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화
잘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힘겹게 옮겨 걸어가며 나는 바랐다.
부디 저 편지가, 당신이 남기고 간 마지막 인사는 아니기를.
“…….”
그리고 나의 바람은 처참히 스러졌다.
꾹꾹 눌러 쓴, 익숙한 오스카의 글씨체를 하나하나 눈에 담는 동안 나는 하염없이 울었다.
“야, 약속, 해, 했으면서….”
왜 이렇게 급하게 나를 떠나야만 했을까.
나 때문에 모든 것을 버려야 했고, 죽음보다 절망적인 대가를 감당해야 함에도 편지에는 원망 한 줄 적혀 있지 않았다.
실패했던 시간을 지워내고 다시 거머쥔 성공.
이제 모두에게 찾아올 평화, 또 행복…….
그러나 정작, 끔찍한 실패를 지워내고 새로운 시간을 흐르게 한 이는 결코 행복하지 못할 거라는 사실.
그 사실이 나를 괴롭게 했다.
“아, 흐으. 아아….”
이럴 수는 없었다.
이미 늦었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가 마지막으로 남겼던 마도구를 꺼내 부수며 오열했다.
와 주세요…….
내 눈앞에 나타나 주세요.
약속했잖아요.
“아니, 괜찮아. 괜찮아, 리리스. 할 수 있어…. 나는….”
나는 하릴없이 중얼거리며, 뿌예진 시야를 거칠게 닦아내고 몸을 일으켰다.
그는, 오스카는.
항상 탑 꼭대기에 갇힌 나를 찾아왔었다.
매일매일.
바보처럼 내 이름 하나 알려 주지 못하고, 그의 이름 한번 불러 주지 못하는데도…….
“이, 이제, 내가….”
그러니까 이제는 내가 찾아가야지.
내가, 모든 시간을 잃어버릴 당신에게 유일하게 흐르는 시간이 되어 줘야지.
282years
“아.”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왜…?”
몇 번을 시도해 봐도 달라지지 않는 대가.
“왜, 왜….”
내 눈에 선명하게 새겨진 감당할 수 없는 무게가.
“왜!!!”
꼭 칼로 찌르듯이 고통스러웠다.
“흐, 으, 아아….”
나는 오스카가, 끝내 이 순간, 그를 찾고자 기도할 내 모습까지 예상했음을 깨달았다.
이럴 수는 없어.
정말, 이럴 수는…….
무사히 살아남은 내가 지금 숨을 쉬고 있음이,
결국, 나를 다시 살게 한 사람의 무덤을 밟고 서 있는 이 현실이.
“아아아아악!!!”
미칠 듯이 괴로웠다.
* * *
“에녹!”
귓가를 파고드는 비명 같은 목소리에 서려 있는 안도감.
에녹은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후아, 심장 떨어지게…. 더럽게 오래도 안 일어나네….”
점차 선명해지는 시야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리는 악시온이 보였다.
“에녹, 정신이 드느냐?”
아버지, 노르딕도 옆에 있었다.
에녹의 드문드문한 기억 속, 마지막으로 선명히 남아 있는 장면은 울고 있는 체시어였다.
검을 맞댔었고, 황제에게 세뇌당한 채로 검기를 날리려 했던…….
“체시어!”
“괜찮아!”
에녹이 벌떡 일어나자, 악시온이 그의 어깨를 눌러 다시 눕혔다.
“더 누워 있어. 체시어는 무사해. 지금 바깥일을 수습하는 게 먼저라 여기에 없을 뿐이야. 전부 다, 계획대로 성공했고, 아무 문제도 없다.”
“하, 하아….”
그제야 에녹은 안도했다가.
“공주!”
다시 벌떡 일어났다.
찬찬히 둘러보니, 곁에는 악시온과 노르딕뿐.
당연히 옆에 있어야 할 리리스가 보이지 않자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아, 리리스는… 너 다 회복할 때까지는 옆에 있었다고 하는데….”
“어디 갔어?”
“잠깐만. 들어 보니까 아까….”
“공작니이이임!”
그때, 큼지막한 대야를 들고 방에 들어오던 하녀, 제티가 놀라서 달려왔다.
“몸은 괜찮으세요? 어디 불편한 데는 없으시고요? 지금 자드키엘 사제님이 옆방에서 휴식 중이세요. 공작님 깨어나시고 불편한 데 있으시면 마저 봐 주시….”
