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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힘을 숨김-256화 (257/261)

256화

* * *

마탑.

리리스 루빈슈타인의 연구실.

“자기도 못 푸는 문제를 만들어 오라니. 내가 무슨 수로? 한스 걔는 양심이라는 게 없어.”

책상을 등진 채 선 리리스는 벌써 30분째 상사 욕을 하고 있었다.

“수정해서 가져갔더니 12번부터 15번 문항까지만 결재해 주더라? 하, 보는 눈은 있어가지고…. 그거 옛날에 나 마탑 들어올 때 본 시험 문제 중에서 발췌한 거야. 스승님이 낸 거. 어려워서 아무도 못 풀걸. 걔는 아예 신입을 뽑을 맘이 없나 봐. 심하지 않아?”

“그러게. 심하네.”

리리스의 SOS에 친히 마탑까지 찾아와 수학 문제를 풀던 체시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어때, 자기야?”

“아, 마지막 문항은 모르겠어. 어렵네.”

“오, 그래? 그럼 그 문항 추가해야겠다….”

툭하면 야근에 시달리는 리리스의 목소리가 안쓰럽다. 체시어는 펜을 놓고 한숨을 쉬었다.

“너 쉬는 날 바람 쐬러 갈까.”

“나 휴일 반납했어. 그날이 신입 연구원 채용 시험 날이거든. 감독관 해야 해.”

고개를 저은 리리스가 다시 제안했다.

“다음 주 쉬는 날에 갈까?”

“나 그때 북부 출정이야.”

“…….”

“…….”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침묵했다. 마치 온 세상이 두 사람을 갈라놓으려는 듯했다.

그래도 한창때의 연인들은 불탔다.

리리스가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손을 까딱거리자 체시어가 픽 웃고는 일어나 다가갔다.

리리스를 가두듯 책상에 양팔을 짚은 체시어가 고개를 숙여 먼저 입을 맞췄다. 리리스의 팔이 자연스레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햇수로는 3년 반을 만난, 오늘로 1306일 차 연인.

이제는 서로의 눈빛만 봐도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알았다.

하지만, 야릇한 포즈로 입술을 얽은 연인들은 보기와 달리 지나치게 건전했다.

“…….”

“…….”

리리스가 ‘도장 찍기’라고 명명한 스킨십.

그저 가만히, 서로 입술을 맞대고 있을 뿐이었다.

“아.”

리리스가 슬쩍 혓바닥을 내밀어 오자 체시어는 언제나 그랬듯 단호하게 먼저 입술을 떼어냈다.

체시어의 목을 끌어안은 그 모습 그대로 리리스가 활짝 웃었다.

“그냥 놀러 가지 말자. 가 봤자 아무 일도 안 일어날 텐데 왜 가?”

“꼭 무슨 일이 일어나야 해?”

에녹의 외박 금지령이 풀린 지도 꽤 지났고, 체시어와 단둘이 여행을 가 본 적도 있지만 정말 놀라울 만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리리스는 언젠가 물었다.

“뽀뽀 다음에 뭘 해야 하는지 잘 모르는 거 맞지? 그러면, 내가 알려 줄게.”

그러자 체시어는 대답했다.

“아니, 알아. 그다음도 알고, 또 그다음도 알아.”

그렇다면 대체 이 남자는 무엇이 문제인 걸까?

체시어는 리리스에게 안긴 그대로 품에서 뭔가 꺼냈다.

자줏빛의 반지 케이스.

그게 뭔지 알아본 리리스가 멈칫하며 체시어의 목을 안고 있던 팔을 내렸다.

탁,

체시어가 한 손으로 케이스를 열자, 푸른색의 다이아가 박힌 반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

“…….”

체시어가 반지를 꺼내 리리스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웠다.

사실 2주 전에는 귀걸이를, 1주 전에는 목걸이를 받았다.

그래서 리리스는 이 반지의 의미가 무엇인지 안다. 체시어가 ‘도장 찍기’ 다음 단계를 행하기 위해 나름대로 정해 놓은 선이라는 것도.

