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주인공을 입양하게 되었습니다 (1)2021.06.21.
착각은 아무리 자유라지만, 이거 자유가 지나치다, 못 해도 너무 지나친 것 같은데?
“그런 거 아니야. 그냥…… 그 장면이 슬펐어.”
“그래. 말하기 쑥스럽겠지. 이해한다. 네가 내 저주를 풀어주기 위해 그렇게 애쓰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군. 의문이 풀렸어.”
무슨 소리지. 나 살려고 저주를 풀려고 하는 건데?!
“두려워 마라. 네가 날 좋아한다는 이유로 널 죽이진 않을 테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내가 널 안 좋아한다고!”
시카르는 살기 가득한 섬뜩한 눈빛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나는, 속이려 드는 걸 싫어한다. 잘 알 텐데?”
나는 섬뜩해서, 더는 아니라고 부정할 수가 없었다. 부정하면 자신을 속인다는 죄목으로 내게 또 칼을 들이댈 것만 같았으니까!
“그럼 내일 보도록 하지.”
시카르는 자신에게 꼬리를 흔들며 충성하는 기특한 충견을 보듯 나를 내려다보곤 자리를 떠났다.
‘아니, 넌 어처구니없어하는 내 표정을 보고도 그렇게 생각하는 거니? 난 네가 하도 죽이려고 해서 나 살려고 도와주는 거라니까?’
아. 미친놈이 자기 마음대로 착각을 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울긴 울었다. 당시 웃음을 잃은 지 오래일 때, 한 번도 웃어본 적 없는 남자가 끝끝내 웃음 한 번 짓지 못하고 죽어가는 모습이 마음 아팠다. 고독한 그의 삶에서 외로운 나의 삶이 보였으니까. 시카르는 내 기억을 보고 목소리만 들을 뿐 그 당시의 내 감정 같은 것은 느낄 수가 없다. 그래서 내 마음이 아닌 내가 흘린 눈물만을 보고 완전히 착각하는 것 같았다. 누군가의 기억에 의지하다 보니 황당해하는 내 표정을 보고도 무시할 수 있었던 것이겠고. *** 다음 날, 시카르와 나는 순식간에 키안을 입양할 준비를 모두 끝냈다. 국왕을 직접 만날 필요도 없이 시카르가 가져온 서류에 서명만 하면 되었기에 절차는 아주 간단했다. 이렇게 절차가 간단한데 꼭 양부모 모두 있어야 했던 건가 싶었지만, 간단하더라도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게 국법이라며 시카르는 으름장을 놓았다. 어쨌든 나는 레카도르 왕국의 국법에 따라 법적으로 완벽한 시카르의 아내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시카르의 성을 따라 블레이크 공작부인인 유라 블레이크가 되었다. 우리가 모든 준비를 끝낼 동안에도 키안은 좀처럼 깨어나지 않았다. 레이독스 후작이 실수한 것처럼 약초를 잘못 먹인 게 아니었는데도 키안은 꽤 오래 잠들어 있었다. 오랫동안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고 굶었던 탓에 오래 자는 것일까. 시카르는 나름 키안을 걱정했다. 물론 저주에 걸린 자신을 걱정하는 것이었지만, 어쨌든 시카르는 내게 키안의 방에 가보자고 먼저 제안했다. 그는 키안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갑자기 아이의 목덜미를 잡아 들어 올렸다. 깜짝 놀란 나는 시카르의 앞으로 달려나갔다.
“지, 지금 뭐 하는 거야?”
“그냥 숨을 쉬고 있나 확인만 했을 뿐이다.”
“그럼 네가 고개를 숙이면 되잖아. 키안은 사자 새끼가 아니라고!”
“고개를 숙여? 내가?”
“……이제 네 자식이 될 아이니까. 아이들은 어른보다 약해서 섬세하게 다뤄야 한단 말이야.”
“주인공인 놈이 완전히 약골이군. 약골들은 금방 죽는다. 이놈은 운 좋게 주인공으로 태어나서 살아남은 모양이지만.”
“넌 시타르족이니까 그렇지.”
