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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힘을 숨김-257화 (258/261)

257화

* * *

마탑주, 한스 위버의 집무실.

새벽까지 신입 연구원 채용 시험 문제를 완성하고 난, 그 이튿날.

“만세! 해방이다!”

나는 드디어 50문항짜리 시험지를 결재받는 데에 성공했다.

“좋냐?”

앉아 있던 한스가 삐딱하게 턱을 괸 채 물었다. 나는 고개가 떨어져라 끄덕였다.

“좋지, 그럼! 그런데 마지막 50번 문제 정말 통과시켜 주는 거야?”

“어. 뭐… 마법식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건 상상력이니까.”

크으. 최고다.

“고생 많았어.”

답지 않게 칭찬해 준 한스는 일어나더니 창가로 다가갔다.

“음, 고생은 네가 더 했지.”

그건 솔직히 인정해야 했다.

나야 최종 시험에서 쓸 50문항 뽑은 게 고작이지만, 한스는 난이도별 1, 2, 3차 시험 150문항을 만드느라 한 달 내내 3시간만 잤으니까.

우리가 한스의 폭정에도 군말 없이 따르는 이유는, 그가 항상 동료들보다 세 배는 일을 많이 하는 상사이기 때문이었다.

“요즘 빡세게 굴린 거 미안. 아무나 마탑에 들어오게 할 수는 없으니까. 이해하지?”

“응응. 알지, 알지.”

“리리스, 난 말이야…. 마탑주님이 언젠가 돌아와서 이 마탑을 보셨을 때, 실망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

“…….”

나는 낮아진 한스의 목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오스카를 누구보다 잘 따랐던 한스는 그가 사라졌을 때 제일 많이 울고 슬퍼했다. 시간이 흘러도 그리움은 여전한 것 같았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잘 부탁해. 너 없으면 힘들 거야.”

한스가 돌아보며 웃었다.

훌쩍 자란 한스를 보며 나는 새삼 뿌듯해져서 마주 웃었다.

먹는 족족 키로 가는 슬렌더 체형이나, 아닌 건 아니라고 가차 없이 말하는 성정이 꼭 누구를 닮아 잘 자라 있어서.

“물론이지, 마탑주님. 그런데 혹시, 내가 전에 부탁했던 마법식 어느 정도 만들어졌어?”

“아! 안 그래도 일 많아서 바빠 죽겠는데 네가 만들어 달라고 징징거렸던, 대체 어디에 쓰려는지 모를, 쓸데라고는 없어 보이는 마흔두 개나 되는 마법식 말이지?”

흠흠.

역시, 듣는 사람 무안하게 하는 오스카 마뉘엘식 화법 대단하다!

“…뭐, 천천히 해. 만들어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워. 도저히 내 머리론 안 되더라고.”

한스는 쪼그라든 나를 보며 한숨 쉬더니 이내 책상으로 가서 서랍을 열고 종이 뭉치를 꺼냈다.

“여기.”

“……?”

난 놀라서 재빨리 다가가 종이를 넘겨 살펴보았다. 부탁했던 마법식이 전부 완성돼 있었다.

“미, 미, 미친! 이걸 벌써 다 만들었다고? 너… 너 천재야?”

입을 다물지 못하는 나를 보며 한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몰랐어?”

“꺄아아악!”

나는 한스를 끌어안고 환호했다.

“진정해. 그런데 쓸데없는 마법치고는 어째 다 가성비 떨어지는 주문이라 마나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이 들어. 만들어 봤자 쓸 수 있는 사람이….”

“괜찮아!”

난 만세하며 말했다.

“우리에게는 에녹 루빈슈타인이 있잖아!”

넘치는 마나 쓸 데도 없는 세계관 최강자에게 무엇이 어려우랴!

“그런데 대체 뭐에 쓰려는 거야?”

“아, 스승님이 돌아오면 이것저것 시도해 보려고.”

