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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힘을 숨김-260화 (완결) (261/261)

260화(完)

* * *

인사를 나누고, 감독관인 리리스와 단둘이 들어오게 된 시험장.

오스카는 그간의 그리움을 해갈하려는 듯 틈날 때마다 아이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아무래도 최종 시험이다 보니 3차 때보다도 문제 난도가 좀 높을 거예요.”

“아, 예.”

오스카의 앞에 시험지를 놓으며 마주 앉은 리리스가 행복한 얼굴로 조잘거렸다.

“제가 최종 시험 문제지를 딱 열 장 뽑았거든요? 실은 이마저도 다 폐기 처분할 줄 알았어요. 그래도 한 장 정도는 풀어 줄 사람이 생겼다니 너무 신나는 거 있죠?”

뭐가 그리 좋은지.

리리스는 방긋방긋 웃으며 자기도 펜을 잡았다.

“합격점은 85점이에요. 좋은 결과 있길 바랄게요. 혼자 풀면 심심하실 테니까 저도 여기서 같이 풀어 드릴게요.”

“…….”

오스카는 턱을 괸 채, 집중하기 시작하는 리리스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펜 소리가 나지 않아서일까.

고개를 든 리리스가 오스카를 보며 갸웃했다.

“어려우세요?”

“아아, 아뇨.”

겨우 정신을 차린 오스카가 시험지를 앞뒤로 돌려 가며 문제를 대강 훑었다.

‘…대체 어디가 3차 때보다 어렵다는 거야.’

암만 봐도 ‘최종 시험’이라고 거창하게 이름 붙인 의미가 없어 보이는 문제들이다.

‘하아, 이 변별력이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문제들은 또 어떤 무지렁이가 냈을까….’

한숨을 삼킨 오스카가 앞장에 쓰인 출제자의 이름을 보았다.

출제자: 리리스 루빈슈타인

‘…다시 보니 꽤 어렵네. 최종 시험 문제를 제일 잘 내긴 했다.’

속으로 정정한 오스카가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제임스 씨, 혹시 <탑에 갇힌 공주님>이라는 동화 아세요?”

“…아뇨.”

“재미있는데. 방해가 안 된다면, 얘기해 드릴까요?”

어지간히 심심한가 보네.

피식 웃은 오스카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제 푸는 손을 빨리했다.

“옛날, 아주 옛날에, 나쁜 나라를 다스리는 나쁜 왕이 살았대요. 그 나쁜 왕은 착한 나라의 공주님을 납치해서 탑에 가둬버렸어요.”

사각사각.

펜 소리와 섞여 물 흐르듯 귀로 스미는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착한 나라의 착한 왕은, 빼앗긴 딸을 돌려받으려고 어쩔 수 없이 나쁜 왕의 부하가 됐어요. 그런데 슬프게도 착한 왕은 딸을 다시 못 만났어요. 탑에 갇혀서 시름시름 앓던 공주가 죽어버렸거든요.”

비극적인 동화네, 하고 오스카는 생각했다.

“착한 왕은 복수하기로 결심하고, 왕자님이랑 같이 나쁜 나라로 쳐들어갔죠. 결국에는 나쁜 왕을 죽이는 데 성공했어요. 하지만!”

“…하지만?”

“알고 보니 공주님이 죽지 않고 살아있었던 거예요!”

오스카가 웃었다.

‘지 얘기구만.’

어째 내용이 묘하게 익숙하다 싶더라니.

“그런데 나쁜 왕의 마법에 걸린 공주님은, 사람들을 막 죽이기 시작했어요. 하는 수 없이 왕자님은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 공주님을 죽였어요. 불쌍한 착한 왕은, 딸이 살아있었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또 이별해야 했구요.”

“비극이네요.”

“네. 그런데 이 동화에는 숨겨진 뒷이야기가 있어요.”

“뭔데요?”

“실은요. 공주님이 탑에 갇혀 있는 동안… 외롭지 않게 매일매일 찾아오고, 놀아 주고, 머리가 길면 잘라 주고…, 또, 사랑한다고 말해 주기도 하던 마법사가 있었거든요.”

“…….”

“그 마법사는 공주의 죽음이 너무너무 슬퍼서, 결국 무서운 대가를 내고 시간을 돌리는 마법을 부렸어요.”

“…….”

오스카는 가만히 리리스를 쳐다보았다. 아이의 푸른 눈동자에는 어렴풋한 그리움이 스며 있었다.

“대가는, 마법사가 모든 사람에게 잊히는 거였어요. 살아난 공주는 그 사실을 알고 약속했어요. 세상 모든 사람이 당신을 알아보지 못해도, 저는 당신을 꼭 알아볼게요― 하고.”

“그래서, 알아봤어요?”

“네!”

해맑게 대답하는 리리스를 보며 오스카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아이가 제멋대로 지어냈을 동화의 결말은 썩 나쁘지 않았다. 현실도 그 동화의 결말 같았다면 좋았을 텐데.

모두에게 잊혀도, 너만 나를 잊지 않아 줬더라면….

“음.”

괜히 울적해지는 기분을 삼키려 손을 빨리하던 오스카는, 마지막 50번 문제에서 멈칫했다.

50. 당신이 만든 세계를 보여 주세요.

‘이게 뭐야.’

하등 쓸모없어 보이는 이 문제는 대체 뭘까. 49번 문항까지 만들던 리리스가 지쳐버리기라도 했던 걸까.

“저기…. 50번, 이거… 뭐, 어떻게 하라는 거예요?”

“네?”

리리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떻게 하라니요? 문제 그대로 푸시면 되는데요?”

“그림을 그리라는 거예요?”

“네.”

