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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악역에게 이곳이 소설인 걸 들켰다 (2) (2/197)

2화. 악역에게 이곳이 소설인 걸 들켰다 (2)2021.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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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카르는 내 목을 향해 장검을 겨누며 여차하면 베기라도 하겠다는 듯 이리저리 흔들고 있었다. 겉으로는 거래라는 명분을 대고 있지만, 그건 거절하면 죽이겠다는 위협과 다를 바가 없었다.

16549769341305.png“조건은 되도록 네가 원하는 대로 맞춰줄 것이고, 네게 개인 하녀도 붙여줄 것이다.”

나는 내 목 아래에서 흔들리는 검을 노려본 후 그를 향해 진땀을 흘리며 말했다.

1654976934131.png“제, 제가 언제까지 지내야 하는 거죠?”

16549769341305.png“우리 할머니가 나아지실 동안은 이 집에 있어야겠지.”

아니, 뭐! 이런 억지가 어디 있냐고! 라고 혼자서 부르짖어 봤자 이 세계의 절대권력자에게 통할 리가 없었다. 나는 맥없이 늘어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1654976934131.png“……네.”

그제야 그는 내 목 아래에서 춤을 추던 장검을 거두었다.

16549769341305.png“말이 좀 통하는군. 곧 하녀가 너에게 방을 안내할 테니 기다려라.”

시카르가 빠져나가고 난 후 나는 나도 모르게 도망갈 곳은 없을까 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현재는 이 세계에서 이곳이 가장 안전한 곳이지만, 10년 후엔 이곳이 이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곳으로 바뀌고 만다. 그는 악역인 만큼 10년 뒤 잘 자란 주인공에 의해서 죽게 되니까. 물론 10년 후의 일이 두려워서 당장이라도 이 집을 나가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시카르는 타인을 믿지 못하는 성격이기에, 항상 누군가를 곁에 두기 전에 그 사람의 기억을 확인했다. 그러니까, 내가 이 집에 있게 되면, 곧 그에게 내 기억을 읽히게 되고 말 것이다. 그러면, 그는 이 세계가 소설인 것을 알게 될 것이고 안 그래도 미쳐 있는 저 남자가 이곳이 소설인 것까지 알게 되면 더 미쳐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나를 마녀라고 생각하며 내 목을 댕강 쳐낼지도 모르지. 정말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혼자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테이블에 머리를 처박고 있을 때쯤, 단정하게 머리를 뒤로 묶은 하녀 한 명이 방으로 들어왔다.

16549769341325.jpg“안녕하세요. 앞으로 아가씨의 시중을 들게 될 메이리라고 합니다.”

메이리는 이제 갓 스무 살 정도로 보이는 귀엽고 앳된 외모였다.

16549769341325.jpg“따라오세요. 아가씨.”

메이리를 따라 들어간 방은 저택 2층 안쪽에 있는 방으로 크기만 해도 침대가 스무 개는 들어갈 정도로 큰 방이었다.

16549769341325.jpg“아가씨께서 식사를 하는 동안 꾸며보았는데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어요.”

메이리는 수줍게 웃으며 방 이곳저곳을 안내했다. 메이리가 가장 자신 있게 안내한 곳은 옷장이었다. 옷장에는 다른 세상에서 온 내 눈에도 값비싸 보이는 드레스가 몇 개 걸려 있었다.

16549769341325.jpg“집에 여자 옷이 없어서 급하게 구한 것이지만, 모두 값비싼 것들이랍니다. 이곳에서 지내시려면 먼저 그 이상한…… 앗, 죄송합니다. 아가씨. 먼저, 그 옷부터 갈아입으셔야겠어요.”

내 옷차림은 평범한 청바지에 티셔츠였지만, 이곳 사람들이 볼 때는 생소하고 이상할 법도 했다.

16549769341325.jpg“앞으론 머리도 기르시는 게 좋겠어요. 이곳의 귀족들은 모두 머리가 길거든요.”

1654976934131.png“네. 고마워요. 메이리. 이제 그만 나가보세요.”

메이리는 내 말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16549769341325.jpg“네?”

