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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힘을 숨김-255화 (256/261)

255화

* * *

출근길.

이른 아침의 수도는 하루를 시작하려고 뛰쳐나온 사람들로 북적북적하다.

그래서 마차는 살짝 민폐고, 마탑까지는 걸어서 20분 거리라 나는 대개 도보로 출근하는 편이었다.

“아빠 오늘도 나 데려다주고 가게?”

“당연하지.”

아빠의 근무지는 옛날 황궁이 있던 자리. 지금은 귀족 의원들이 매일 모여 공무를 논하는 의회소가 되었다.

18세기에 걸쳐 나라를 장악했던 군주제를 폐지하고 새로운 기틀을 다잡으려면, 당연한 말이지만 오랜 시간을 공들여야 했다.

많은 게 바뀐 3년이지만 그래도 아직 한참 멀었다. 과도기라고 해야 할까?

“어엇! 공녀님, 좋은 아침입니다! 지금 출근하시나 봅니다. 공작님도 안녕하세요?”

가는 길에 익숙한 얼굴이 아빠와 나에게 인사했다.

용병 길드 <리리스의 들개들>의 부길드장, 앨먼 씨다.

“앨먼 씨, 안녕하세요! 네, 출근 중이에요. 저 야근 확정이라 젬한테 오늘 동기 모임 못 가서 미안하다고 좀 전해 주세요.”

“어이쿠, 형님 기대하셨는데 아쉬우시겠네. 알겠습니다.”

계급은 완전히 사라졌지만, 귀족 작위는 아직 남아 있다.

지금은 망한 제국에서 ‘작위’라는 건, 능력자들이 전쟁터에서 희생한 대가로 얻은 상징. 그것만은 분명히 존중해야 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다만 작위의 세습은 폐지되었고, 공작이니 공녀님이니 호칭은 여전하지만 그것이 신분의 귀천을 가르는 기준이 되지는 않는다.

“공주, 오늘 야근해? 끝나고 같이 저녁 못 먹는 거야?”

앨먼 씨와의 대화를 들은 아빠가 아쉽다는 듯 물었다.

“으으응, 나 야근해….”

떠올리니 금세 피곤해졌다.

“어제 마탑주한테 한 달이나 걸쳐 만든 시험지 까였거든. 너무 쉽다고 내일까지 다시 만들어서 가져오래.”

“엥. 그… 신입 연구원 채용할 때 쓰는 시험지 말이야? 네가 만든 수학 문제?”

“으으응.”

마탑은 반년 전, 매우 평화롭고 민주적인 비밀 투표를 통해 마탑의 대표를 뽑았다.

기여도와 천재성을 중점으로 두고 최종 후보에 나와 한스가 올랐는데, 딱 한 표 차이로 내가 졌다.

딱, 한 표.

그 한 표에, 내가 한스의 이름을 썼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때 한스의 이름을 썼던 것을 지금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다!

왜냐고?

“걔 진짜 독재자야, 아빠!”

한스 위버!

연구원들의 복지에는 관심도 없이 툭하면 야근시키는 그놈은, 오스카 마뉘엘 2였다!

능력자들의 수가 줄어가는 지금.

천천히 마법도 사라질 테고 원래라면 마탑도 망하는 수순을 타야겠지만, 아니.

우리에게는 치유 마법이 완전히 소멸하기 전에 의학을 발전시켜야 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로 남았다.

오스카가 남겨두고 간 많은 마법식을 토대로 마탑은 물리적인 의학 발전에 중점을 둔 연구 기관으로 발을 넓혀가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시간이 흐르면 아마도 의사로 전직하게 될 마탑 연구원들.

마탑의 권력은 계속 이어질 테고, 그 마탑의 폭군, 마탑주 한스 위버의 폭정도 계속되겠지…….

“리리스, 천재로 태어났다면, 자발적으로 행해야 하는 의무가 있는 거야. 이게 다 결국은 사람들을 살리는 일인데, 고작 그 정도 노력도 못 하겠어?”

야근을 강요하며 한스가 하는 말에 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묘하게 희생적이고 착한 폭정(?)이었던지라, 반박하면 왜인지 나만 나쁜 사람 되는 것 같아서….

“아니, 뭐 얼마나 대단한 문제를 내야 하는데 야근까지 시켜? 그렇게 어렵게 만들면 통과하는 사람은 있어? 안 그래도 저번 달에 연구원 시험 봤던 스무 명 전부 떨어졌다고 말이 많던데?”

고생하는 딸이 안쓰러워 보였는지 아빠가 욱했다.

마탑은 ‘똑똑한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들어올 기회가 주어지지만, 입사 난도는 오스카가 마탑주로 있던 시절보다 더 극악해졌다.