“공주는?”
“앗, 아가씨! 아가씨는 어디 급히 가 볼 데가 있으시다고, 아까 옷을 갈아입으러 방에 가셨는데….”
잠깐 생각하는 듯 제티가 고개를 갸웃하던 중에, 뒤이어 쥰도 들어와 놀랐다.
“꺄악! 공작님! 일어나셨어요?!”
“쥰, 아가씨 얼른 데리고 와!”
“어, 언니! 맞아! 아가씨 말인데, 방에 안 계셔….”
“그게 무슨 소리야? 나가시는 것 못 봤는데?”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모두가 놀라 사색이 되었다.
그러자 쥰이 눈치를 보며 말했다.
“아가씨 갈 데 있으시다더니, 혹시 그… 뿅, 하는 마법 같은 거로 어디 가신 게 아닐지…? 이, 이거 여기서 말해도 되는 건가….”
“…….”
쥰의 말에, 에녹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재빨리 침대에서 내려와 카펫을 걷었다. 카펫 아래에는 미리 그려 둔 마법진이 있었다.
“에녹, 뭐 하는 게냐? 아직 네 몸 상태가 움직이기에는 이르다.”
“그래, 아버지 말씀 들어라. 리리스는 내가 찾아 올 테니 더 누워 있어. 너, 보통 사람이면 살아 있는 게 기적일 만큼 다쳤다가….”
말리는 목소리들이 들리지도 않는 모양인지, 에녹은 순식간에 마법진 위에서 사라졌다.
“하아아. 말은 더럽게 안 듣지.”
악시온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 * *
미리 그려 둔 마법진의 좌표에는 오스카의 사택이 찍혀 있었다.
리리스가 누군가에게 급히 가려 했다면 오스카였을 테고, 짐작대로 아이는 그곳에 있었다.
“공주야! 고….”
온 방을 뒤지던 에녹은 침대 아래에서 쓰러진 채 울고 있는 리리스를 발견했다.
“…….”
아이는 자라 있었다.
이제는 어린아이라고 할 수도 없을 만큼, 완연한 성인의 모습으로.
에녹은 그걸 보고서야 깨달았다.
분명, 아무런 희생 없이 성공할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마지막 싸움.
그 전투가 왜, 자신도 체시어도 무사한 채로 끝을 맺을 수 있었는지.
“리리스.”
“아빠….”
다가가자, 리리스는 무사한 에녹의 상태를 살피고는 힘없이 웃었다.
“왜….”
“…….”
발갛게 부은 눈. 여전히 눈에 고인 눈물.
그전까지 얼마나 울었는지 품에 안겨 오는 몸에 힘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왜, 울었어….”
에녹은 축 늘어진 리리스를 안은 채로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이가 한참 손으로 만진 듯한 잠옷 두 벌…….
반으로 쪼개져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오스카의 마도구…….
그리고 눈물에 곳곳이 번진, 편지 한 장.
“어떡해, 아빠…? 스승님이 떠나 버렸어….”
에녹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불길했던 예상대로였다.
하지만, 왜?
모든 것이 끝나도, 오스카는 자유롭지 못할 것을 에녹도 안다.
하지만 금제의 족쇄가 발동하기까지는 아직 3년이라는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도 왜 이토록 급하게 떠나야만 했을까.
“마탑주! 사업 다 끝나면 말이야, 공주 데리고 매일매일 놀러 다니자. 맛있는 것도 먹고.”
“싫은데요.”
“왜?!”
“왜, 는 무슨 왜? 그거 나한테 되게 잔인한 소리란 거 몰라요?”
추억이랄 것을 남길 시간이, 고작 3년뿐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에녹은 끝내 모두를 살린 고마운 이에게, 좋은 기억을 선물하고 싶었다.
“그런 기억 열심히 남겨 놔 봤자 떠올리면 괴롭기만 하지. 당신이야 뭐, 내가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겠구나 하고 애랑 계속 지지고 볶고 행복하게 살겠지만.”
“…….”
“나는 혼자 그 기억을 곱씹으면서 평생, 애를 그리워하는 것밖에 못 해요. 그러니까 싫어.”
“…….”
“조금이라도 덜 괴롭고 싶으니까 이해해 줘요. 애도, 괜히 날 떠올릴 기억이 없었으면 좋겠고.”
그래서였을까.
이렇게 서둘러 떠나버린 것은.
