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빠가 힘을 숨김-254화 (255/261)

254화

* * *

원작 <도스의 반란>은 끝이 났다.

하지만, 주인공들과 나의 시간은 계속해서 흐른다.

앞으로도 흐를 것이다.

* * *

자정이 넘은 시각.

많은 생각을 정리한 나는 노트를 펼치고 펜을 잡았다.

이 노트와 펜은 이틀 전, 오스카에게서 받은 생일선물이었다.

“신기하네.”

“뭐가요?”

“계획대로 된다면 내일 황제 놈 목이 잘리는 거 아닌가? 프리메라가 죽은 바로 다음 날이… 새 시대의 프리메라가 태어난 날이라니.”

“앗! 정말 그러네?”

“생일 축하한다. 선물.”

5월 19일.

오늘은, 내 생일이었다.

“우와, 감사합니다! 그런데 왜 벌써 주세요?”

“응, 얼른 받고 공부하라고.”

난 그와의 대화를 떠올리며 잠깐 웃다가 펜을 끼적이기 시작했다.

1786년 5월 19일, 1번째 편지.

안녕하세요, 스승님.

스승님이 공부하라고 선물해 준 노트지만, 전 여기에 편지를 쓰려고 해요.

같이 있진 못해도 항상 스승님을 그리워할 저의 소중한 기록이에요.

오스카가 ‘떠난’ 이유는, 모순적이지만 ‘돌아오기’ 위해서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 잊히고야 마는 형벌.

목소리를 잃어버린 채, 그들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수도 없는….

언젠가 읽었던 동화 <인어공주>의 주인공처럼 비극적인 운명.

그럼에도 사랑하기 때문에,

살을 헤집는 고통을 감내하고 두 다리를 얻어 사랑하는 이를 만나러 왔던 것처럼….

다시 만나는 날에, 스승님은 아마 많이 변해 있겠죠?

모두에게 익숙했던 스승님의 말투, 행동, 버릇…….

스승님이라는 걸 아무도 못 알아보면, 덜 위험할 테니까요.

나는 혼자가 될 오스카의 곁에 계속 남겠다고 했지만, 생각해 보면 그건 결코, 그의 마음이 편한 결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스승님의 마음을 이해해요.

저를 사랑하기 때문에, 제가 다른 모든 사람들과 계속 행복하길 바란다는 걸요.

하지만, 믿는다.

그가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또, 내가 그를 사랑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결국 돌아오리란 것을.

딱 3년 반만 얌전히 기다릴게요.

아마 스승님이 돌아오려고 하는 때가, 그때일 테니까요.

잊지 않고, 매일매일, 스승님이랑 같이 있는 것처럼….

이렇게 추억을 쌓으면서요.

* * *

[파빌리온 황조가 막을 내린 뒤, 혁명 세력의 주도하에 임시 의회가 결성되었다. 의회는 가장 먼저 제국법을 전면 폐지하고 새로이…….]

* * *

1786년 6월 2일, 15번째 편지.

스승님, 요즘 아빠는 바빠요.

제국 황실이 제멋대로 만들어 놓은 법전을 싹 뜯어고치고 있거든요.

이제 귀족이 평민 때리면 잡혀가서 혼나요. 당연한 일인데 이제야 이뤄졌다니 신기하죠?

* * *

제국 황실은 망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신을 믿고 사랑했다.

황제는 신이 아니었고, 진짜 신의 뜻은 제국 황실을 징벌하는 것이었음을 모두 알았기 때문이다.

국호(國號) 변경 건으로 혁명군 임시 정부가 골머리를 앓고 있을 때, 제도에서는 신의 이름을 써 달라는 요구와 함께 성명을 발표하는 단체까지 생겨났을 정도였다.

신을 숭배하는 기조는 좀 지긋지긋했지만….

“사람들의 신앙심을 일부러 꺾을 필요는 없어. 신앙심이 문제였던 게 아니라, 인간인 황제를 신처럼 떠받드는 게 문제였으니까.”

