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화
‘이 인간은 변한 게 없네.’
오스카는 생각했다. 3년 반이면 짧은 시간이 아닌데도 에녹은 여전했다.
아빠만큼 잘생긴 사람 못 봤다며 아이가 입에 침이 마르게 찬양하던 얼굴이나 딸 번쩍번쩍 들던 훤칠한 몸까지.
아마 훌쩍 자랐을 리리스도 에녹에겐 여전히 가뿐하겠지.
‘에이 씨, 나도 운동 좀 할걸.’
시답잖은 생각에 빠졌던 오스카는 흠칫했다.
말없이, 가늘게 뜬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가만 고개를 기울이는 에녹…….
“선생님!”
오스카는 급히, 옆에 있던 죠의 손을 잡으며 제게 쏠려 있던 에녹의 신경을 옮겼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저는 괜찮습니다.”
“으응?”
마음 같아서는 쓸데없는 친절이 사람 죽인다며 바락바락 성질내고 싶지만, 꾹 참자.
‘그딴 식으로 사람 뽑아서, 마탑을 대가리에 똥만 찬 무지렁이들 집합소로 만들 일 있어요?’
진짜 하고 싶은 말도 삼키고.
“공정한 절차를 거쳐야 모두에게 평등한 기회가 돌아가겠죠. 지원자들 전부 열심히 준비했을 텐데, 정정당당하게 시험 보고 싶습니다.”
“에엥? 아니, 나는 실력 없는 사람 몰래 뽑으라는 게 아니고 그냥, 리리스가 자네 이름이나마 좀 알아두면….”
“아니요, 선생님.”
오스카가 민망해하는 죠의 말을 잘랐다.
‘내가 저 쓰레기 같은 문제 하나 못 풀어서 뒷구멍으로 부정 청탁을 해야만 마탑 들어갈 수 있는 놈으로 보여요?’
아니야. 이거 아니야. 삼켜, 삼켜.
“열심히 준비했으니까 선생님 도움 없이도 괜찮습니다. 혹시 결과가 좋지 않아도 제 노력이 부족했다고 생각할게요. 마음만 감사하게 받겠습니다.”
“어흐흠.”
“…하, 하하하. 나도 참.”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에녹이 어쩐지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죠에게 말했다.
“그래요, 형님. 그게 맞죠. 형님은 좋은 마음이지만, 이 친구는 부담스러울 거예요.”
“제임스, 여기!”
“아, 수잔.”
그때, 타이밍 좋게 식당 주방에서 수잔이 나왔다. 에녹은 수잔이 건넨 반찬을 받고, 부부와 살갑게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오스카는 에녹이 제게서 관심을 거둔 그제야 겨우, 몇 걸음 떨어져 긴장을 달랬다.
“아! 내일 시험, 꼭 좋은 결과 있길 바랄게요.”
돌아가려는지 에녹이 자신을 향해 인사하자,
“예, 감사합니다….”
쿵, 쾅, 쿵, 쾅.
다시 미칠 듯이 뛰는 심장.
오스카는 붙박인 듯 그 자리에 서서 에녹과 그를 배웅하는 부부를 한참 응시하다가.
“후아!”
에녹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가슴을 붙잡고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후, 하. 후, 하.”
하마터면 죽을 뻔…….
“제임스! 그렇게 자신 있는 거야?”
“…….”
돌아온 죠가 허허 웃으며 어깨를 툭 치자 오스카가 휘청거렸다.
으아아악!
화가! 화가 난다!
‘이 미친 털북숭이 아저씨야! 하마터면 뒤질 뻔했잖아! 당신 때문에 나 방금 지옥 문턱 구경하고 온 거 알아? 식당에서 시체 치우고 싶어서 안달이 나셨나?’
턱까지 차오른 말을 꾹꾹 삼키며, 오스카는 웃었다.
“하하하하! 그으으럼요!”
* * *
휴일이다!
‘…는 무슨.’
마탑 신입 연구원 채용 시험이 있는 날.