“어떡해, 아빠…. 나도, 나도 못 찾는 곳으로 가 버렸어…. 스승님은 맨날, 나, 나를 보러 왔는데… 나는 바보같이… 스승님을 찾을 수가 없어…. 아무것도 못 해….”
아이는 다시 오열하기 시작했다.
“찾을 수가 없어….”
“아무것도 못 해….”
에녹은 아이가 울며 중얼거린 말을 되새기다가, 이내 무언가를 떠올리고는 허탈한 숨을 터뜨렸다.
“……프리메라의 능력을 피할 수 있게 해 주는 거예요.”
최후의 날, 리리스의 안전을 위해 오스카가 만들었던 마도구.
“자, 한번 해 봐요!”
똑같은 마법이 걸린 팔찌가 오스카에게도 있었다.
그때는 리리스의 안전이 보장되었다는 사실에 마냥 좋아만 했었다.
정말이지,
멍청하게도.
“하, 하하….”
리리스를 안은 채, 에녹은 바보 같은 자신을 원망하며 자조했다.
“있잖아, 아빠…. 내가,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게 너무 마음이 아파….”
“…….”
“만약 스승님을 찾아도, 그래도 나는… 해줄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어…. 멀쩡히 살아가게, 그렇게 할 수가 없어…. 아빠가, 다른 사람들이, 스승님을 잊지 않게도… 그렇게도 못 하고….”
“…….”
“그래서, 같이 있어 달라는 부탁이 너무 이기적인 걸 아니까…. 억지로 스승님 옆에 있으려고 하는 게, 그게, 스승님을 위한 게 아니라 나만 생각하는 거니까….”
두서없이 울먹이는 리리스의 말에 에녹이 괴로운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빠, 나는 스승님 안 잊을 수 있다? 스승님은 안 믿는 것 같지만. 그런데, 나만이야. 나만….”
리리스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오스카에게 걸린 금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모두에게 잊히게 될 오스카.
누군가 존재를 인지하는 순간 손쓸 틈도 없이 그의 목을 조여버릴 족쇄.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 중에 오스카가 있더라도, 에녹은 그를 위해, 그를 알아봐서는 안 됐다.
‘어쩌면… 그래서일까.’
오스카는 살아남기 위해 떠난 것일지도 모른다.
에녹은 품 안의 리리스를 더 꽉 끌어안으며, 옆에 나뒹구는 오스카의 편지를 힘없이 집어 들었다.
[자유다, 리리스 루빈슈타인!
이 편지가 네 손에 무사히 들어갔다는 건 네 아버지가 드디어 밥값을 했다는 뜻이겠지.
솔직히 몇 달 정도 더 남았으면 좋겠다고 바랐는데, 생각해 보니까 내가 참 이기적이었더라고. 네 아버지는 하루라도 빨리 너를 자유롭게 하고 싶을 텐데.
음…….
나는 너랑 달리 부끄러운 말 하는 데에는 소질이 없어서 지금까지 네가 좋아해요, 사랑해요, 할 때마다 그냥 듣기만 했는데, 미안.
잘 알겠지만, 이 스승님의 마음도 너랑 똑같다.
세상 그 누구보다 너를 사랑해.
다시는 내 생에, 너만큼 소중하고 아끼고 사랑할 수 있을 존재는 없을 만큼.
네 아버지가 언젠가 나한테 그랬거든.
네가 자기 세상이고, 전부라고.
태어나서 자라나는 너의 시간을 지켜보면서, 자기 세상이 너로 전부 채워졌다고.
나도 너 때문에 그런 경험을 해 봤어.
같은 자리에서 항상 날 기다리고 있다가, 내가 부르면 웃으면서 돌아보고, 다가와서 안기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주는 것이 아깝지 않고, 잃는 것이 아쉽지 않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처음으로 알게 됐다.
그러니까 괜히 죄책감 갖지 마.
나는, 너를 위해 심장을 꺼냈어도 행복했을 테니까.
마지막으로, 울지 마라.
아빠랑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아.
기억은 내가 할 테니까, 너는 괜히 괴로워하지 말고 잊어.
그럼에도 내가 생각나면….
어딘가에서 잘 살아가고 있다고.
어쩌면 오늘, 네 곁을 스쳐 지나갔던 사람들 중에 있었을지도 모르겠다고, 그렇게 생각해 주라.
……안녕, 잘 있어. 내 사랑.]
아빠가 힘을 숨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