아빠는 그렇게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정말 나라 이름이 ‘프리메라’ 되는 거냐고 조제프 아저씨에게 한 번 더 물으니,

“나쁘지 않은 선택이란다, 리리스. 이미 한번 독재 권력을 징벌했던 신이 이 나라를 수호하는 의미를 갖는 거니까. 혹시라도 독재를 꿈꾸는 권력자에게 경계의 뜻이 되겠지.”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것 같아서 그냥 납득하기로 했다.

사실, 사람들이 신을 찬양하는 가장 큰 이유는….

신의 존재, 그리고 신이 우리의 삶에 개입하고 있다는 방증이 여전하기 때문이었다.

그게 무엇이냐고?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은,

능력자 양성소.

전과 달리 전부 똑같은 색 명찰을 단 아이들이 대강당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용감하고 어린 영혼들에게, 신의 축복과 보살핌이 언제나 함께하실 것입니다.”

대신관이 된 자드키엘의 기도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입소식에 참관한 귀족인 척 앉아 있던 나는.

1sec

꼬맹이들의 코어를 열어 주었다.

징병의 의무는 사라졌지만, 당장은 능력자들의 힘이 필요했다.

대륙 곳곳에서 난동 피우는 마수들의 존재는 여전하기 때문이었다.

* * *

1786년 7월 14일, 56번째 편지.

스승님, 오늘 능력자 양성소에 가서 어린 친구들의 코어를 열어 주고 왔어요.

양성소에만 와도 뿅! 코어가 열리니까 사람들은 프리메라가 없어도 여전히 신이 이 나라를 지켜 준다고 믿어요.

아! 그리고 놀라운 소식이 하나 있어요. 분명 엄마, 아빠 둘 다 능력자인데도 코어가 없는 비능력자가 몇 명 나왔어요.

계속 이렇게 되면,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는 이 땅에서 능력자들이 사라지게 될 거예요.

그리고 능력자들의 힘이 필요한 일도 천천히 사라질 것 같아요.

옛날에는 마수들이랑 열심히 싸워 주다가 신이 자취를 감추면서 같이 사라지고 오염됐던 성수들이, 다시 나타나서 밥값 하고 있거든요.

언젠간 정말 평화로워지겠죠?

* * *

18세기에 걸친 제국의 역사가 끝이 나고 국호가 바뀌었다.

파빌리온 황조를 상징했던 ‘파빌’이라는 수도명도 어떻게 고쳐야 할지 꽤 오래 회의를 했는데, 근방의 롬웰이라는 영지를 수도령으로 편입하면서 ‘롬웰’이 되었다.

‘개혁’이라는 거창한 단어를 쓰기에는 아직 걸음마 단계였지만….

제국 황실의 독재를 떠오르게 하는 구시대의 유물부터 뜯어고쳤다는 점은 꽤 뿌듯했다.

* * *

1786년 9월 1일, 96번째 편지.

스승님, 드디어 나라 이름이 바뀌었어요!

엄청 신기해요!

제가 역사학 전공했다고 말했죠?

(말한 건 아니고 40번 대쯤 되는 편지에 썼던 거지만)

그때 왕정 폐지랑 공화국 수립의 역사를 공부하다가, 논문을 쓰려는데 혁명에 관한 자료가 필요해서 읽은 판타지 소설책이 <도스의 반란>이었거든요.

그런데 혁명이 성공하고 내용이 끝나버려서 뒷부분이 궁금했어요.

지금 실시간으로 그 뒷부분을 직접 지켜보는 중……!

짜릿해!

* * *

제국 황실의 멸망과 함께, 마탑도 변화의 과도기를 겪었다.

주인이 실종된 권력 기관!

…이었지만, 오스카가 A4 크기의 종이 서른 장에 걸쳐 약 8포인트의 깨알 같은 글씨로 작성한 당부의 말을 보좌관에게 남겨 놓았던 터라, 별 무리 없는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다만 시급히 해결해야 하는 것은 공석인 마탑주의 자리였는데…….

