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악역에게 이곳이 소설인 걸 들켰다 (1)2021.06.03.
수많은 귀족 영애의 부러움과 질투를 한 몸에 받으며 잘생기고 능력 있는 다섯 살 연하남의 아내가 되는 날. 검은색 단발머리 위에 웨딩 티아라를 올리고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있는 나는 누구보다 행복한 신부……는 개뿔. 옷 소매에 칼을 감추고 있는 남편의 팔을 겨우 붙잡으며 버진로드 위를 걷고 있었다. 그러니까 난 도망가면 목을 베어버리겠다고 겁을 주고 있는 남자의 아내가 되는 것이었다. 내 남편이 될 시카르 공작의 연기는 생각보다 뛰어났다. 그는 사람들을 향해 환한 미소를 짓고는 복화술을 하듯 입술을 꾹 다물고 말했다.
“표정 관리 좀 하지?”
“표정 관리 좀 하게 칼은 좀 놓고 얘기하지?”
“그건 어렵겠군. 여차하면 도망갈 기회만 노리는 신부를 붙잡을 방법이 이것뿐이라서 말이지.”
툭하면 죽이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악역 남편인데, 내가 도망 안 가게 생겼냐고. 거기다, 아무리 계약 결혼이지만 역사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처참한 죽음을 맞이하는 악역의 아내라니. 내 앞날에 망조가 드리워진 기분이었다.
1화. 악역에게 이곳이 소설인 걸 들켰다 (1) 내가 이 세계에 온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어린이집 교사로 일하던 나는 그날도 아이들을 하교시키던 중이었다. 스쿨존 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바람에 긴장을 바짝 하고 있는 가운데에도 신호 위반 차량이 아이를 향해 달려가는 게 보였다. 아이를 보호해야만 한다는 사명과 일념으로 본능적으로 도로로 뛰어들어 아이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눈을 뜨고 보니 이곳이었다. 연고라고는 하나도 없는 이 소설 속에 갑자기 떨어진 나는 광장 주변의 후미진 골목에서 눈을 떴다. 소설 속 조연도 아니고, 그렇다고 엑스트라도 아니고. 그냥 정말 이 세계에 온전히 나라는 인간 하나가 하늘에서 뚝 떨어져 버린 것이다. 지금 내 남편이 된 이 남자, 시카르는 소설이 끝나갈 무렵 처절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악역이었다. 소설에서 그가 죽을 때 태어나 한 번도 웃어 본 적이 없는 게 한이라는 말이 슬프게 느껴졌다. 나도 정말 속 시원하게 웃어본 적이 언제였던가 싶은 생각과 함께, 악역의 마지막 대사에 공감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이곳으로 떨어진 걸까? 맨몸으로 이곳에 떨어진 나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한마디로 무일푼 거지 신세였다. 하필 겨울에 떨어진 터라 추위에 떨던 나는 노숙자처럼 거리를 배회하던 중, 광장에 모여 시끄럽게 아우성을 지르고 있는 사람들을 보게 되었다.
“폭군 폐왕을 처단하라!”
“폐왕을 죽여라!”
처음 듣는 언어임에도 무슨 말인지 모두 알아들을 수 있는 게 신기하다고 느끼며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광장 중앙 단상 위에는 사람들에게 돌팔매질을 당해 여기저기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한 남자가 밧줄에 묶인 채 주저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앞으로 근사한 제복을 입은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남자의 손에는 길고 날카로운 장검이 들려 있었다.
“시카르 블레이크 공작님이시다!!”
“시카르 블레이크 님이시여!! 왕국을 망하게 한 폐왕을 처단해주시옵소서!!”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나는 이곳이 내가 보던 소설 속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시카르 블레이크는 폐왕을 몰아내고 새로운 왕을 추대하는 악역으로, 손만 대면 사람의 기억을 읽어내는 능력이 있는 무시무시한 인물이었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오늘이 바로 폐왕이 처형당하는 날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지금이 소설이 시작하는 때였다. 그 순간 나는, 당분간 몸을 기거할 수 있는 빈집이 하나 떠올랐다. 너무 춥고 배가 고파서 당장이라도 바닥에 쓰러질 것 같았던 나는 겨우겨우 도시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마운트 힐로 갈 수 있었다. 마운트 힐은 블레이크 영지에 있는 작은 마을로 이곳에는 주인공이 임시로 머물게 될 작은 농가가 있는 곳이었다. 그 집은 소설에서 주인공이 어릴 때 머물 집으로 마련된 곳이기에 원래 주인도 없는 빈집이었다. 잠시나마 머물기에는 이보다 안전한 곳이 없을 만큼. 집 안은 마치 주인공을 만날 준비를 하고 있는 듯 각종 먹거리와 장작 등이 충분히 있는 데다 부엌에 있는 음식들은 방금 장을 봐온 듯 모두 싱싱한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역시 주인공을 위한 집이기 때문에 모두 싱싱한 상태로 보존돼 있는 것이겠지.’
