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화
체시어에게 주어진 시간은 아주 짧았다.
자신의 죽음. 그리고 황제의 명이 다하기까지 에녹의 손에 바스러질 많은 이의 죽음.
그것을 외면하지 않으려 선택해야 하는 것은,
에녹의 죽음.
‘차라리 당신이 시키는 대로 해야 했을까요.’
은인, 그리고 스승…….
리리스만큼이나 소중했던 에녹을 무사히 살리려고 했던 그 오만이 끝내, 수많은 목숨을 저울질하게 했다.
“나를 죽이지 않으면 네가 죽는다. 하지만 네가 죽지 않고 살아남아야, 모두를 살릴 수 있어. 그러니 체시어 넌, 꼭 살아야 한다.”
“그러니까 절대 망설이지 마라. 만약 나를 제압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두 번 생각하지 마.”
언젠가, 에녹을 죽일 수 있겠냐고 오스카가 물었던 적이 있다.
‘실패한 시간’을 겪어 본 그는 분명, 이런 상황이 오리라 예상했겠지.
그때는 거리낄 것 없이 답했었다.
망설이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나는….’
실제로 그날이 오자, 선택을 강요당하는 순간은 마치 지옥 같았다.
괴로워.
괴롭다.
치뜬 눈에 눈물이 고였다.
이내 체시어의 검에도 마나가 일기 시작했다.
소름 끼치는 죽음의 기운이, 둘 사이에 짙게 맴돌았다.
서로가 서로의 목숨을 손에 쥐고 있는,
‘제발.’
어쩌면, 두 사람 모두 간절하게 기적을 바라고 있을 그 순간.
“크흑!”
“……!”
체시어의 눈이 커졌다.
또다시 에녹의 공격이 사그라진 탓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시 검을 쥐지 못하고 울컥 피를 토하며 제 위로 쓰러졌다.
‘무슨….’
에녹은 움직이지 못했다.
전투 중 쌓인 부상을 억지로 무시하며 각성해 있던 육체가, 긴장이 풀린 한순간에 무너진 것이었다.
‘조금 전, 그 눈.’
체시어는 분명히 보았었다.
에녹이 쓰러지기 전, 찰나에 되돌아왔던 눈빛을.
‘뭐가 어떻게 된….’
체시어가 쓰러진 에녹을 추스르고 급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소름 돋을 만큼 지독하게 내려앉은 고요…….
그 사이에서, 황제와 그의 무리의 시선이 멍하니 한곳을 향해 있었다.
체시어는 그 시선을 따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아.’
숨이 멎는 기분이었다.
무너진 폐허.
그 위에 내린 빛처럼, 눈이 부신 존재가 보였다.
오래전.
지옥 속에 갇혀 있던 그에게, 손을 내밀었던 그 존재가.
“체시어, 데리러 왔어.”
천국의 문.
한낱 미술품 위에 조각되어 있던 천사가 아니라,
“어차피 어디든, 이 지옥보단 나을 거야.”
진실로 나를 구원했던 천사가.
‘리리스.’
어린 천사는, 모두의 앞에서 아름답게 피어났다.
천국의 빛을 심은 듯한 하얀 머리카락은 물결치듯 흘러내렸고, 앳된 얼굴은 서서히 변했다.
한 걸음 내딛자,
천사는 마치 꽃줄기가 솟듯 유려하게 자라났다.
성장하는 리리스를 보며 체시어는 깨달았다.
에녹과 서로의 목숨을 쥔 채 괴로워했던 찰나의 지옥 속에서.
다시 한번, 구원받았음을.
* * *
황제, 프리메라, 모든 능력자들의 어버이.
니콜라스 폰 파빌리온은, 가까워지는 여자를 멍하니 응시했다.
에녹의 딸.
절체절명의 순간에 마치 지상에 강림한 신처럼 나타난 그 모습에, 잠시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그녀는 처참하게 망가진 요새를 넘어, 자신에게로.
천천히, 한 걸음씩.
다가오고 있었다.
“뭐, 무슨…!”
놀란 보좌관의 목소리와 함께, 어떤 불길함을 감지한 성법사가 리리스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날아가던 푸른 불꽃은 닿지도 못한 채 소멸했다.
“컥! 으아아악!”
동시에 성법사가 눈을 뒤집으며 발작했다.
‘세뇌가… 풀렸다.’
그는 오랫동안 자신을 지배하고 있던 세뇌가 끊기자 몹시 괴로워했다.
그 모습을 가만 바라보던 니콜라스는, 다시 천천히, 리리스에게로 눈을 돌렸다.
툭 건드리면 바스러질 듯 연약해 보이기만 하는 몸.
그럼에도 어째서인지….
다가오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제 숨을 옥죄듯 위협적이었다.
친위대 성기사 한 명이 리리스를 향해 달려 나갔다.
1month
“큭! 허억….”
그러나, 하릴없이 그 앞에 무릎 꿇을 뿐.
‘아아.’
니콜라스는 전율했다.
눈앞에서 순식간에 성장했던 그 모습은, 잘못 본 것이 아니었구나.
리리스를 향해 쏟아지던 친위대 마법사의 시커먼 불덩이가 사그라지고,
1month
“으아아악!”
비로소 자유의 괴로움에 내지르는 비명.
