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악역의 신부 (3)2021.06.17.
“원작에서 열이 펄펄 끓는 키안에게 하늘초를 화염초인 줄 알고 먹였다가 키안이 죽을 뻔했지. 그래서 레이독스 후작이 키안에게 미안해서 더 잘해준 거고. 그래서 미리 듀리온에게 화염초를 구해오라고 시켜놓았다.”
하늘초와 화염초는 생긴 게 비슷해서 구분하기 힘들지만, 미세한 냄새의 차이로 구분할 수가 있다. 듀리온은 개코라고 소개될 만큼 냄새를 잘 맡으니 그라면 잘 구분했을 것이다. 키안의 고사리 같은 작은 손등은 각질로 뒤덮여 있었고, 군데군데 쩍쩍 갈라져 있었다. 마음이 안 좋았다. 이 어린아이가 얼마나 고생을 했으면 손이 이렇게까지 됐을까.
“시카르. 안디로바 오일 좀 구해줄 수 있겠어?”
“열대우림에서 나는 안디로바를 말하는 건가?”
“어. 그게 필요해. 구하기 많이 힘들까?”
“구하기 어렵진 않다.”
“그럼 그것 좀 구해줘. 키안의 손등에 좀 발라줘야겠어.”
“그런 것 때문이라면 굳이 오일을 안 써도 된다. 공작저에 가면 포션이 얼마든지 있으니까.”
‘아, 그렇지 이 세계에서는 포션이라는 게 있었지.’
공작저에 도착하자마자, 당연히 우리가 여행을 갔을 거라고 여겼던 사용인들은 시카르가 왠 아이를 품에 안고 오자 놀란 듯 뒤를 쫓아왔다. 하지만 당장 물러가라는 시카르의 일갈에 모두 흔적도 없이 물러갔다. 나는 드레스를 갈아입을 시간도 없이 시카르를 따라 미리 준비해둔 키안의 방으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듀리온이 나타나 시카르에게 화염초와 포션을 건넸다. 이제 그만 가보라는 시카르의 손짓에 듀리온은 우리에게 인사를 올린 후 방을 나갔다. 시카르는 자신이 직접 키안에게 화염초를 먹이고 각질이 일어난 손등에 포션을 뿌렸다. 그리고 우리는 숨죽인 채 키안이 깨기만을 지켜보고 있었다. 얼마쯤 지나자 키안은 게슴츠레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러곤 갑자기 날뛴 짐승처럼 방구석으로 뛰어가 납작 엎드린 채로 두 손에서 작은 불을 뿜어내고 있었다. 키안은 불의 정령사의 아들로 불을 잘 다루었다. 키안이 손에서 불의 정령을 꺼냈다는 것은 우리에게 적개심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괜찮아. 우린 널 해치지 않을 거야.”
그렇게 말해도 키안은 안심이 되지 않는지 주변을 둘러보며 도망갈 곳을 찾고 있는 듯 눈알을 이리저리 굴렀다. 시카르는 두 손에 불길을 쥐고 있는 키안을 보곤 인상을 찌푸리며 나를 보고 말했다.
“저 꼬맹이의 버릇을 고쳐놓지 않는다면, 목숨 부지하긴 힘들 것이다.”
나는 키안을 진정시키기 위해 손바닥을 내밀어 보이며 미소를 지었다.
“키안. 우린 쓰러진 널 구해준 사람들이야. 정말 널 해치지 않아.”
나는 키안을 바라보던 따뜻한 눈길을 거두고 거칠게 시카르를 내 쪽으로 잡아당겼다.
“네가 좋은 아빠가 되는 게 이 입양의 목적이라는 건 알고 있지?”
“물론.”
“그런데 그렇게 말하면 어떡해! 우리가 키안을 잘 돌 볼 수 있다는 믿음을 줘야 한다고!”
“내 집에서 버릇없이 구는 건 용납할 수 없다. 혼날 행동을 하면 가차 없이 혼낼 것이다.”
그게 혼내는 거냐 협박이지. 나이 스물둘 먹도록 아이를 본 적도, 대하는 법도 모르는 시카르에게 내가 너무 큰 걸 요구한 것이겠지.