1654976934131.png“이만 나가보셔도 돼요. 저 옷 좀 갈아입게요.”

16549769341325.jpg“어머. 아가씨. 저에게 존대를 하시다뇨. 앞으로는 하대해주세요. 그리고 전 아가씨가 옷을 입는 걸 도와드려야 해서 지금 나갈 수 없답니다.”

누가 옷을 입혀준다니.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유아기 때 이후로 그런 일은 없었던 터라 나는 극구 사양했다.

1654976934131.png“괜찮아. 옷은 내가 입을게.”

16549769341325.jpg“혼자서 옷을 입기에는 불편하실 수 있어요. 앞 끈을 졸라야 하거든요.”

1654976934131.png“나 손목 힘이 좋아서 괜찮아.”

어린이집에서 매일 아이들을 안고 있었던 탓에 팔 힘이 확실히 좋아지긴 했지. 메이리는 곧 어쩔 줄 몰라 하며 울상을 지었다.

16549769341325.jpg“하녀장 님께서 알게 되시면, 아가씨를 제대로 모시지 않았다고 혼쭐이 나고 말 거예요. 어쩌면 이 저택에서 쫓겨날지도 모르고요. 저희 집은 가난해서 제가 이곳에서 쫓겨나게 되면 가족들의 생계가 막막해지게 돼요. 아가씨…… 제발 제가 입혀 드릴 수 있게 허락을 부탁드려요…….”

메이리는 잔뜩 기가 죽은 얼굴로 울상이 되었다. 나는 동태를 살피다 이 저택을 빠져나갈 계획이었기 때문에 보기만 해도 무거운 저 드레스는 입기가 싫었지만, 나중에 갈아입으면 되겠다 싶어서 알겠다고 했다. 그런데 막상 드레스를 입어보니 생각만큼 무겁지가 않았다.

1654976934131.png“드레스가 생각보다 가벼운데?”

메이리는 의아해하는 내 모습에 상냥하게 미소를 지었다.

16549769341325.jpg“이 드레스는 경량화가 돼 있어서 많이 무겁지 않아요. 아가씨.”

1654976934131.png“그래?”

대신 비싸겠지? 그럼 이건 나중에 팔면 되겠군.

16549769341325.jpg“그것보다, 아가씨. 거울 한 번 보시겠어요? 드레스가 너무 잘 어울려요. 너무 아름다워요. 아가씨.”

메이리는 그렇게 말하며 조르르 달려가더니 전신거울을 가져와 내 앞에 갖다 놓았다.

16549769341325.jpg“보세요. 아가씨. 정말 너무 아름다워요.”

이런 옷은 처음이었지만, 옷이 날개라던가? 내가 봐도 꽤 괜찮아 보였다.

16549769341325.jpg“이젠 머리를 다듬어 드릴게요, 아가씨.”

이 짧은 머리를 어떻게 손질을 하려는 건가 싶었지만, 메이리는 꽤 능수능란하게 내 머리를 땋고 있었다. 가만히 보니 벼 머리였다. 이 단발머리에서 최대한 꾸밀 수 있는 게 이 벼 머리였겠지만, 꽤 마음에 들었다. 모든 치장을 끝내고 아래로 내려가자 시카르의 할머니인 힐리스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단정하고 푸근한 모습의 그녀를 보니 정신이 돌아온 것 같았다.

16549769402101.png“오. 어서 와 앉거라. 나를 구해줬다고 들었다.”

1654976934131.png“아. 아니에요. 구해준 건 아니고 조금 도와드린 것뿐인걸요.”

힐리스는 감동한 눈으로 내 손을 맞잡았다.

16549769402101.png“치매 노인을 잠시라도 보살펴 준 것이 구해준 것이겠지. 참으로 마음씨가 예쁜 아이구나.”

힐리스의 손은 돌아가신 할머니가 다시 떠오를 만큼 매우 따뜻했다.

1654976934131.png“어르신을 보고 저희 할머니가 생각났을 뿐인걸요.”

16549769402101.png“오. 그랬구나. 할머니를 매우 사랑했던 모양이구나.”