배고픔도 배고픔이었지만, 추위에 지친 나는 벽난로에 장작부터 지폈다. 이빨이 딱딱 부딪히는 소리가 날 만큼 입이 떨리는 맹추위에 나는 몸이 다 녹을 때까지 벽난로 앞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온기가 조금 돌아오고 나니 이제야 극심한 허기가 지기 시작했다.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음식을 먹으려니 조금 미안해진 나는 주방 선반에 있는 우유를 들이켜기 전에 먼저 주인공에게 허락을 구하듯 조용히 읊조렸다.
‘조금만 먹을게.’
주인공이 오려면 일주일 정도밖에 남지 않았기에 그동안 이 몸 하나 기거할 수 있는 수도원이라도 알아봐야 했다. 이 세계에 있는 수도원에서는 갈 곳 없는 사람들을 먹여주고 재워주고 했기 때문에 현재의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그곳뿐이었다. 먼저, 당장 마실 물을 좀 퍼 올리기 위해 집 앞 우물을 찾았을 때였다. 갑자기 할머니 한 분이 나를 향해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언니! 언니! ”
할머니는 나를 보자마자 언니라 부르며 쫓아다녔다. 처음엔 너무나 당황스러웠지만, 곧 치매로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가 떠올랐기에 무작정 외면할 수가 없었다. 치안도 부실한 이곳에서 혼자 지내는 것도 조금 무섭기도 했던 탓에 나는 고민 끝에 할머니를 주인공의 집으로 데리고 왔다. 어차피 수도원을 찾아 거취를 옮길 때 이 할머니도 데려가면 될 일이었다. 할머니를 집으로 데려온 나는 먼저 누더기 같은 옷도 바꿔 입혀드리고 식사도 챙겨드렸다. 물론 주인공이 먹을 수 있는 건 남겨둬야 했기에 많이 먹을 수는 없어서 할머니와 함께 굶어 죽지 않을 만큼만 음식을 먹어야 했다. 그 정도 식사로는 허기를 완전히 채울 수 없었지만, 더 먹고 싶은 것을 꾹 참으며 음식을 남겼다.
‘배고파.’
경험상 배고플 때는 잠을 자는 게 최고다. 비루한 식사를 마친 후 나는 되도록 빨리 할머니와 함께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지듯 잠을 자던 중 갑자기 병사들이 들이닥쳤다. 살려달라 애원하기도 전에 병사들은 내 입에 재갈을 물린 후 두건을 씌웠다. 누가 날 어디로 끌고 가는 건지 알지 못한 채 나는 병사들에 의해 끌려갔다. *** 달그락거리는 소리만이 들리는 고요한 마차 안에서, 나는 어디로 끌려가는지도 모른 채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내가 너무 예뻐서 납치를 하는 건 아닐 테고, 낯선 행색을 한 이방인이라서 끌고 가는 건가? 이방인의 정체를 캐묻기 위해 끌고 간다고 해도, 왜 끌고 가는지 이유는 말해줄 테니 그것도 아닐 것이다. 그럼 대체 왜……? 내가 일 잘하게 생겨서 어디 하녀로 팔아넘기려는 무리인 걸까? 두려움 속에 입술을 물어뜯어 가며 아무리 지금 상황을 납득해 보려고 해도 내가 유추할 수 있는 건 없었다. 한참을 마차를 타고 간 후에야 어딘가에 도착한 듯 육중한 철문 소리와 함께 여기저기서 사람들의 낮은 목소리와 부산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윽고 사람들은 나를 마차에서 끌어 내리며 누군가에게 인계하는 것 같았다. 나는 또, 다시 끌려가 어떤 의자에 앉혔다.
‘설마 고문 의자라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상황이 이렇다 보니, 끝도 없이 불길한 생각만 들었다. 아무래도 차갑고 딱딱한 것이 고문 의자가 맞는 것 같았다. 엉덩이를 이리저리 비틀자 삐걱삐걱 소리까지 들려왔다. 그 순간 누군가 내 얼굴에 손을 대는 것이 느껴졌고, 나는 살려달라며 고개를 이리저리 비틀었다. 그러자 어떤 손길이 내 머리 위에 씌워 준 두건과 재갈을 벗겨 내었다. 밝은 불빛 때문에 제대로 눈을 뜰 수 없었던 나는, 몇 번이나 눈을 껌벅거려야 했다. 희미한 시야가 걷어지고 사물이 뚜렷하게 보이기 시작하자 갑자기 내 눈앞에 나타난 것은 고문 도구가 아닌, 진수성찬이었다.
