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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악역의 신부 (2) (4/197)

4화. 악역의 신부 (2)2021.06.14.

프러포즈 받게 된다면 반지를 받을 줄 알았지, 이렇게 칼로 위협을 받으며 받게 될 줄은 몰랐다. 사람이 너무 기가 막히면 머리가 새하얗게 된다던가. 나는 순간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렸다.

16549769842466.png“결혼을 하자니? 갑자기 왜…… 그래?”

16549769842471.png“입양하라고 조언했지 않나? 한 부모 가정에서는 입양을 할 수가 없다. 그게 이곳의 국법이다.”

이 소설 속 입양 세계관이 현대를 그대로 따왔을 줄이야…….

16549769842466.png“현재 최고 권력자인데 꼭 법대로 안 해도 되지 않아?”

16549769842471.png“모르는 소리를 하는군. 최고 권력자니 법을 더 잘 지켜야 한다. 난 내 권력을 부당한데 쓰지 않았다.”

나를 죽이려 하는 게 부당한 일 같은데.

16549769842466.png“그, 그럼. 이혼은 언제 해줄 생각이야……?”

16549769842471.png“저주를 없애면 이혼해주지. 네가 평생 쓰고도 남을 만큼의 위자료도 챙겨 주고.”

16549769842466.png‘지금 선심 쓰듯이 말하는 건가.’

하긴, 결혼하게 되면 나를 함부로 죽이지는 못하겠지. 그리고 또, 혹시 알아? 내가 갑자기 내 세계로 다시 가게 될지.

16549769842466.png“좋아. 결혼할게.”

16549769842471.png“명목상 부부일 뿐이니 잠은 따로 잘 것이다.”

16549769842466.png‘나도 바라던 바라고.’

16549769842466.png“그, 그럼 결혼을 빨리 서둘러야 할 거야. 곧 키안을 데려와야 하니까.”

16549769842471.png“결혼식을 올리기 위해선 국왕의 승인이 필요하다. 승인을 받기 전까지 며칠은 걸릴 것이다.”

16549769842466.png“느, 늦으면 키안을 데려올 수가 없을 텐데? 사흘 후에는 키안을 데려와야 해. 아니면 레이독스가 먼저 데려갈 거야!”

16549769842471.png“그때까진 식을 올리도록 하지. 그때까지 식을 올리지 못한다 해도 먼저 아이를 데려오면 되니 너무 서두를 필요는 없다.”

16549769842466.png“만약 일이 잘못 되도 나는 책임 없어. 그, 그때는 날 풀어준다고 약속해.”

16549769842471.png“약속하지.”

생각보다 너무 쉽게 약속을 하는 것 같아서 오히려 더 불안했다. 왠지 그날 키안을 레이독스에게 뺏긴다면 그를 죽여서라도 데려오는 건 아닌가 싶은 섬뜩한 생각이 들었으니까.

16549769842471.png“근데 너, 내게 존댓말을 쓰겠다고 하지 않았나?”

물론 어제는 그랬지. 하지만 어쨌든 목숨을 건진 이상, 나도 이게 내 마지막 자존심이라 이거야. 이렇게 일방적으로 당하는 것도 억울한데 나보다 어린 자식에게 존댓말까지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16549769842466.png“내, 내가 너보다 다섯 살이나 마, 많다고…… 나, 나한테 존칭을 듣고 싶으면 너도 내게 존칭해…….”

마음과 달리 목소리는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다행히도 슬쩍 시카르의 표정을 살피니 기분 나빠하진 않은 것 같아서 나는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16549769842471.png“네가 사는 세계는 나이가 우선이겠지만 이곳은 다르다. 그건 너도 알고 있겠지?”

16549769842466.png“아, 알아.”

16549769842471.png“이제 부부가 될 테니 앞으로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는 내게 꼬박꼬박 존칭해라. 그리고 필요에 따라 ‘여보’라는 호칭을 쓰는 것도 잊지 말고.”

시카르의 입에서 ‘여보’라는 말이 나오니 마치 악마의 입에서 ‘행복하세요’라는 말이 나오는 것처럼 어색하게 들렸다. 죽기 싫으면 자신의 프러포즈를 받아들이란 말이었기에 나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16549769842466.png“근데, 프러포즈라는 걸 할 땐 칼이 아닌 동그란 물건을 내밀며 하는 거야.”

내 말에 시카르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며 나를 내려보았다.

16549769842471.png“족쇄를 말하는 건가?”

16549769842466.png‘말을 말자.’