“나와 함께 키안을 입양해서 잘 키우기로 했으니까 이거 하나만 약속해 줘.”
“무슨 약속?”
“키안과 엮인 일이라면 내 말을 잘 들어주기로 약속해 줘. 그래야 키안을 잘 키울 수 있어.”
시카르는 곧장 대답하지 않고 생각하는 듯 하다가 심드렁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대신 저 버릇도 고쳐놓도록 해라.”
“그럴게, 대신 따뜻하게 대해줘.”
시카르는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알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슬쩍 까닥거렸다.
‘휴. 설득하기가 쉽지가 않구나.’
나는 시카르와 함께 키안이 숨어 있는 구석으로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키안은 짐승이 발톱이 세우듯 불이 뿜는 두 손을 세워 들고 있었지만, 아이의 눈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우린 이 한겨울에 길에 쓰려져 있는 너를 데려온 사람들이란다. 네가 차마 얼어 죽게 내버려 둘 수가 없었거든. 우리가 널 해치려고 했으면 이곳에 데려오지 않았을 거야.”
키안은 여전히 의심이 풀리지 않는다는 듯 손에서 불길을 꺼트리진 않았다. 두려움에 가득한 아이의 두 눈이 내 마음을 읽어내려는 듯 내 보고 있었다.
“정말 절 해치지 않을 거예요……?”
늘 죽음 앞에 노출된 탓에 낯선 사람을 두려워하면서도, 아이의 눈에는 우리가 정말 좋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기대가 보이는 것 같았다. 춥고, 배고프고, 외롭고, 무서운 생활을 하는 동안 의지할 곳이 없었던 키안에겐 마음과 몸을 기댈 보금자리가 절실했을 것이다.
“물론이야. 우린 널 해치지 않아. 결코.”
키안은 경계하는 눈빛으로 시카르를 가리켰다.
“하지만 저 아저씨는…….”
“응. 그건 아저씨가 아직 사람을 대하는 법이 서툴러서 그런 거란다.”
키안은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완전히 이해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어쨌든 넌 지금 다치고, 아프고, 많이 굶주렸어. 그래서 치료가 필요해. 우리가 널 돌봐줄 수 있게 여기서 머물며 몸을 치료하지 않을래?”
키안은 시카르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제야 손에 있던 불을 껐다.
‘휴. 다행이다.’
“우리와 잘 지내기 위해선 너도 같이 노력해야겠지? 앞으론 손에서 그렇게 불을 막 뿜고 그러면 안 돼. 약속해 줄 수 있어?”
키안은 또 시카르의 눈치를 살폈고, 시카르는 또 불을 꺼내면 자신은 칼을 들겠다는 듯 검집을 한 번 올렸다가 다시 내렸다. 키안은 시카르를 보며 잠시 인상을 쓰긴 했지만, 나를 보며 다시 조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깔끔한 마무리였다. *** 키안의 몸이 아직 다 회복되지 않았던 까닭인지 다시 잠들고 나서는 다음 날까지도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키안의 방을 빠져나온 후, 나는 시카르와 아침을 같이 했다. 간밤에 키안을 돌보느라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탓에 나는 식사를 하면서도 거의 반쯤 눈이 감긴 상태였다. 그래서인지 시카르는 식사 중에 갑자기 하인들을 모두 물리곤 내 쪽을 향해 말했다.
“식사 예절을 전혀 모르는 군. 중앙에 있는 통고기는 네가 직접 써는 게 아니라 하인에게 썰어달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하인들이 들으면 나를 무시할까 봐 모두 물린 후에 말하는 것이구나. 그것은 나에 대한 배려라기보단 내가 자신의 아내이기 때문에 하는 행동일 것이다.
“넌 앞으로 나에게 식사 예절을 좀 배워야겠군.”
난 시카르에게 뭔갈 배우고 싶지 않았다. 툭하면 죽이네, 마네 하며 가르칠 게 눈에 훤했으니까. 내가 뭘 배우는 것까지도 목숨을 걸 필요는 없는 거잖아?