휴일은 반납했지만, 나는 독재자 한스 위버를 상대로 위대한 투쟁을 벌여 지원자들이 1, 2, 3차 시험을 보는 오전에는 반차를 받아냈다.
하지만 그 황금 같은 오전의 휴식마저도 마치 쏜 화살처럼 눈 깜빡할 새 가 버리더라.
지금은 오후 출근길, 마차 안.
“이번에는 몇 명이나 지원했다고 했지?”
딸과 시간을 보내려고 쉬는 날을 맞췄지만, 안타깝게도 그냥 혼자 노는 사람이 되어 버린 아빠와.
“천 명 넘게 지원했다던데요.”
여자 친구 얼굴 보려고 짧은 오전 시간이나마 들른 체시어가 마탑까지 바래다주는 중.
“와, 천 명이나? 그중에서 몇 명 뽑는데?”
“그런 제한 없어. 성적 되면 다 뽑지.”
내 말에 아빠가 반색했다.
“정말? 그래도 돼? 마탑 인력 포화 상태 되겠는데?”
과연 그럴까?
내가 만든 문제를 미리 풀어봤던 체시어는 아빠를 향해 그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많이 어려운가 보구나.”
그의 반응을 보고 깨달은 아빠는 한숨을 쉬었다.
“아빠, 둘이 어디 놀러 가지 말고 집에서 기다리고 있어. 어쩌면 나 바로 퇴근할 수도 있거든. 감독관은 무슨, 시험 감독도 3차까지 합격하고 최종까지 올라온 지원자가 있을 때의 얘기야.”
“아니, 그 정도야?”
어쩐지 아빠는 걱정하는 얼굴이 되어 중얼거렸다.
“…힘들겠네.”
“으앙아아…. 지옥에 왔어….”
어느새 창밖으로는 마탑 건물이 보였다. 나는 직장인의 비애를 담아 절규했다.
“공주, 오늘도 수고하세용~”
“퇴근 시간 맞춰서 데리러 갈게.”
따라 내려 배웅해 주는 두 남자를 보며 나는 새삼, 힘든 것도 잊고서 웃고 말았다.
“뭐야, 우리 공주. 웃음이 나와? 너무 힘들어서 그래?”
“…….”
실없이 웃는 나를 보며, 아빠와 체시어가 걱정하는 얼굴이 됐다.
“아니, 아니.”
나는 고개를 젓고 둘에게 다가가 먼저 아빠의 뺨에 쪽, 입을 맞췄다.
“아빠, 사랑해.”
그리고는 내가 가까이 다가가려 하니 아빠의 눈치를 보는 체시어의 뺨에도, 쪽.
“…자기도 사랑해?”
고백은 민망해할까 봐 작게 속삭여 줬다. 얼굴을 붉힌 체시어가 “나도.” 하고 조그맣게 대답했다.
“내 사랑들! 둘 다 고마워요!”
“……?”
“……?”
머리 위로 하트를 만들어 보이며 하는 새삼스러운 인사에, 두 남자는 의아해했다.
나는 그들을 계속 눈에 담으며 뒤로 천천히, 한 발짝씩 물러났다.
나를 사랑하는,
이 세계의 주인공들.
실패했던 시간을 도려내고,
끝내 이 세계에 나를 계속 살아 숨 쉬게 해 준 이들.
멀찍이 물러선 나는, 양손 검지와 엄지를 펼쳐 네모난 세상에 나란히 선 두 주인공을 담았다.
이제 딱 한 사람만 돌아오고 나면 완성될,
나의 빛나는 세계.
나는 환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다녀오겠습니다!”
* * *
마탑 연구원, 카렌은 최종 시험 감독관, 리리스와 함께 면담장으로 향하며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와, 그 극악의 시험을 3차까지 통과한 사람이 있긴 하네요?”
연구원 가운을 걸치며 카렌과 함께 급하게 복도를 가로지르는 리리스의 목소리도 들떠 있었다.
“지원자는 어디 있어요? 시험장에 가 있나?”