어쨌든 나는 시카르에게 도망가지 않고 그의 신부가 되겠다고 약속을 했지만, 그는 내 말이 미덥지 않았던 모양인지 결혼식 전까지 그의 오른팔 기사인 듀리온을 시켜 나를 감시하게 했다. 그래도 나는 실낱같은 희망을 놓지 않았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는 동안 갑자기 내 세계로 다시 돌아가는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결국 시카르와 결혼식을 올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결혼식은 공작저 안에 있는 사람들만 모인 상태로 조촐하게 이루어졌다. 식을 그렇게 진행한 이유 중에는 내가 광장 증후군을 갖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더욱 큰 이유는 식이 끝나는 대로 키안을 데려와야 했기 때문이었다. 결혼식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입맞춤을 할 때도 우리는 입맞춤 하는 척 연기를 하며 그 살벌한 결혼식을 무사히 마쳤다. 할머니는 또다시 치매가 찾아와 우리의 결혼식을 보지도 못하시고 치료를 위해 곧장 레페르 대신전으로 가야만 했다. 우리는 늦지 않게 키안을 데려오기 위해 예복을 벗지도 못하고 곧장 마차에 올랐다. 남들이 본다면 곧장 신혼여행이라도 떠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실상은 키안을 재빨리 데려오기 위해서였다. 지금쯤이면 키안은 내가 이곳에 온 첫날에 머물렀던 그 집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 이제 더는 먹을 것이 없어진 키안이 굶주림에 밖으로 떠돌다 골목길에서 처참하게 쓰러지게 된다. 그것을 여주인공의 아버지인 레이독스 후작이 발견하고 키안을 데려와 보살피던 중, 레카도르 왕족의 유일한 왕손이라는 것을 알고 그를 보호해준다. 그리고 남자주인공 키안은 레이독스 후작의 따뜻한 마음씨에 감복하고, 그의 딸인 루시에게 마음을 빼앗겨 사랑에 빠지게 된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우리는 레이독스 후작이 발견하기 전에 먼저 가서 쓰러진 키안을 데려와야만 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휘몰아치게 내리는 폭설이 머리 위로 세차게 쏟아져 내렸다. 어린 키안의 허리를 집어삼킬 만큼 쌓인 눈 때문에 키안은 제 아버지의 시신을 찾을 수가 없었다. 밤새 내린 폭설을 원망하듯 키안은 울분을 토하며 하늘을 올려다봤지만, 세상은 온통 하얗게 쌓인 백지일 뿐이었다. 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겪기에는 너무나 지독하고 끔찍한 일들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크고 위대했던 아버지는 국왕이 보낸 군사들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의지할 사람이라고는 친모뿐이었지만, 몇년 뒤 친모는 결국 어린 키안을 버리고 떠났다. 일곱 살 아이에게 남은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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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카르는 내 손을 잡고 내 기억 속 소설을 읽는 중이었다. 그는 원하는 답을 얻었는지 손을 놓으며 말했다.

16549769842471.png“레이독스 놈이 주인공들의 아빠라니 웃기지도 않는군. 레이독스 그놈이 자신이 소설 속 인물이라는 것을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군.”

레이독스라면, 왠지 매우 심각해하며 성직자의 길로 들어설 것 같기도 하고……. 그러고 보니 시카르도 이곳이 소설인 걸 알고 나서는 조금 심란했을 것 같기도 한데, 너무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이잖아?

16549769842466.png“근데, 넌 괜찮아?”

16549769842471.png“뭐가?”

16549769842466.png“이곳이 소설 속인 걸 알았잖아. 거기다 주인공도 아니고 악역이라는 것까지…….”

16549769842471.png“그깟 게 무슨 대수지? 네가 있던 세계에서는 이곳이 소설이겠지만, 내게는 하나의 세상일 뿐이다.”

역시 악역이라 멘탈이 세구나.

16549769842471.png“너야말로 네가 있던 세계와 전혀 다른 이 세계에 적응하기가 힘들 텐데도 잘 적응하고 있는 것 같군.”

내가 지금 잘 적응하는 것처럼 보이는 건가? 목숨의 위협을 받고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체념하고 있는 거로는 안 보이나? 어쨌든 나였다면 꽤 심란했을 것 같은데 시카르는 정말 너무나 평온한 모습으로 마차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차 안으로 불어오는 바람에 그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그 모습은 신비로울 만큼 아름답고 멋있었다. 이렇게 잘생긴 시카르가 악역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가 당한 수많은 배신 때문이었다. 폐왕은 시카르의 부모를 배신했고, 시카르는 자신의 부모를 죽음으로 내몬 폐왕을 없애고 길리언을 왕좌에 앉혔다. 하지만, 자신의 아비가 그토록 충성을 바쳤던 주군에게 배신당하는 것을 봤기 때문에 길리언을 완전히 신뢰하지 않았다. 겨우 22살밖에 안 된 시카르가 사람을 불신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떠올리니 그가 조금 가여워 보이기도 했다. 내가 너무 소설 속 감상에 젖은 걸까. 갑자기 고개를 돌린 시카르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16549769842471.png“날 왜 그렇게 쳐다보는 거지?”