“그냥 나에게 교양 선생을 붙여주면 안 될까? 아니면, 관련 서적이라도 주면 보고 공부할게. 난 주로 실습보단 이론에 대한 이해가 더 빠른 편이거든.”
“그래서 유아교육을 받을 때 실습교육을 그렇게 많이 받은 건가?”
아…… 기억을 다 읽는 상대와 대화하기란 여간 피곤한 일이 아니다. 거짓말을 할 수가 없으니까. 시카르는 비웃듯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면서 나에게 거짓말할 생각을 다 하다니. 어리석군.”
난 인정은 빠른 편이다. 그러니까 금방 꼬랑지를 내렸단 말이다.
“알았어. 열심히 배울게.”
“진유라.”
진유라. 그것은 내 이름이었다. 시카르가 갑자기 내 이름을 불러주니 기분이 묘했다. 기분 좋게 묘한 게 아니라. 마치 처형당하기 전에 이름을 호명 당하는 느낌처럼 묘했다.
“어……?”
“넌 소화력이 약해. 고기를 먹으면 소화하는 데 오래 걸리지.”
내가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그런 것도 알아주고…… 내 기억을 보는 게 꼭 나쁜 건 아닌 건가?
“그러니까 고기를 먹을 땐 꼭 소화제도 같이 먹도록 해라. 공작부인이 잦은 트림을 하면 채신머리가 없어 보이니까.”
“그, 그런 건 내가 알아서 처신할 거거든……!”
“하지만 넌, 처신을 잘못해서 좋아하는 남자애가 고백할 때 고백을 받아주는 대신 트림을 했고, 제일 처음 어린이집 교사 실습을 나갔을 때에도 ‘안녕. 얘들아…… 꺼억…….’ 이라고 했지. 여기서 그렇게 처신한다면 매우 곤란하다.”
……그런 건, 잊어버려 달라고! 역시 기억을 보는 건 좋지 않아. 누군가에게는 흑역사인 낯뜨거운 소리를 점잖은 얼굴로 멀쩡하게 하고 있으니 창피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저 말 하려고 사람들을 쫓아낸 거지?’
고기가 문제가 아니라 시카르 때문에 소화가 되지 않을 것 같아서 나는 조심히 일어섰다.
“아직 디저트가 안 나왔는데. 어디가는 거지?”
“디저트까지 먹을 수 없을 것 같아서 이만 일어나려고.”
등을 돌리며 다이닝룸을 빠져나가려는데 뭔가 날카롭고 둔탁한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스테이크용 나이프가 테이블 위에 꽂혀 있었다.
“아직 대화할 게 많이 남았으니까 앉지.”
아무래도 칼부터 들이대는 게 시카르의 대화 방식이 분명한 것 같은데. 나는 손이 떨려와서 다시 의자로 가서 앉았다.
“조금 쉬고 나서 해도 늦지 않을 것 같아서 그랬……지.”
나는 난처한 얼굴로 미소까지 지으며 말했다. 계속 겁을 주니까 나도 모르게 비굴해져 가는 느낌인데? 시카르가 그런 사람들의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대화할 때 칼부터 꺼내고 보는 게 아닐까. 기억을 읽는 능력 때문에 사람들의 약점을 너무 잘 안단 말이지. 시카르는 과일 푸딩을 한 조각 입에 넣으며 말했다.
“알다시피 왕이 키안을 찾고 있다. 소설에서 레이독스 후작이 키안의 목덜미에 있는 왕실 문장을 숨기지.”
왕실 문장은 원작에서 레이독스 후작이 키안이 왕족이라는 걸 알아볼 수 있는 표식이 되었다. 후작은 국왕 길리언이 키안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자신의 벗을 찾아가 문장을 숨겼다. 문장 자체를 숨기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왕족의 표식이기 때문에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그 사람은 후작의 친구인 마법사 제르미 아이커였다. 하지만, 그러려면 레이독스를 먼저 만나야 했지만, 시카르와 레이독스는 사이가 매우 나빴다. 그 사실은 시카르도 나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돌직구를 날렸다.
“넌 레이독스와 사이가 안 좋으니까. 내가 갈게.”