시타르족은 인간족의 일종이지만, 힘이 세고 재빠르고 엘프들처럼 외모도 출중한 그런 종족이었다. 무엇보다 이들의 우수성은 정령의 정신을 지배하는 능력이었다. 본인 스스로 정령을 불러낼 수는 없지만, 정령사가 불러낸 정령이나 스스로 떠도는 정령들을 지배할 수 있었다. 물론 시타르 족이라 해서 모두 능력이 뛰어난 것은 아니었다. 유독 시카르만이 그런 능력이 뛰어났다. 가령, 인간이 지능이 있는 동물이라 해서 모두가 지능이 높지 않은 것처럼 시카르가 유독 뛰어났다.
“키안이 깨어날 때까지 여기 있는 게 좋겠어. 그럼 아이가 더 안심할 거야.”
시카르는 피곤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싫다고는 하지 않았다. 그도 내 기억을 봤던 만큼 아이의 심리에 대해 대충은 눈치를 챈 듯 보였다.
“키안이 깨어나면 드림캐처 하나 만들어 주는 게 어때?”
“드림캐처?”
“악몽을 걸러주고 좋은 꿈만 꾸게 해 준다는 장신구야.”
“원작에 키안이 악몽에 자주 시달린다고 나오니 그런 걸 만들면 좋겠군. 어서 만들도록.”
“아니, 내가 아니라 네가 만들어야 한다고.”
“내가?”
“키안이 필요한 건 내가 아니라 너야. 키안과 친해지려면 네가 직접 만들어 주는 게 낫지 않겠어?”
시카르는 영 내키지 않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다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또 잡는다. 또.’
“너, 너! 앞으로 내 손을 잡을 땐 내 허락 맡고 잡아!”
“부끄러워 마라.”
“그래서 그런 거 아니야.”
시카르는 내 말을 무시하듯 대답도 하지 않고 내 기억을 읽는 데 집중했다. 그러곤, 고개를 갸웃하고는 내 손을 잡고 가 나를 테이블 앞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노트와 펜을 들고 온 후 내 손을 잡으며 드림캐처를 그리기 시작했다.
“정말 요상하게 생긴 물건이군. 하긴, 네 기억 속 모든 게 그렇긴 하지.”
시카르가 그림을 그리는 동안 나는 꼼짝없이 그의 손에 잡혀 있었다. 꼭 USB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컴퓨터로 UBS에 있는 파일을 모두 전송할 때까지 컴퓨터 단자에 꽂혀 있는 기분이랄까. 하는 거 없이 시카르의 손에 잡혀 가만히 앉아 있으려니 졸음이 밀려왔다. 시카르는 한 손으로 내 손을 잡고 드림캐처를 그린 후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본인이 직접 만들라고 했으니 직접 만들어 올 것이다. 그동안 나는 키안이 깨어나길 기다리며 아이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무슨 꿈을 그렇게 꾸길래 인상을 자꾸 쓰는 것일까. 또, 제 아빠를 잃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시카르가 황금색의 예쁜 드림캐처를 만들어 왔음에도 키안은 깨어나지 않았다. 키안은 어디가 아프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그저 이유를 알 수 없는 잠을 계속 자고 있었다.
“이 녀석 죽은 건가?”
“……살아 있어. 주인공이 그렇게 쉽게 안 죽어. 많이 고단했나 본데, 깰 때까지 두는 게 낫겠어.”
잠든 어린아이들은 대개들 천사같이 예쁜 모습이었지만, 키안은 잠든 모습까지도 고단해 보였다.
‘가여워라.’
키안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시카르는 제 턱을 긁으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럼 키안이 일어날 때까지 집안일 돌아가는 것 좀 배우지. 앞으론 네가 여기 안주인이니까 사용인들을 부리는 방법도 좀 익히고. 너, 아무것도 모르잖아?”
음. 그거라면 왠지 자신이 있었다. 태어나 아이를 다뤄본 경험밖에 없었지만, 시카르가 성품을 보고 사용인들을 채용한다고 했으니 왠지 부리기가 그렇게 어렵진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아무리 명목상 앉아 있는 자리라 해도 대외적으로는 블레이크 공작저의 안주인이니 그에 어울리게 행동해야겠지.
“좋아. 사용인을 부리는 법은 오늘부터 당장 배울게.”
“그전에 먼저, 비키와 정식 인사부터 나눠야겠다. 결혼식 때 한쪽 구석에 서 있던 칙칙한 녀석을 봤는지 모르겠지만, 그 녀석이 비카다. 녀석에 대해서는 굳이 내가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알 테지만, 그래도 인사는 나눠야 하니까.”