“네가 우리 할머니를 돌보아 주었더군.”
맞은 편에는 팔짱을 끼고 거만하게 고개를 쳐든 채 나를 내리깔고 보는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남자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너무 잘생겨서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그렇게 잠시 넋 놓고 보고 있자니, 이 남자를 어디서 본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 광장에서 본 그 남자야!’
그러니까 이 남자는 광장에서 본 시카르 블레이크였다. 나는 그제야 소설 속 내용이 떠오르며 그 할머니의 정체를 대강 짐작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소설 속에서 갑자기 치매가 찾아온 시카르의 할머니는 밖을 돌아다니다가 나쁜 놈들에게 걸려 옷이며 패물을 모두 빼앗기고 누더기 차림으로 돌아다니다가 동사로 죽게 된다. 할머니는 시카르에게 단 하나뿐인 피붙이였기에, 가뜩이나 반 미친놈이 따로 없는 시카르는 그날 이후로 더욱더 흑화되기 시작한다. 한마디로 할머니의 죽음은 시카르를 더욱더 흑화시키기 위한 설정이었다.
‘내가 잠시 돌봐 준 할머니가 하필 이 소설 속 악역의 할머니였다니!’
나는 그가 낮에 단두대에서 폐왕의 목을 내려친 것이 떠올라 내 목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겉보기에는 매우 침착하고 점잖아 보였지만, 그가 점잖아 봤자 점잖게 미친놈이라는 걸 난 알고 있다. 시카르는 이마 아래로 흐트러져 내려오는 머리카락을 위로 쓸어 올리며 내 눈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니 그저 쳐다만 보고 있을 뿐인데도 기억을 읽히는 기분이었다. 그만큼 시카르의 눈매는 타인의 속을 꿰뚫고 보는 듯 날카로웠다.
“흑발에 검은 눈동자라……. 어디서도 본 적이 없는 신비로운 외모를 지니고 있군. 옷차림도 해괴하고……. 어쨌든, 우리 할머니를 잘 보살펴준 것에 대한 보상은 섭섭지 않게 하겠지만, 더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해 보거라.”
그러니까, 지금 내게 돈을 주겠다고 하는 것 같은데. 본디, 물 들어올 때 노를 저으라는 말이 있지. 지금 이때가 아니면 또 언제 이런 기회를 얻을 수 있겠냐, 이 말이다. 나는 괜찮습니다, 라는 마음에 없는 겸손을 떨기에는 지독한 배고픔과 추위에 너무 시달린 상태였다.
“보상을 바라고 한 일은 아니지만, 뭐든 되는대로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내 말은 되는대로 뭐든 다 달란 말이었다. 일단 주는 대로 다 챙겨 받아야 이 세계에서 목구멍에 풀칠은 하고 살 수 있을 테니까. 시카르는 본인 성격이 겸손을 몰라서 그런지 내가 전혀 겸양하지 않고 되는대로 다 달라고 해도 아랑곳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부족함 없이 보상하도록 하지.”
성질은 무서워도 성격은 시원한 시카르는 몇 년은 놀고먹고 지내도 좋을 만큼의 보상을 내렸다. 나는 혀가 닳을 정도로 감사합니다란 인사를 한 후 그가 준 두둑한 보상금을 챙겨 들고 공작저를 빠져나가기 위해 마차에 올랐다. 그런데, 갑자기 할머니가 마차에 같이 올라타 나를 붙들고 늘어졌다.
“언니! 어디가! 언니! 가지 마!”
……당황스러웠다. 아니, 무서웠다. ‘정말 왜 이러세요. 할머니’ 소리가 절로 나올 만큼이었다. 할머니는 나를 못 가게 말리며 눈물을 뚝뚝 흘렸지만, 정작 울고 싶은 사람은 나였다.
“할머니 이러시면 안 돼요……. 저 가야 해요……. 저 죽일 작정은 아니시죠?”
‘여기 더 있다가 시카르의 손에 기억을 들키게 되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요!’
이곳이 소설이라고? 하며 나를 죽이고도 남을 미친놈이란 말입니다. 하지만, 할머니가 울고불고하는 통에, 나는 공작저를 나갈 수가 없었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버텨 봤지만, 결국 마차에서 끌려 나왔다.
‘이거, 은인을 이렇게 대해도 되는 거냐고!’
나는 또다시 병사들의 손에 이끌려 공작저로 들어가야만 했다. 병사들은 나를 시카르가 서 있는 테이블 앞 의자에 앉혔다. 그는 시선을 내리깔고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네가 여기서 우리 할머니의 말동무로 머물러 준다면 네가 평생 호의호식하며 놀고먹고도 남을 만큼의 재물을 주겠다. 어때? 나와 거래를 하는 게.”
여기서는 거래를 할 때 사람의 목에 칼을 겨누나 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