난 한스의 마법식을 살피며 흐뭇하게 말했다.

이건 나름대로 굴려 본 내 잔머리였다. 나 말고도 오스카를 사랑하는 많은 이들이, 다시 그를 기억할 수 있었으면 해서.

물론 신의 눈을 속이려는 편법에 지나지 않는 방법들이고 성공할 거라 확신도 못 하지만.

“시도? 무슨 말이야?”

“그런 게 있네요. 아무튼, 고마워. 최고의 마탑주! 이 땅에 다시없을 천재, 한스 위버!”

난 마법식을 소중히 끌어안고서 팔꿈치로 한스의 팔을 쿡 찔렀다.

“그런데, 마탑주님. 나 어제 새벽 2시까지 일하느라 고생한 데다가 내일 휴일까지 반납했는데…. 오늘 반차 내고 일찍 퇴근하면 안 될까?”

“…….”

“히잉. 한 달 내내 문제 만든다고 남자 친구랑 데이트도 제대로 못 했단 말이야. 응? 응?”

“음, 뭐….”

긍정적으로 고민하듯 고개를 끄덕이던 한스가 내 어깨를 잡았다.

그리고는 귀에 조용히….

“개소리 말고, 가서 일해.”

…속삭였다.

응, 그럴 줄 알았다.

나는 활짝 웃었다.

“이 독재자 같으니라고.”

내 언젠가는 이 마탑에 꼭 혁명을 일으키고 말리라!

* * *

수도, 롬웰.

식당, <제논 아줌마의 손맛>.

특이한 간판을 단 이 식당은 건물 2층부터 여관을 겸하고 있는데, 오스카가 묵고 있는 숙소였다.

‘장난하나?’

이른 아침, 손님 하나 없는 텅 빈 식당.

1층에서 아침 식사를 주문한 오스카는 마탑에서 배포한 연구원 채용 기출 문제를 풀고 있었다.

‘진짜 장난해?’

보통 사람들은 뭔지 알아먹지도 못할 어려운 문제들을 거침없이 풀어 내려가며 오스카는 이를 갈았다.

‘이딴 걸 문제라고 내? 내가 없는 사이에 마탑 수준이 대체 어디까지 떨어진 거야?’

놀라운 사실은 이것이 3개월 전에 있었던 연구원 정기 채용 시험 문제라는 것이다.

더 놀라운 사실은 눈 감고도 풀 수 있을 이런 시험을 치고 지원자들 전부 탈락했다는 것이고.

‘그래, 마탑이 문제겠냐? 이 나라 인간들 대가리 수준이 문제겠지.’

오스카 마뉘엘이 3년 동안 이를 꽉 물고도 고치지 못한 것.

나 빼고 다 멍청이!

바로, 이 하늘을 찌르는 오만함이었다…….

“어이쿠, 이게 대체 뭐야?”

그때, 여관 주인장이라는 남자가 친근하게 오스카의 옆에 앉더니 입을 떡 벌렸다.

“이야, 자네 참 대단하구먼. 이런 알아먹지도 못할 문제를 아주 술술 푸는 걸 보면.”

주인장은 털이 숭숭 난 팔로 오스카의 문제지를 가져가 들여다보더니 혀를 내둘렀다.

산만 한 배와 정돈 안 한 주황색 턱수염을 북실북실 기른 주인장, 죠는 쓸데없이 말이나 걸고 남 일에 궁금한 것도 참 많은 남자였다.

다시 말해 오스카가 딱 질색하는 스타일이었지만.

“제임스 자네, 마탑 연구원 하러 간다고 했지?”

그럼에도 여관에 묵은 첫날부터 이름이며 행선지며 꼬치꼬치 캐묻는 죠에게 고분고분 답해 줬더랬다.

원래의 오스카였다면 상상할 수도 없는 일.

하지만, 이제는 타인에게 온화하고 상냥해지기로 결심한 제임스 그레이니까.