뭐, 그럴 수밖에 없긴 했다.

‘아무나 의사 시키면 큰일 나지.’

입사 시험을 매우 까다롭게 봐야 한다는 점에는 십분 동의하는 바였으므로, 나는 그냥 한숨이나 한번 내쉬고 말았다.

아, 그래도 야근은 진짜 짜증 나.

“마탑주 내가 할걸!”

오늘 젬, 롬, 제라드, 체시어까지 한 자리에서 보는 양성소 졸업반 동기 모임도 못 가게 됐다.

“한스 위버, 이 독재자! 지가 무슨 오스카 마뉘엘이야, 뭐야!”

마탑에 도착해 울분을 터뜨리는 내 어깨를 토닥이던 아빠가, 왜인지 멈칫했다.

“음, 그러고 보니 오늘이었지?”

“뭐가?”

“마탑주 금제 터지는 날.”

“아아, 응.”

1789년 9월 4일.

오스카가 회귀 마법을 시전했던 날이자, 이제 그 대가를 치르게 되는 날이기도 했다.

“…돌아오려나.”

“당연하지.”

“큰일이네. 그냥 날짜는 정확하게 모르고 있을걸. 마탑주가 돌아올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까, 괜히 처음 보는 얼굴들 유심히 살펴볼 것 같아.”

“그러지 마. 그럼 스승님 죽어.”

“으응.”

“그래도 스승님 돌아오면, 금제가 얼마나 심각한 수준인지 두 눈으로 확인해 볼 수 있겠지. 나는 어떻게든 방법을 찾을 거야!”

주먹 불끈, 희망차게 말하는 나를 보고 아빠는 웃었지만, 여전히 걱정하는 표정이었다.

“아빠, 너무 의식하지 않게 해 줄까? 그런 간단한 건….”

나는 팔찌를 봤다.

1sec

“1초밖에 안 드는데.”

“어어, 그럼 부탁해.”

“레드 썬!”

딱―!

얼굴에 대고 손가락을 딱, 퉁겨 주자 아빠가 움찔했다.

“히힛, 제임스 씨.”

난 아빠의 뺨에 뽀뽀해 주며 인사했다.

“사랑해. 오늘도 수고하세요.”

* * *

프리메라 공국(共國), 수도 롬웰.

수도의 온갖 민원을 처리하는 공무 관리국.

그중에서도 이민 신고 관리 부서 창구에 한 남자가 서 있다.

남자는 대륙 남부, 카르타 왕국 출신이었지만, 지금은 엄격한 이민 심사를 거치고 공국 시민증 발급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임스 그레이 씨?”

여러 장의 서류와 신분증을 갖고 창구로 온 직원이 이름을 부르자, 남자, 제임스 그레이는 움찔했다.

‘에이 씨, 그냥 다른 이름으로 할 걸 그랬나.’

제 정체를 조금이라도 눈치채게 해서는 안 되는 처지였기에, 이름을 ‘제임스 그레이’로 정한 것은 솔직히 미친 짓이었다.

자기 아빠의 가명이었던 ‘제임스’라는 이름이 그 애에게는 특별하게 들릴 것을 아니까.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어떤 식으로든 특별하게 들렸으면 해서 고른 이름이기도 했다.

‘괜찮아. 제임스가 한둘이냐. 길 가는 놈 중 열에 아홉이 제임스일 거다.’

심지어 남자는 마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래, 그러니까 애초에 지뢰밭에 과감하게 나뒹굴겠다는 각오도 한참 전에 끝냈다고 할 수 있겠다.

남자, 제임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새로운 신분을 건네받았다.

“제임스 그레이 씨, 롬웰 시민이 되신 것을 환영합니다!”

“환영합니다!”

“환영합니다!”

“……?”

다른 창구의 직원들까지 양손을 반짝반짝 흔들며 일제히 웃었다.

이게 뭐람. 아무래도 시민권 발급받은 이민자를 환영하는 매뉴얼인가 본데….

‘광대야, 뭐야? 여기가 무슨 놀이터도 아니고 공무원이면 공무원답게 조용히 공무 처리에나 집중합시다.’

…라고 할 뻔.

제임스는 입을 꾹 다물었다.

꼭 자신의 지문과도 같은, 매사에 틱틱거리는 이 말투를 고치려고 3년이나 뼈 깎는 노력을 하지 않았던가.

“…감사합니다.”

결국, 제임스는 얌전히 대답했다.

“저희 롬웰은, 이민자 거주지 지원 정책이 아주 잘 마련되어 있답니다. 상담은 3번 창구로 가셔서 받아 보실 수 있으세요.”