“…너 역시 조선 시대에서 빙의했지?”

“그게 뭐야.”

“풉.”

웃어버린 리리스가 제 왼손을 펼쳐 반지를 한참 응시했다.

“너무 예쁘다.”

“…….”

“고마워.”

그리고는 체시어를 바라보았다.

서로 눈을 맞춘 채, 연인들은 잠시 침묵했다.

“…미안.”

한참 만에, 리리스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체시어는 픽 웃고 리리스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괜찮아.”

* * *

“불굴의 의지! 포기하지 않는 신념! 공주님의 치맛자락을 붙잡으며 세 번이나 질척거려 봤지만, 안타깝게도 세 번 다 차여버린 남자가 있다?”

수도, <빌리 블랙 펍>.

붉은 머리의 사내가 시원시원하게 목청 높였다.

“무려 세 번째 청혼을 거절당하고 돌아온, 수도에서 제일 불쌍한 남자! 체시어 리브르를 위하여!”

“위하여!”

“위하여!”

“…….”

사내, 아니, 사내라고 오해할 만한 모습이지만 그저 듬직하고 용맹한 여자, 제미언 트라하의 건배사에, 허공으로 맥주잔 세 개가 모였다.

능력자 양성소 1026기 졸업반 동기 모임.

젬과 롬, 제라드는 홀로 잔을 들지 못하는 체시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한숨을 삼킨 체시어가 맥주잔을 들었다.

“…위하여.”

짠―!

저녁 시간, 웅성거리는 펍 안으로 경쾌한 건배 소리가 울려 퍼졌다.

“키야!”

맥주를 원샷한 젬이 입가를 훔쳐내고 체시어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는 없다, 체시어!”

“…….”

“네가 진정 사나이라면, 열 번이 뭐냐? 넘어갈 때까지 찍어라! 누님이 응원해 주마!”

듣고 있던 제라드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걸 위로라고 하는 거야? 열 번 찍히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라곤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데?”

“그래, 젬. 리리스가 나무야? 뭘 찍니, 마니….”

롬도 질색했다.

“어허, 모르는 소리.”

못마땅해하는 친구들의 반응에도 젬은 히죽 웃었다.

“내 성공신화를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나 봐. 알프레도 버빈, 정확히 열 번 찍었지? 결국 넘기는 데 성공했잖아?”

국군 성권사단 소속, 알프레도 버빈과 제미언 트라하는 3년의 열애 끝에 다음 달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어? 내가 딱! 여자답게! 박력 있게! 평생 당신 손에 피 한 방울 안 묻히겠다고 해 줬더니! 홀랑 넘어왔다는 거 아니겠어?”

“너야 결혼은 전부터 기정사실이었잖아. 너무 빠르게 밀어붙이려고 하니까 알프레도 경이 고민하면서 아홉 번 미뤘던 것뿐이고.”

젬의 말을 정정해 준 제라드가 힐끗 체시어의 눈치를 보았다.

“그런데 리리스는… 왜 거절하는 건데?”

“저, 저 음흉한 눈빛 보소!”

젬이 제라드의 손등을 아프게 탁, 내려쳤다.

“둘이 결혼 엎어지면 냅다 리리스 꼬셔 보게?”

“뭔 소리야?!”

제라드가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너 그런 이상한 소리 해서 우리 우정 갈라놓으려고 하지 좀 마!”

“이상한 소리 듣기 싫으면 너도 연애 좀 해, 이 자식아! 그 빛나는 미모 썩히지 말고!”

“내가 연애를 하든 말든 네가 무슨 상관이야? 아, 쟨 진짜 나이 먹을수록 왜 저렇게 아저씨 같아지냐?”

“그만, 그만!”

시끄러운 분위기를 진정시킨 롬이 체시어에게 물었다.

“체시어, 그런데 나도 궁금하다. 리리스가 거절하는 이유까지야 너희 사적인 영역이니까 말하기 싫으면 묻지 않겠지만….”

롬이 흠, 헛기침하며 덧붙였다.

“…싫다는데 왜 세 번이나 청혼한 거야? 그건 좀 너답지 않아서.”