16549769842466.png“아, 저 그러니까. 그게…….”

그 순간, 내가 아직 그 무거운 티아라를 쓰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16549769842466.png“내 머리에 티아라 좀 벗어도 되냐고 물으려고. 이거, 너무 무서워서…….”

16549769842471.png“결혼식이 끝났으니 벗어도 상관없다.”

16549769842466.png“그럼 나 이거 벗을게.”

라고 말하고 한 번에 척하고 벗을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티아라가 머리카락에 엉켜서 제대로 벗겨지지 않았다. 티아라 하나를 제대로 벗지 못해 낑낑거리고 있으니 시카르의 긴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16549769842471.png“벗기 전에, 엉켜 있는 머리카락은 뺏어야지.”

16549769842466.png“이런 걸…… 처음 써봐서 생각 못 했어.”

16549769842471.png“가만있어라. 내가 벗겨줄 테니까.”

벗겨준다고 해서 정말 잘 벗겨줄 줄 알았다. 내 두피를 다 뽑을 듯이 벗겨줄 줄 알았다면, 그냥 내가 벗었겠지!

16549769842466.png“악! 야! 내 두피!”

16549769842471.png“엄살이 심하군. 다 됐으니 가만히 좀 있어라.”

16549769842466.png“나, 정수리! 정수리에 머리카락 다 뽑히는 거 같다고!”

16549769842471.png“다 됐다.”

16549769842466.png“……? 다 됐다며?”

16549769842471.png“이제 정말 다 됐다.”

그렇게 몇 번을 더 다 됐다고 말을 하고 나서야 티아라가 내 머리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내 정신도 떨어져 나갔다.

16549769842471.png“머리가 짧아서 그나마 쉽게 벗겨 냈군.”

이, 이게 쉽게 벗겨 낸 거라고? 나를 탈모인으로 만들 뻔했는데?!

16549769842471.png“머리가 엉망이다. 도착하기 전에 손질 좀 하는 게 좋겠군.”

나는 머리카락을 대충이라도 손질하기 위해 마차 창문을 통해 비추는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반사되는 유리문에서 웬 산발을 하고 있는 거지꼴의 여인을 발견했다. 시카르는 나를 보고 한쪽 입꼬리를 피식 올렸다. 소설 속에서 분명히 태어나 한 번도 웃어본 적이 없다고 서술되었던 시카르였기에 나는 그 표정이 신기하기만 했다.

16549769842466.png“너 지금 나 보고 웃은 거야?”

16549769842471.png“그럴 리가. 태어나 그렇게 산발한 꼴로 있는 여자는 처음 봐서 비웃었을 뿐이다.”

시카르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렸다. 하긴, 저 성격에 피식이라고 해도 웃었을 리가 없지. *** 마운트 힐의 농가로 들어서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행히도 눈발이 잦아든 길에는 내가 했던 것처럼 물을 길고 가는 키안이 보였다. 이제 일곱 살밖에 안 된 어린 키안이 물배라도 채우기 위해 굶주린 몸으로 물을 이고 가는 것을 보니 괜히 코끝이 시큰해져 왔다. 내가 애정을 듬뿍 쏟으며 봤던 소설 속 주인공이니, 애정이 안 갈래야 안 갈 수가 없었다. 하마터면 나 때문에 시카르에게 죽을 뻔했기에 살짝 미안하기도 했지만, 어쨌든 죽지 않았고 살았으니 앞으로 내가 더 잘해주면 될 터였다. 우리는 조용히 키안을 따라다녔다. 우물가를 조금 더 벗어나자 예정대로 키안은 털썩, 차가운 겨울 길바닥 위로 쓰러졌다. 시카르는 기다렸다는 듯 마차에서 내려 죽은 듯 쓰러져 있는 키안을 안아 들었다. 작은 몸은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린 것도 모자라 방금 들고 있던 양동이 때문에 온몸이 물에 젖기까지 했다. 마차 안으로 들어온 키안의 몸에서 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16549769842466.png“뭐해? 어서 코트를 벗어서 아이를 감싸 안아주지 않고. 이 한겨울에 물에 젖었잖아.”

시카르는 그제야 코트를 벗어서 키안을 감싸 안았지만, 매우 불편한 모습이었다.

16549769842471.png“성가시군.”

키안의 이마를 만져보니 열이 펄펄 끓고 있었다.

16549769842466.png“원작대로 열이 펄펄 끓고 있어.”

키안을 어색하게 안고 있는 시카르는 내 손을 잡고 다시 다음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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