“대체 이런 문제가 연구원 채용에 무슨 쓸모가 있습니까?”

“오, 당연히 쓸모 있죠. 마법식을 만드는 데 제일 기본이 되는 건 바로 상상력이거든요.”

“…….”

그냥 문제 내기 귀찮았다고 하지.

오스카는 한숨을 삼키며 답안지 위에 펜을 꾸욱, 눌렀다.

그때.

“있죠, 평생을 탑에 갇혀 살았던 공주는 바깥세상이 궁금했어요. 마법사는 그런 공주에게 하나부터 열까지, 말로 세상을 알려 줬고요.”

리리스가 일어났다.

“공주는 마법사의 말을 들으면서 머릿속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었어요. 그러니까 공주는, 마법사에게 하나의 세계를 선물 받은 거나 다름없죠.”

오스카의 옆으로 옮겨 앉은 리리스가 제 문제지를 내보였다.

“어려우시면, 제가 50번 문제를 푸는 걸 보여 드릴게요.”

“아니, 저기.”

리리스의 문제지는 50번 문항을 빼고 전부 풀이가 적혀 있었다.

오스카가 답이나 다름없는 문제지에서 눈을 떼며 말했다.

“직접 다 푸신 것 같은데, 이렇게 보여 주셔도 됩니까?”

“풉.”

웃음을 터뜨린 리리스가 제 팔꿈치로 오스카의 가슴을 쿡 찔렀다.

“……?”

그러자 남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초면에 놀라우리만치 친근한 행동 아닌가.

“어차피 제임스 씨, 눈 감고도 다 맞히실 문제들이잖아요.”

“…예?”

“아니면 합격점 딱 맞춰서 일부러 몇 개 틀리시려나?”

“그게 뭔….”

당황할 새도 없이 리리스는 쿡쿡 웃으며 50번 문제 아래 그림을 그려나갔다.

“착한 왕이랑 왕자님.”

두 사람.

“그리고 공주님이랑 마법사.”

그 아래, 또 두 사람.

“이건, 말 없이도 붕붕 달릴 수 있는 마차구요….”

다음으로 리리스의 손끝에서 그려지는 그림에 오스카의 눈이 커졌다.

그래….

언젠가 꼭, 본 적이 있는 그림이었다.

“또 이건, 사람들을 태우는 새.”

세상을 잃어버렸던 아이가, 세상을 알려 주고 싶었던 오스카로부터.

말로 듣고, 그려냈던 것들.

“봐요. 당신이 저한테 선물해 줬던 세상이에요.”

잠시간의 정적.

그것을 깨고,

“…스승님.”

아이의 사무쳤을 그리움이, 자신을 부르는 말을 만들어낸 순간.

“아….”

벅차게, 숨이 막히고.

커진 눈은 순식간에 젖어 들었다.

“이거, 제가 뭐라고 이름 붙였는지 기억하세요?”

돌아본 아이의 눈에도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럼에도 웃는다.

“제가 말했잖아요. 저는 스승님 안 잊어버린다고.”

한 줄기 눈물이 오스카의 뺨을 타고 흘렀다. 그도 울며, 아이를 따라 웃었다.

“…자동, 차.”

“그럼, 이건?”

“비행기….”

리리스가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면서도 쉴 새 없이 눈물은 흘러내렸다.

“약속했잖아요. 꼭, 스승님 알아보겠다고….”

“…….”

“안 믿었죠. 바보….”

“그래….”

리리스가 가쁜 울음을 쏟아내며 오스카에게 안겨들었다.

“아, 하아….”

품에 안긴 온기에 가슴이 아렸다.

너무 벅차서, 기뻐서 아팠다.

남자는 떨리는 팔로 아이를 힘껏 끌어안았다.

“스승님이 선물해 준 세상은 너무너무 좋았지만, 그래도 스승님 다시 만나려고…. 여기서, 제가 행복하게 사는 걸 보여 주려고…. 그래서 돌아왔다고 했잖아요.”

“응….”

얼굴을 파묻고 웅얼거리던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오스카는 그리웠던 얼굴을 전부 제 눈에 새겨 넣으며, 아이의 뺨을 감싸 쥐었다.

“그래서… 마법사를 만난 공주님은 어떻게 됐어?”

“당연히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죠.”

리리스는 환하게 웃으며, 걱정할 오스카를 위해 덧붙였다.

“스승님 제자, 한스 잘 큰 거 보셨죠?”

신은 자신의 영웅과, 영웅이 사랑하는 이들을 결코 외면하지 않았을 것이다.

공주님을 위해 마법사를 보냈고, 끝내 실패한 시간을 지워냈으며, 결국 마지막 프리메라를 허락했음이 그 증거였다.

“한스가 스승님을 위해서 잠도 안 자고 마법식을 마흔두 개나 만들어 놨다구요.”

그러니까 신조차도 어찌할 수 없을 세계의 섭리를, 오스카의 금제를 깨트릴 방법도 안배했으리라고 리리스는 믿었다.

“우리는 꼭, 행복할 거예요.”

그러므로 그들은 방법을 찾을 것이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평생, 오래오래, 같이.”

둘은 눈물에 엉망이 된 얼굴로, 가까이서 마주 보며 환히 웃었다.

* * *

나의 시간은 멈춘 적 없었다.

갇혀 있던 그때에도 당신이 알려 준 세상 속에서 언제나 흘렀고.

돌아와 끝내 살아남은 지금에도 계속 흐르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흐를 것이다.

나를 사랑하는,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 모여 비로소 완벽해진.

“스승님, 잘 돌아왔어요.”

이 빛나는 세계에서.

<아빠가 힘을 숨김>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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