 내 눈이 잘못된 게 아니었어.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움직일 수 있지?’
가히, 초속의 빠르기.
옅은 잔상까지 남기며 신속하게 달려와 쇄도하는 체시어의 검.
챙―!
두 남자의 검이 얽혔다.
지독한 힘겨루기.
이내 몇 번의 합이 오가는 동안 라몬의 입은 서서히 벌어졌다.
상처를 입는 것은 에녹이었다.
체시어의 묘한 움직임은 그 좁은 거리에서도 결코 유효타를 허락하지 않았고, 외려 그의 검이 에녹의 몸 곳곳을 베고 지나갔다.
‘잠깐. 저 미친놈, 저거….’
그 모습을 계속 지켜보던 라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당연히 둘 중 하나가 죽어야 끝이 나는 싸움이라고 생각했건만.
‘설마…? 에녹 루빈슈타인을 안 죽이고 제압하려는 건가?’
전투를 모르는 라몬의 눈에도 아주 선명히 보였다.
상대를 죽이기 위하여 휘둘러지는 에녹의 검과 반대로, 상대에게 최소한의 타격을 넣어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들려는 체시어의 검.
콰과광―!
그 와중에 황제의 친위대, 두 명의 법사들도 공격을 퍼부었지만.
“…….”
그마저도 피해내며, 체시어는 다시 끈질기게 에녹과 거리를 좁혔다.
친위대의 엄호.
거리가 멀어질 때마다 쏟아지는 에녹의 검기.
그 황당하리만치 불리한 상황에서 체시어는,
끊임없이 달려들며.
에녹의 팔다리, 힘줄이 기능하는 부위만을 집요하게 노려 댔다.
전투가 끝났을 때 아무런 장애도 없이 회복할 수 있을 곳들만.
‘파, 팔 하나 날리고 시작해도 모자라겠구먼, 까딱하면 자기가 죽을 판에 저렇게 불리하게 싸워?’
심지어, 혹여나 하는 걱정인지 저는 결코 검기를 쓰지 않는다.
그 어떤 희생도 없이,
오로지 황제의 목만 가져가겠다는 의지였다.
라몬은 침을 꿀꺽 삼키며, 전투를 지켜보는 황제를 힐끔 일별했다.
‘꼬부랑 늙은이가 다 됐구나. 며칠이나 더 살려나….’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는 걸 보면, 황제는 실드 하나 전개할 수 없을 만큼 생명력을 소모한 듯했다.
이제 황제가 가진 것은 세뇌한 전력들뿐이요,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곧 수명이 다해 다가올 죽음뿐.
라몬은 제 주인의 비참한 모습에 이른 애도를 보냈다.
‘참으로 지독한 인간이야….’
자신의 최후를 예상했을 텐데도, 도망치지 않고 에녹을 세뇌한 황제.
죽더라도, 황좌에서.
황제의 관을 뒤집어쓴 지배자로 죽겠다는 의지였다.
화르륵―!
그때,
맞붙어 싸우던 에녹과 체시어의 사이에 푸른 불꽃이 경계를 그리며 피어났다.
‘빌어먹을.’
체시어는 입술을 씹으며 에녹과 거리를 벌렸다.
그는 세뇌당한 에녹의 첫 공격을 막은 순간에 이미, 지금까지 무수히 해 온 대련이 전부 무의미했음을 깨달았다.
에녹도 몰랐던 저력은 실로 놀라웠으니까.
그리고, 리리스의 말처럼.
“아빠는 싸우면서도 강해질 거야.”
이 순간에도 쉴 새 없이 한계를 뚫고 강해지고 있었다.
에녹은 본능적으로 상대의 공격 패턴을 읽어냈고, 이제는 아마 체시어에게만 다르게 흐르는 시간까지 알아챈 듯했다.
불꽃으로 제 주변에 경계를 그려 거리를 벌린 행동…….
그것은 근접전이 에녹 자신에게 불리함을 깨달았기 때문일 테니.
‘내 전력이 읽히기 전에 끝냈어야 했는데.’
체시어는 검을 맞댈수록 시간의 밀도를 뚫고 따라오던 에녹의 움직임을 떠올리며 절망했다.
서로 다르게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겨우 체시어가 우위에 서 있던 격차마저 끊어내며.
“아빠는 강해질 수밖에 없어. 신이, 프리메라가, 무조건 승리하라고 축복한….”
본능적으로 한계를 무시하고 움직이는 에녹의 육체…….
“…이 세계의 영웅이니까.”
쉬익―!
그때, 에녹의 검기가 허공을 향해 쏘아졌다.
쾅!
대전의 천장에 달려 있던 화려한 샹들리에가 떨어져 퇴로를 막았다.
그리고, 순식간에.
눈앞까지 다가온 에녹.
챙!
재빨리 에녹의 검을 막아냈지만, 막혀 버린 퇴로.
“큭.”
체시어를 밀어 넘어뜨리고 위에 올라탄 에녹이, 그의 목 위에 검을 가로로 겨누었다.
가까스로 막아내며 맞붙은 두 검이 체시어의 목 위에 짓눌렸다.
“크, 윽.”
“…….”
또다시, 지독한 힘겨루기.
적의 목을 그대로 뭉개버릴 듯, 검을 쥔 에녹의 손에 엄청난 힘이 실렸다.
체시어는 이를 악물어 버티며 초점 없는 에녹의 눈을 응시했다.
육체의 한계를 극복한 에녹이었으므로, 이제 느릿하게 흐르는 시간은 더 이상 체시어의 편이 아니었다.
“하, 큭.”
압박당하는 목이 고통스러웠다.
“……내가 검을 들지 못하게 양팔을 노려서 베어라.”
사실 에녹을 제압할 기회는 여러 번 있었으나, 체시어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최대한 에녹을 멀쩡하게 살려 놓고 싶었다.
그러나 역시, 그것은 오만이었다.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 닿을 수 없는, 능력의 정점에 서 있는 에녹.
심지어 매 순간 자신의 한계마저 극복하며 강해지고 있었으니까.
“윽. 크으….”
이를 악문 체시어가 검을 쥔 팔에 힘을 주었다. 서서히 에녹이 밀려났다.
그때.
‘아.’
에녹의 검에 푸른 마나가 일렁거렸다.
검기.
이 거리에서 검기를 맞게 되면, 체시어는 즉사였다.
“……?”
그러나.
어쩐지 모였던 마나가 흩어졌고.
체시어는 놀랐다. 그는 에녹의 초점 없는 눈 너머, 한 줌 남은 의지를 발견했다.
아, 당신은 이 순간에도.
세뇌에서 벗어나고자 쉴 새 없이 발악하고 있었구나.
“커헉…!”
그 때문일까. 멀리, 황제가 피를 토하며 비틀거렸다.
일렁이는 에녹의 푸른 눈동자.
‘망설이지 마라, 체시어.’
‘제발, 나를….’
그 안에서, 필사적으로 울부짖는 에녹의 목소리가 들렸다.
“체시어…. 우리 아빠… 죽이지 말고 꼭 살려 줘….”
선택의 기로에서 체시어의 얼굴은 괴롭게 일그러졌다.
“이, 비… 빌어먹을, 놈이….”
비틀거리던 황제가 매섭게 눈을 치켜뜨고 정신을 집중했다.
다시금 눈에서 빛을 잃은 에녹의 검에, 푸른 마나가 모였다.
아빠가 힘을 숨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