1654976934131.png“할머니께 사랑을 많이 받았거든요…….”

오랜만에 느껴 본 따뜻함에 코끝이 살짝 찡할 뻔했던 그때, 하필 시카르가 나타나 산통을 다 깨 버렸다.

16549769341305.png“감히 공작가의 대마님을 두고 어르신이라고 부르다니. 원래대로라면 벌을 내려야겠지만, 우리 할머니를 구했으니 특별히 용서해주겠다.”

그럼 뭐라고 불러야 하는데? 라고 묻고 싶었지만, 나는 고개를 납작 낮추고 말했다.

1654976934131.png“자애로우신 공작님의 자비에 감복할 따름입니다.”

뭐, 이렇게 말하면 되는 건가? 시카르는 미소 짓진 않았지만, 내 대답이 나쁘지 않다는 듯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16549769341305.png“내 너를 용서해주는 뜻으로 나와 악수할 영광을 주지.”

그가 내민 손을 보는 순간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솟아났다. 그 손은 마치 죽음의 사자가 내미는 손과도 같았다. 일부러 내 기억을 읽으려고 악수를 청하는 거였다. 나는 매우 황공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1654976934131.png“공작님의 손을 맞잡는 일은 저에게 덧없이 영광된 일이겠사오나, 저에게는 차마 갚을 수 없는 은혜이옵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악수 못 하겠다, 이 말이다. 악수를 거절당해본 적 없는 시카르는 요것 봐라? 하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그는 재미있다는 얼굴로 손을 내렸지만, 그렇다고 물러선 건 아니었다. 그는 어떻게든 내 기억을 읽기 위해 다음 수법을 쓸 것이다. 시카르가 사람의 기억을 보기 위해 하는 순서가 있다. 급하게 기억을 읽고 싶을 땐 조금 전처럼 곧장 악수를 청한다. 하지만, 급하지 않을 때. 그러니까 자신의 아래에 둘 수하를 구한다던가 할 때는 자신은 손을 보고 사람을 판단한다는 해괴한 소리를 해대며 손을 보자고 한다. 귀족가의 영애들 손은 그렇게 함부로 만질 수가 없기 때문에 춤 신청을 하며 손을 잡기도 하고, 매너 있는 행동을 하며 손을 잡거나 팔을 잡아서 기억을 읽기도 한다. 그러니 신체 어디라도 시카르의 손에만 닿기만 하면 기억을 읽히는 것이다. 역시 악수가 통하지 않자, 시카르는 모든 수법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16549769341305.png“나는 항시 사람의 손을 보고 우리와 함께해도 되는지 아닌지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네가 어떤 사람인지 판단해야 하니, 내게 손 좀 내밀어 보거라.”

1654976934131.png‘나는 아쉬울 거 없다, 이거야.’

1654976934131.png“제가 여인의 손이라고 하기에는 손이 거친지라 이 손을 그 누구에게도 보이기가 두렵고 겁이 납니다. 제가 이 집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된다면 저를 내치셔도 괜찮습니다. 부디 넓은 아량을 베푸시어 제 가장 부끄러워하는 손을 보여달란 말은 물려주시면 감복할 따름이겠습니다.”

1654976934131.png‘안 통하지?’

시카르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이번에 내게 춤을 권했고 당연히 나는 거절했다.

1654976934131.png“저같이 미천한 신분과 춤을 추시게 되면 공작 각하의 위대한 업적에 누를 끼치게 될까 두렵습니다.”

1654976934131.png‘이제 이 정도 했으면 너도 좀 그만 포기해라.’

다행히 시카르는 오늘은 포기한 듯 보였다. 힐리스와 간단히 담소를 나누고 나자 늦은 밤이 찾아왔다. 이제 이 집을 탈출하는 일만 남은 것이다. 방으로 가기 위해 계단을 올라서는데 시카르가 뒤에서 따라 오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귀신이 뒤를 따라오는 것처럼 어찌나 무섭던지 나는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갔다. 물론 드레스를 밟아 그의 가슴팍에 안기는 불상사가 결코, 일어나지 않게 드레스가 무릎까지 올라올 수 있게 들고 계단을 밟아 나갔다. 시카르는 이때를 놓칠세라 내 뒤를 곧장 따라왔기에 나는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16549769341305.png“혹시 불편한 건 없나?”