“…….”

“야, 야. 아니야. 리리스는 얘가 싫어서 거절하는 거 아니야.”

침묵하는 체시어 대신 젬이 쯧 혀를 차며 대답했다.

“결혼이 싫은 게 아니고, 결혼식을 할 준비가 안 되셨단다.”

덧붙이는 젬의 말이 의아한지, 롬과 제라드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 그 있잖아! 신부 입장…! 하면 아빠 팔짱 끼고, 어? 식장에 딱 들어가는 거! 그걸 하고 싶은데, 안 되니까!”

“……?”

“……?”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어째 더 이해하기가 어렵다.

“리리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롬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빠 없어?”

그의 질문에, 일동 침묵.

모두 물끄러미 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휴, 말본새하고는.”

“아빠가 없냐니? 심하다, 롬. 말 좀 가려서 하자.”

차례로 눈을 흘기며 핀잔주는 젬과 제라드에, 롬이 당황하며 허둥거렸다.

“아니,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리리스, 아버지 계시잖아! 공작님 멀쩡히 살아 계시잖아!”

“그치.”

“그런데 대체 뭐가 준비가 안 됐다는 건데? 왜 아빠 팔짱을 끼고 신부 입장을 못 해?”

뺨을 긁적인 젬이 슬쩍 체시어의 눈치를 보다가 말했다.

“나도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는데, 두 사람이 있어야 한대. 왼쪽, 오른쪽에 하나씩 팔짱 끼고 신부 입장을 해야 한다나?”

“그게 뭐야?”

롬이 인상을 찌푸렸다.

“혹시 리리스 아버지가 두 분이셔? 출생의 비밀, 뭐 그런 거 있는 거야?”

롬의 말에, 묵묵히 듣고만 있던 체시어가 피식 웃고 말았다.

“비슷해.”

그때.

“풉!”

체시어의 바로 뒤 테이블에서 홀로 앉아 있던 남자가 사레들린 모양인지 마시고 있던 맥주를 내뿜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백발인 남자의 뒤통수를 무심코 지켜보던 이들은,

“근데, 젬. 너 결혼식 때 드레스 입어?”

“미쳤냐?”

“아하하! 와, 상상할 수가 없다! 드레스 입은 제미언 트라하라니!”

다시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여기… 괜찮으시면 쓰십시오.”

체시어는 품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 남자에게 건넸다. 멈칫한 남자가 이내 반쯤 돌아본 채로 손수건을 받고 인사했다.

“…고맙습니다.”

체시어는 다시 왁자지껄해진 친구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리고….

‘뭐? 양쪽에 아빠 팔짱을 끼고 신부 입장?’

펍에 들렀다가 우연히 체시어의 뒤에 앉게 된 남자, 오스카 마뉘엘은 엿들은 대화에 기함하고 말았다.

‘지금 저거, 한쪽 팔짱은 내가 껴야 한다는 소리 맞지?’

황당했다…….

어이없는 이유로 청혼을 연달아 거절당하고 있는 체시어가 측은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바보 같은 기집애가 진짜!’

오스카가 제 머리를 붙잡았다.

애가 결혼하면 먼발치에서 구경은 할 수 있겠지만, 팔짱 끼고 같이 웨딩 로드를 걸어 줄 수는 없었다.

리리스도 그걸 모르지 않을 텐데.

그럼에도 괜한 고집을 부리고 있는 거다.

떠난 사람은 잊고 행복하게 잘 살라 했더니, 별 시답잖은 청승이나 떨고 앉았다.

‘미치겠네, 이거.’

오스카는 체시어의 손수건을 꽉 쥐며 한숨을 내쉬었다.

항상 얄밉기만 한 놈이었는데, 막상 저 때문에 얼굴 한가득 그늘이 진 꼴을 보니… 마음이 복잡하달까.

‘너 이 자식….’

오스카는 측은한 눈으로 체시어를 돌아보았다.

‘평생 결혼 못 하겠는데, 어쩌냐….’

아빠가 힘을 숨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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