“아뇨, 지금은 마탑주님이랑 면담 중이에요.”
“엑. 벌써요?”
“어차피 최종 시험도 거뜬히 합격할 거라면서 마탑주님 기대가 크시더라고요. 공녀님도 지원자 얼굴 보신 후에, 같이 시험장으로 이동하시면 되겠어요.”
카렌이 울먹이며 흥분했다.
“지원자 1086명 중에 1차 통과 10명, 2차에서 2명, 그리고 3차까지 살아남은 최후의 한 명! 그 한 명이 이 길 끝에 있어요!”
그녀가 유독 행복해하는 이유가 있었다.
새파랗게 어린 상사, 전대 마탑주 오스카 마뉘엘에게 죽어라 시달려 왔던 카렌.
3년 전, 갑작스러운 그의 잠적에 놀랐던 것도 잠시.
‘그래도 이제 마탑의 황제가 사라졌으니 숨구멍은 좀 트이겠네.’
―했는데,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오스카 가고 한스 왔다!
새로운 독재자, 한스 위버는 오스카보다 더 어리고 더 지독했다.
“공녀님, 드디어 제 은퇴가 코앞이에요. 제발 이번에는 합격자가 나와 줘야 해.”
돈도 벌 만큼 벌었겠다, 이제는 강제 징병을 피해 마탑에 숨어야 할 필요도 없으니 이딴 지옥 같은 직장 때려치우고 가족들이랑 오순도순 살 거야!
―하는 계획도 뜻대로 안 됐다.
한스가 마탑의 인력 부족을 들먹이며 사직서 수리도 안 해 줬기 때문이다.
“맞다. 마탑주님이 신입 들어오면 카렌 씨 은퇴 받아주기로 했었죠?”
“네! 저는 오늘 같은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고요!”
카렌이 감격했다.
“이번에는 느낌이 왔어요. 이 사람, 천재야. 1차는 만점, 2차는 78점, 3차는 86점이라는 어마어마한 성적이거든요.”
지원자 서류를 뒤적이며 카렌이 하는 말에 리리스가 놀랐다.
“세상에. 정말요?”
“네. 대단하죠?”
“아, 그보다는 점수가 신기해서요. 2차 78에 3차 86이면 딱 커트라인이잖아요. 꼭 일부러 맞춘 것같이.”
“어머, 생각해 보니까 그러네요?”
“어쩌면, 문제 난이도 구분도 잘 안 될 만큼 천재일지도 몰라요. 1차 시험 끝나니까 천 명 중에 고작 열 명만 통과한 거 보고 어라, 싶었던 거지.”
리리스도 흥분하며 덧붙였다.
“너무 튀어서 주목받는 게 싫었을지도요? 그래서 2, 3차는 몇 문제 틀려서 딱 합격점에 맞춘 거야. 원래 1등급만큼 받기 어려운 게 9등급이거든요. 답 다 알고 일부러 틀리는 거니까.”
“하하하! 설마요~”
“사실 진짜 천재가 나와 줬으면 하는 제 바람이에요. 그나저나 그렇게 똑똑한 사람을 왜 이제야 발견했지? 저번 시험이 더 쉬웠는데, 저번에는 떨어졌어요?”
“아뇨, 이번이 첫 지원. 공국 사람 아니더라고요. 카르타 왕국 출신인데 이민 왔대요.”
“네?”
면담장 문을 코앞에 두고, 어쩐지 리리스가 멈춰 섰다.
“저… 카렌, 저도 지원자 서류 좀 보여 주세요.”
“여기요.”
서류를 넘겨받고 재빨리 맨 위에서부터 훑던 리리스의 시선이, 지원자의 이름에서 멈칫했다.
제임스 그레이
이 나라에 널리고 널린, 특별할 것 없는 남자 이름.
하지만 리리스에게만은, 특별하게 들릴 수밖에 없는 이름.
우연일까?
묘한 기분…….
쿵, 쿵, 쿵.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이내 카렌이 문을 열었고, 리리스는 서류로 향해 있던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아빠가 힘을 숨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