“후후, 내가 마탑에 자~알 아는 사람이 있거든?”

“그런데요?”

음흉하게 웃은 죠가 오스카의 귀에 속삭였다.

“우리 여관에 묵은 것도 인연인데 내가 한번 말 좀 해 줄까?”

부정 청탁?

오스카가 대번에 인상을 썼다.

감히 신성한 마탑에 부정 청탁을 받아 주는 놈이 있다니. 대체 지난 3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누군데요. 이름이 뭡니까?”

가자마자 물갈이 한번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오스카가 물었다.

“알려나? 루빈슈타인 공녀님!”

“누구요?”

오스카의 눈이 커졌다.

“내가 수도로 오기 전에, 저 아래 남부에 제논이라는 산골 마을에서 살았거든? 그때 이웃이었지. 허어, 고 쪼매난 손으로 아빠 팬티 빨아 준다고 뽈뽈거리면서 기어 다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언제 그렇게 커서는….”

갑자기 회상에 잠긴 죠가 눈물을 찍어냈다.

‘아하. 지 아빠 탈영했을 때 살던 곳에서 아는 사이였나 보구나.’

깨달은 오스카는 놀랐다. 뭐 이런 우연이 다 있는지.

“쪼끄만 게 얼마나 야무졌는지 몰라. 내가 일곱 살 때 걔한테 포커를 가르쳐 줬는데, 곧바로 날 이겨 먹고 도토리 싹 쓸어가더라니까. 그때부터 내가 걔 똑똑한 건 알아봤지.”

“애한테 무슨 포커를….”

오스카가 인상을 찌푸렸지만, 죠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

“나 그 루빈슈타인 공작이랑 같이 나무 하러 다니면서 형님, 동생 하던 사이였다? 그래서 제임스 자네가 괜히 친근했잖아. 공작이 그때 쓰던 이름도 제임스였거든.”

“…….”

“아아, 자네는 왕국 출신이라 잘 모르려나? 루빈슈타인 공작이 바로 그, 제국 혁명군 수장! 응?”

죠가 신나서 엄지를 치켜세웠다.

“요 거지 같았던 나라를 싸악 바꾼 장본인이시라 이거야. 나랑 우리 마누라도 좀 살 만해지니까 수도로 올라온 거지, 아니었으면 엄두도 못 냈어.”

“어우우우. 인간아!”

그때, 식당 주방에서 나온 죠의 아내, 수잔이 남편의 등짝을 짝 후려갈겼다.

“악! 왜 그래?”

“내가 손님들 괴롭히지 말랬지!”

“아니, 뭘 또 괴롭혀? 젊은 친구가 혼자 심심하게 앉아 있으니까 말동무해 줬구먼!”

“시끄러!”

수잔이 미안한 웃음과 함께 오스카의 식사를 내려놓으며 사과했다.

“미안해요. 이 양반이 주책이지? 얼른 식사해요. 더 먹고 싶은 거 있음 말하고.”

“아, 예.”

“일로 와, 인간아! 할 거 없으면 애 잘 먹는 거 해 놨으니까 심부름이나 갔다 와!”

“아아아아! 아파, 아파!”

수잔이 죠의 귀를 무자비하게 당겨 끌어냈다.

그때.

“어멋, 제임스으으!”

수잔이 식당으로 들어온 누군가를 향해 반갑게 달려갔다.

제임스?

자길 부르는 줄 알고 돌아본 오스카는 놀라서 다시 고개를 틀었다.

에녹!

에녹이었다!

‘저, 저 인간이 여긴 왜….’

쿵쾅쿵쾅.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뛰었다.

오스카는 가슴 위에 가만히 손을 올린 채 뒤에서 들려오는 대화에 귀만 열었다.

“내 정신 좀 봐. 아직도 제임스라니. 공작님, 미안해요~?”