* * *

1786년 9월 8일, 103번째 편지.

스승님 ㅋㅋㅋㅋㅋ

저 오늘은 좀 웃을게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웃음소리임)

오늘 스승님이 전권을 위임하고 가신 보좌관 로벨 선생님이랑, 마탑 연구원들이랑 모여서 마탑의 미래에 대해 토론했어요.

토론 주제는 ‘마탑주 자리를 계속 공석으로 둘 수는 없다!’였고, 다들 로벨 선생님한테 맡으라고 했죠.

그런데!

로벨, “오스카 마뉘엘은 작은 제국이었던 마탑의 황제와도 같았다! 그 같은 독재자가 없었다!” 충격 발언!

“돈만 많이 주면 뭐 하냐! 야근 멈춰! 근무 시간 외 노동 멈춰!” 소신 발언!

“이 나라도 황제가 없어진 마당에 마탑주는 있어 무엇 하겠나! 오스카 마뉘엘의 독재를 답습하지는 않을 것이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말이 너무 심하긴 했지만, 아마도 부담스러우신 모양이에요.

그래서 스승님이 독재했던 작은 제국은, 당분간이겠지만 군주제가 아닌 공화제를 유지하게 됐어요.

아 웃겨 마탑의 황제래 ㅋㅋㅋ

대체 연구원들을 얼마나 굴린 거야 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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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7년 2월 18일, 247번째 편지.

스승님, 스물다섯 살 생일을 축하해요!

작년 생일까지는 같이 케이크도 먹고 초도 불었는데, 이번에는 같이 있지 못해서 슬퍼요.

음…….

계산해 보니까, 스승님 스물여덟 살 생일은 직접 축하해 줄 수 있을 것 같아요.

맞죠?

그때는 돌아와 있을 거죠?

* * *

1787년 5월 19일, 332번째 편지.

스승님, 저 오늘 생일이에요!

열다섯 살이지롱!

* * *

1789년 2월 18일, 859번째 편지.

스승님의 스물일곱 살 생일, 축하합니다!

우와! 나 스승님이 열일곱 살일 때 처음 만났는데 시간 진짜 빠르다!

벌써 십 년…….

문득 궁금해졌는데, 혹시 그동안 연애는 해 보셨어요?

(궁금하진 않으시겠지만 제 애정 전선은 이상 없이 맑음입니다)

혹시 스승님 여친 생겨서 거기서 쭉 살고 싶으면 어떡하지?

그건 좀…….

저 보러는 와 주셔야 해요. 매일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스승님 생각하며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약속!

* * *

제국 혁명 이후, 새 시대가 열린 지도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1789년.

프리메라 공국(共國), 수도 롬웰.

루빈슈타인 공작저.

똑, 또독, 똑.

장난스러운 노크와 함께 에녹이 딸을 불렀다.

“공주야~ 준비 다 했어?”

“응, 아빠!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가자 책상 앞에 있던 리리스가 펜을 놓고 일어났다.

올해로 열일곱 살인 딸은, 3년 전에 이미 훌쩍 자랐던 모습과 변함이 없었다.

여전히 예쁘고, 밝고, 사랑스럽다.

“우리 딸 누가 이렇게 예쁘게 키운 거지?”

에녹이 새삼 뿌듯한 얼굴로 코를 훔쳤다.

“아빠지~”

쪽, 뺨에 입을 맞추며 팔짱을 끼는 딸의 애교는 어른이 됐어도 여전했다.

“갑시다아아!”

“가자아아아!”

똑 닮은 부녀가 집을 나섰다.

텅 빈 방. 리리스의 책상 위에는 벌써 세 권을 넘기고 네 권째 쓰기 시작한 노트가 펼쳐져 있었다.

1789년 9월 4일, 1024번째 편지.

스승님, 오늘이에요.

이제 저 보러 올 거죠? 오늘부터 딱 일주일만 더 기다릴 거예요?

사랑해요.

보고 싶어요.

너무너무…….

아빠가 힘을 숨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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