1654976934131.png“네. 없어요!”

16549769341305.png“와인이 부족하다거나. 잠자리에 들기 전 목욕물이 필요하다거나,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편하게 말해도 된다. 네가 원하는 건 다 들어줄 생각이니까.”

1654976934131.png‘어떻게든 내 기억을 읽어낼 생각이겠지. 음흉한 놈.’

1654976934131.png“이미 베풀어 주신 은혜만도 다 갚기 힘들 만큼이니 더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될 듯합니다.”

나는 재빨리 방문을 열고 들어가 방을 등지고 말했다.

1654976934131.png“그럼 전 이만, 너무 피곤해서 곧장 잠자리에 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공작 각하.”

16549769341305.png“편한 잠자리가 되길 바라겠다.”

시카르는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며 복도를 걸어나갔다. 시카르가 완전히 복도 끝으로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나는 급하게 방문을 닫았다. 단 한치도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창문을 열어 밖을 보니 이곳이 2층이라 해도 일반적인 건물 2층과는 높이가 달랐다. 말이 2층이지, 보통 아파트 3, 4층 정도의 높이였다. 무섭긴 했지만, 지금 이곳을 탈출하지 않는다면 내일은 반드시 기억을 읽히고 말 것이기에 탈출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창문에 걸려 있는 커튼을 모두 뜯어낸 후 중간중간에 매듭을 만들어 꽤 튼튼하고 안전한 커튼 사다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시카르에게서 받은 돈을 묶어서 가방처럼 등에 울러 매고 나니 모든 게 완벽했다.

1654976934131.png‘이젠 탈출의 시간이다.’

나는, 곧장 창밖으로 커튼 사다리를 던진 후 방에서 가장 튼튼해 보이는 기둥에 사다리를 엮었다. 조심스럽게 매듭을 묶어둔 곳에 다리를 올리며 한칸 한칸 내려가면서 모든 게 순조롭게 돌아가고 있음을 느꼈다. 물론 심장이 터질 것 같이 두근두근거리기는 했지만,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살 수 있다는 말을 되새기며 매듭을 밟아 나갔다. 아래를 보면 두려움이 밀려오긴 했지만, 거래를 하자며 목에 칼을 들이대는 저런 미친놈이 있는 이런 곳을 벗어나고 싶은 생존본능이 용기를 주었다. 이 넓은 저택에서 이 밤중에, 나 하나 없어진다고 누가 알까. 하지만, 누가 그랬지. 누구나 처맞기 전에는 다 계획이 있다고. 그때까진 몰랐다. 바로 아랫방 1층이 시카르의 서재라는 것을. 이제 매듭 몇 개만 더 밟고 내려가면 땅을 밟기 직전인 찰나였다. 갑자기 눈앞에 있는 방에 불이 켜지며 내 모습을 환하게 비추었다. 그리고 그 환한 창문 안에서 드러난 얼굴은 다름 아닌 시카르였다.

16549769341305.png“지금 도망가는 중인 건가?”

그와 눈이 마주친 나는 움직이는 법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꼼짝없이 굳어 있었다. 시카르는 잠깐의 틈도 주지 않고 창문을 연후 내가 매달려 있는 커튼을 잡아당겼다. 커튼 하나에 의지해 있는 나는 무기력했다. 순식간에 시카르가 끄는 대로 이끌려 그의 손에 허리를 잡히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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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그는 빠르게 내 기억을 읽어내렸다.

16549769341305.png“넌 내가 타인의 기억을 읽는다는 것을 알고 있군.”

사람이 너무 무서우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던가?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에게 절대 들키지 말아야 할 것을 기어이 들키고 말았다. 그는 꽤 기분이 나쁘다는 듯 미간을 일그러트리며 말했다.

16549769341305.png“게다가 이곳이…… 소설 속이란 말이지?”

나, 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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