능력을 쓰며 다가올수록, 조금씩 자라는 에녹의 딸…….
‘언제부터였지?’
니콜라스는 다가오는 리리스를 보며 가만히 고개를 기울였다.
오직 파빌리온의 핏줄들에게서만 탄생했던 프리메라.
그 위대한 지배자의 존재가 더는 탄생하지 않았을 때, 니콜라스는 신이 이 나라를 버렸다고만 생각했다.
그리고,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마지막 프리메라로서, 이 땅 위에 자신의 이름이나마 짙게 아로새기려 했던 그때부터.
묘하게도 신은,
번번이 패배를 선물했었다.
뒤이어 검을 든 친위대 마검사가 달려 나가는 것이 보였다.
1month
“컥! 으, 으아아아악!”
그러나 끝내 닿지 못한 검을 내던지며, 머리를 쥐고 고통스러워했다.
‘에녹을 이용해서 완성하려 했던 내 위대한 과업이, 왜 갑자기 수포가 되었더라?’
그래, 에녹의 목줄로 쓰려 했던 그의 딸이 옥타바였기 때문이었지.
“…….”
지척까지 다가온 리리스를 보며, 니콜라스가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마지막, 끝까지 자신의 앞을 막아서며 남아 있던 친위대 성기사.
1month
“으아아악! 하아, 하…!”
정신에 묶여 있던 족쇄가 일거에 붕괴하자, 그는 검을 휘둘러 보지도 못한 채 무너졌다.
‘나의 몰락이 시작됐던 결정적인 계기는… 무엇이었지?’
그래, 아주 오랫동안 지상에 닿지 않았던 신의 목소리.
그 계시가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이들을 살리라며 내려왔을 때.
신의 권능은 평민 병자들을 기적처럼 일어나게 했고, 제국 황실의 가장 큰 힘이었던 중앙 신전의 세는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어쩌면 신의 권능이 아닌.
“…네 짓이었구나.”
어느새 자신의 앞까지 다가와 선 리리스를 보며, 니콜라스가 쉬어버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
에녹을 꼭 닮은 얼굴이다.
아무리 뭉개려 해도 꺾이지 않던, 지독하리만치 강렬하게 빛을 내던.
푸른 신념이 스민, 저 눈.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는 항상 느끼고 있었다.
신은, 제게 권능을 내렸던 프리메라는… 절대 짓밟히지 않는 에녹의 신념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끝내 그의 손으로, 힘겹게 이룩한 나의 성을 무너뜨리려 한다는 것을.
그리하여 신은,
그 추악한 배신자는,
자신이 선택한 영웅에게 새로운 신을 선물한 것이었다.
한계까지 끌어다 쓴 생명이 깜빡이며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쿨럭. 컥….”
니콜라스는 흐릿해진 시야에 애써 힘을 줬다.
절대, 이것의 앞에 굴복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신은 니콜라스의 처절한 마지막 기도까지도 외면하려는지, 힘이 풀린 다리가 맥없이 무너졌다.
실로, 비참하게도.
“…….”
리리스의 앞에 무릎 꿇은 니콜라스는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늙고 병들어 버린 자신과 달리, 이제 막 피어난 이 땅의 새로운 신은 젊고 아름다웠다.
무심한 저 표정 너머, 죽음을 앞둔 자신을 조롱하려는 듯, 묘하게 스며 있는 희열…….
분하다.
치욕스럽다.
생의 끝에서, 니콜라스는 자신을 감히 짓밟고 유린한 이 존재를 어떻게든 모욕하고 싶었다.
그러나 서글프게도, 이것의 발치에 침을 뱉을 여력조차 남지 않았다.
“비…….”
결국, 니콜라스는 형용할 수 없는 분노로 몸을 벌벌 떨며, 주름진 입이나마 힘겹게 벌려 중얼거렸다.
“비, 빌…….”
순간, 누군가가 끼어들어 시야가 가려졌다.
체시어 리브르.
형형한 살의를 띤, 반역자의 붉은 눈이 무심하게 자신을 내려다본다.
“큭!”
이윽고 그의 손이, 무릎 꿇은 니콜라스의 머리채를 무자비하게 쥐어 올렸다.
“신하, 체시어 리브르가 위대하신 프리메라의 검이 되기 위하여 왔습니다.”
니콜라스는 끝의 끝에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자신의 검인 줄로만 알았던, 이 더러운 반역자가 지키려던 것은.
괘씸하게도.
나의 모든 것을 빼앗고 이 제국을 지배할, 내 것이었던 화려한 황좌에 옹립할…….
새로운, 신이었음을.
“이, 빌어…….”
체시어의 뒤로 보이는 리리스를 향해, 니콜라스가 다급하게 입술을 움직였다.
그러나 반역자의 검이, 그 매서운 죽음이.
스윽―!
니콜라스의 목을 먼저 베어냈다.
툭…….
무너진 폐허 위에 잘린 목이 처참하게 나뒹굴었다.
빛을 잃어가는 시야에 새하얗게 피어난 프리메라의 얼굴이 담겼다.
‘빌어, 먹을… X…….’
끝내 내뱉지 못한 마지막 모욕은 결국, 새로운 신을 더럽히지 못한 채 영원히 삼켜졌다.
아빠가 힘을 숨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