“아하하! 편한 대로 부르세요, 수잔. 형님 귀는 좀 놔주시고요.”

“그래! 놔, 좀!”

“으이구!”

죠의 귀를 놔준 수잔이 물었다.

“그나저나 아침부터 웬일이래? 아침 안 먹었으면 해 줄까요?”

“아뇨, 먹고 나왔습니다. 출근하는 길에 잠깐 들렀어요. 공주가 뭐 받아오라고 하던데?”

“어유, 맞아!”

수잔이 에녹의 어깨를 찰싹 치며 호호 웃었다.

“내가 리리스 어렸을 때 자주 해 주던 거 있잖아? 양배추 시큼하게 절인 거. 공작가 주방장 솜씨가 참 좋긴 한데, 어째 내가 해 주던 맛이 안 난다 그러더라고.”

수잔이 죠를 흘기며 덧붙였다.

“안 그래도 이 식충이 편에 보내려고 했었는데, 해 놨으니까 가져가. 조금만 기다려요?”

오스카는 수잔이 주방으로 가는 틈을 타 일어났다. 자연스럽게 2층 숙소로 올라갈 생각이었다.

“어어, 마침 잘 왔다!”

그러나, 덥석.

죠에게 팔이 붙들리고 말았다!

“제임스, 내일 마탑에서 뭐 시험 있다며? 여기, 우리 여관에서 묵는 친구도 그 시험 보러 간다던데 리리스한테 말 좀 잘해 줘 봐. 응?”

으아아악!

이 미친 아저씨!

눈앞이 새하얘진 오스카는 차마 뒤돌아보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선 채 이를 악물고 중얼거렸다.

“그른그 필으읎드그으…. (그런 거 필요 없다고요….)”

“응? 뭐라고?”

“에이, 형님. 그건 아무리 형님이라도 안 돼요. 시험은 공정하게 쳐야죠.”

그래! 그러니까 이거 좀 놔!

그딴 쓰레기 같은 문제는 눈 감고 발로도 풀 수 있다고!

오스카는 죠에게 잡힌 팔목을 힘껏 빼 보려 했으나, 두툼한 손에 잡혀 꿈쩍도 안 했다.

아아, 지난 3년이여…….

운동도 좀 할걸.

“아아니, 뭐 부정한 방법으로 붙이라는 게 아니고, 그냥 기특하게 좀 봐 달라는 거지. 젊은 친구가 연고도 없는 공국에 이민 와서 일자리 찾고 있거든.”

“허어, 그래요?”

으아아악!

과한 친절을 베푼답시고 ‘이민 와서’ ‘일자리를 찾으러’ ‘마탑에 시험 보러 가는’ 오스카의 사정을 줄줄 읊은 죠.

어째 묘한 사연을 가진 남자가 지금 뒤도 안 돌아보고 얼굴을 감춘 채 2층으로 뛰어 올라간다면?

눈치 빠른 에녹은 이상함을 느낄 수도 있었다.

상대가 어느 정도로 자신을 인지해야 금제가 발동되는지, 오스카도 정확히는 알지 못하므로….

최악의 상황에는, 내일 아침 여관방에서 싸늘한 시체로 발견될 수도 있는 것이다!

‘침착해. 죽기 싫으면 자연스럽게 행동하면 돼.’

위험한 상황이긴 하지만, 에녹은 어차피 넘어야 할 산이기도 했다.

애초에 죽기 싫었으면 리리스 보러 가서도 안 됐지. 그러니 애 아빠와의 만남도 늦든 빠르든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할 수 있다.’

아는 사람 마주쳐도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게 3년 동안 그 고생을 했던 것 아닌가.

‘할 수 있어, 오스카 마뉘엘.’

절체절명의 순간.

침을 꿀꺽, 삼킨 오스카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돌아보았다.

이내, 3년 반 만의 조우.

“…….”

“…….”

두 남자는 말없이 서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빠가 힘을 숨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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