“가서 뭐라고 할 생각이지? 레이독스가 길리언에게 키안이 여기 있다고 이를 수도 있는데?”
원작에서 레이독스의 딸인 여주인공 루시가 툭하면 엄마가 보고 싶다며 싶을 나갔었다. 그래서 나는 그 점을 이용해서 레이독스를 설득할 생각이었다.
“루시가 제 엄마가 보고 싶다고 나갈 때 내가 루시를 찾아서 집에 데려다주는 거지. 그럼 자연스레 친해지게 될 거야.”
시카르는 나쁘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군.”
“후작은 친절하고 아이들을 매우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이건 우리에게 최선의 방법이야.”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지.”
“그리고 키안이 일어나면 네가 밥을 먹이는 게 좋겠어.”
거기까지 말하고 일어서려는데 시카르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멈칫하며 나를 쳐다보았다.
“나더러 키안에게 밥을 먹이라고? 세 살짜리 꼬맹이도 아니고 일곱 살짜리를?”
“아빠가 되려면 친해져야 하니까. 아플 때 잘해주면 의지가 돼.”
시카르는 당치도 않는 소리 하지 말라는 듯 내 시선을 외면했다.
“아이에게 밥 따위 먹여 본 적 없다.”
“아플 때 잘해주는 게 가장 효과적이라고 육아 문제는 내 말을 전적으로 따르기로 했잖아?”
나를 외면하던 눈빛은 나를 노려보기 시작했고 나는 그의 손이 단검으로 향하진 않을까 눈치를 살폈다. 아, 무서워. 저렇게 쳐다보면 너무 무섭단 말이지.
“내 옆으로 와라.”
“왜……?”
“아이에게 밥을 어떻게 먹이는지 몰라서 네 기억 좀 보려고.”
‘아, 또 손 잡히겠네.’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힘없는 나는 시카르의 곁으로 가서 앉아 마치 익숙하다는 듯 팔을 내어주었다. 이것도 정말 한두 번이 아니니까 익숙해지고 있긴 한 것 같았다. 시카르는 다시 내 팔을 잡으며 내 기억을 읽어나갔다. 하지만 기억을 읽어나가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스푼을 들더니 내 앞에 놓인 푸딩을 한 번 찍고는 내 입에 넣어주려고 하고 있었다. 당황한 나는 재빨리 고개를 뒤로 빼며 물었다.
“뭐, 뭐 하는 거야?”
“연습해보는 거지.”
당황스러웠다. 겉보기엔 멀쩡해 보이는 이 미친놈이 푸딩뿐 아니라 숟가락도 내 입에 같이 밀어 넣지는 않을지 걱정도 되고, 무엇보다 불편했다.
“안 받아먹어?”
‘또 칼을 들이대기 전에 그냥 먹자.’
나는 할 수 없이 입을 열어 그가 주는 푸딩을 받아먹었지만, 그 맛있던 푸딩 맛을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진짜 불편해.
“한 번 더 해보지.”
시카르는 뭘 배울 때마다 지독하게 배우는 습성이 있다. 검술을 한 번 연습하면 그 검술을 온전히 마스터할 때까지 익힌다. 그러니까 푸딩을 떠먹여 주는 것도 자신의 몸에 익숙해질 때까지 나에게 떠먹였다는 말이다.
“저기. 나 더 이상은 못 먹겠어.”
“그래. 그럼 비카를 불러서 먹여봐야겠군.”
그럴 거 같으면 진작 비카를 데리고 연습했으면 좋잖아? 그래도 절대 그런 건 못 하겠다고 우길까 봐 좀 걱정이던 차에 키안에게 밥을 먹이려고 노력을 하니 다행이긴 했다.
“그럼 난, 내 할 일 다 한 거 같으니까 이만 가볼게.”
“근데 너.”
또, 왜 부르는 걸까. 나는 최대한 짜증을 내지 않기 위해 애써 웃으며 대답했다.
“응?”
“너, 나 죽을 때 울었더군.”
시카르가 죽는 장면에서 내가 눈물을 흘린 걸 말하는구나. 내가 그렇다고 대답도 하기 전에 그가 내게 물었다.
“날 좋아하나?”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