“아, 됐습니다.”

“네? 혹시 거주지를 벌써 마련하셨을까요?”

“아뇨. 마탑에서 연구원들한테 숙소 제공하지 않습니까? 나흘 후에 마탑 연구원 정기 채용 시험이 있는 거로 아는데. 거기 들어가면 되니까 집은 필요 없습니다.”

“……?”

직원이 큰 눈을 껌뻑거렸다. 그리고는 혼란스러운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어, 그… 마탑이, 으음, 시험 보면 들어갈 수 있는… 데였나?”

“…….”

“아앗! 네, 그럼! 혹시 나중에라도 거주지 지원 혜택이 필요하시면 꼭 다시 방문해서 이용해 보세요!”

“예,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서류와 신분증을 챙긴 제임스가 관리국을 나섰다.

북적이는 수도.

그가 떠나 있던 3년 사이, 이곳은 많은 것이 바뀌어 있었다.

격변하고 있다는 소식이야 귀가 있으니 들었지만, 실제로 보고 나니 놀라울 정도였다.

일단 가장 놀라운 건… 척 봐도 귀족 같은 귀한 옷차림들이 보이는데도, 길바닥에서 그들에게 무릎 꿇고 절하는 익숙한 풍경이 없다는 점.

‘신기하네.’

제임스는 임시로 머무를 여관부터 알아보려고, 입고 있던 하얀 로브의 후드를 뒤집어쓰며 걸음을 옮겼다.

알아보는 사람이야 없겠지만 괜히 무서워진 탓이었다.

툭―

얼마간 걷는데, 북적이는 수도에서 기어코 누군가와 어깨가 부딪혔다.

“어맛!”

높은 톤의 여자 목소리.

내리깐 제임스의 시야에 값비싸 보이는 드레스 치맛자락이 들어왔다.

귀족일 게 분명한 차림.

‘혹시 눈을 발바닥에 달고 다니시는지? 보고도 못 피할 거면 그냥 눈은 뽑아놓고 다닙시다.’

…라고 할 뻔.

“…미안합니다.”

제임스는 이를 악물고 사과했다.

앞을 안 보고 먼저 들이박은 건 저쪽이지만, 그래도 귀족이었다.

많이 변했다고는 들었어도, 고작 3년.

귀족이 평민에게 사과하는 말도 안 되는 일은….

“죄송해요!”

…일어나네?

“괜찮으세요?”

제임스는 그제야 내리깐 시선을 올려 여자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무심코 여자가 팔짱을 끼고 있던 남자의 얼굴에까지 시선이 닿았을 때.

‘아오, 씨!’

놀라서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화려한 금발의 미남자.

분명 리리스의 사촌 오빠, 앙트라세의 쌍둥이 중 하나였다.

어이없을 만큼 똑같이 생긴 얼굴이었던지라 둘 중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했다.

‘괘, 괜찮아. 침착해.’

제임스는 심호흡했다.

수도에 도착하자마자 아는 얼굴을 만날 거라고는 생각 못 해서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어차피 저놈은 나 못 알아본다.’

금제의 원리는 대충 파악했다.

‘내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한 번 자세히 뜯어보세요.’라고 말하지 않는 한, 아는 이들과 마주친다 해도, 그들은 제임스의 얼굴을 못 알아본다.

그저 처음 만나는 평범한 사람의 얼굴처럼 느낄 뿐.

마음을 다스린 제임스가 천천히 다시 고개를 틀었다.

“혹시 어디 다치셨나요?”

빤히 눈을 맞추고 있음에도, 앙트라세 공자는 역시 걱정하는 표정 빼고 특별할 게 없어 보였다.

“아뇨, 괜찮습니다. 가 보세요.”

“죄송해요.”

“죄송합니다.”

둘은 등을 보이고 떠나갔다.

“에리카, 앞 좀 보고 걸으라니까. 계속 내 얼굴만 보고 있으니까 자꾸 부딪치지.”

“잘생겨서 계속 보고 싶은데 어떡해!”

제임스는 조잘거리며 멀어지는 둘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계속 지켜보았다.

‘연애하나 보네. 좋을 때다.’

다시 옮기는 걸음은 전보다 훨씬 가벼웠다.

‘괜히 쫄았네. 별거 아닌데?’

아는 놈을 만나 보고 나니 지뢰밭에서 뒹구는 것도 썩 어렵지 않을 듯해서.

씩 웃은 제임스―

아니, 오스카 마뉘엘은 당당하게 로브 후드를 벗어 넘겼다.

‘기다려라! 스승님이 간다!’

아빠가 힘을 숨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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