아, 비카 램버스트! 시카르에게 목숨을 빚지고 그의 맹약에 걸려 꼼짝없이 시카르에게 잡혀 사는, 나이는 140살이 넘지만 젊고 아름다운 다크엘프 혼혈로, 머리가 희고 피부가 검은 것을 제외하곤 인간의 모습에 가까웠다. 맹약서를 얻게 된 시카르는 자신의 저주를 풀어줄 정령사를 찾아 나서던 중에 거대거미 둥지에서 거미줄에 묶인 비카를 보게 된다. 시카르는 거미줄에 묶여 있는 비카에게 불의 정령사의 행방을 묻는데 비카는 자신이 정령사를 찾아줄 테니 자신을 구해달라고 하고, 시카르는 비카에게 맹약을 걸어 비카를 자신의 저주를 없애줄 정령사를 찾아다니게 만든다. 그 맹약은 시카르의 저주가 풀릴 때까지 결코 끊어 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비카는 결국, 시카르의 저주를 풀기 위한 여정에 나섰다가 주인공 키안에 의해 목숨을 잃게 되는 비운의 악역 중 한 명이었다. 비카의 죽음은, 그 맹약 때문에 시카르에게 정신적인 데미지를 크게 입히고 그의 힘을 약화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비록 주인공 키안에게 목숨을 잃긴 하지만, 그녀는 매우 카리스마 있는 캐릭터였기 때문에 그녀를 만날 것을 떠올리니 두려움 반 긴장이 반이었다.
“그녀는 어딨어?”
내가 질문을 던지자마자 등 뒤에서 비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요. 마님.”
둔탁하면서도 굵직한 중저음으로 상당히 매력적인 목소리였다. 고개를 돌려보니 팔짱을 끼고서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는 비카가 보였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백발의 긴 생머리와 검게 그을린 것 같은 갈색 피부의 외모가 소설 속 묘사보다도 훨씬 신비롭게 느껴졌다.
“예의를 갖추고 네 소개를 해라. 비카.”
비카는 피식 웃으며 귀찮다는 듯 레몬을 손에 들고 씹었다.
“이미 나에 대해 다 알고 있는 거 같은데 무슨 소개를 해야 할까?”
다 들은 건가? 비카는 다크엘프라 귀가 상당히 밝았다. 하지만, 시카르를 믿지 못해 몰래 얘기를 엿듣거나 하지는 않았었다. 시카르도 의외라고 느꼈는지 잠시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제 이마를 툭 쳤다.
“비카. 귀 버릇이 굉장히 안 좋아졌군. 내 말을 엿듣다간 그 귀를 잘라내 줄 거라고 한 거 같은데?”
“맘대로 해. 귀를 잘라내도 청각에는 지장 없으니까. 청각을 관장하는 기관은 귀 안에 있거든.”
정말로 귀를 잘라내도 신경 쓰지 않았을 비카였기에 시카르는 그 귀를 자르고 싶은 전의도 상실했다는 듯 무감한 얼굴이었다.
“대체 왜 안 하던 짓을 한 거지? 지금껏 내 말을 엿듣는 취미는 없지 않았나?”
비카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자신의 인중을 긁적이며 눈썹을 실룩거렸다.
“네가 요즘 하는 짓이 하도 요상 하잖아. 처음 보는 여자와 갑자기 결혼을 하지 않나, 아이를 주워오질 않나? 난 네가 갑자기 미쳐버린 건 아닌가 하고 생각했지. 그렇다면 이왕 미친 김에 이 맹약도 깨주지 않을까, 싶었거든.”
“어디까지 들었지?”
“여러가지? 네가 다른 사람의 기억을 본다던가, 저 아이가 널 죽인다던가 하는? 근데, 그것보다 더 이상한 건 그 모든 게 저 여자. 아니, 저 마님의 기억 속에 있다는 거지.”
다행히 이곳이 소설이란 건 못 들은 건가?
“마님께서는 미래를 보는 건가?”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건 시카르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그는 만족스럽다는 듯 입술을 조금 실룩거렸다.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
“마님께서는 널 사랑하고, 그래서 넌 미래를 보는 마님과 결혼해줬고?”
아, 아니. 그런 오해는 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는데?
“날 매우 사랑하고 있지. 내가 죽을 때 눈물을 뚝뚝 흘렸다더군.”
시카르는 마치 내가 죽을 때 날 위해 울어주는 이도 있다는 듯 의기양양하게 말했고, 비카는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냐는 듯 매우 놀란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래? 마님께서 정말 널 많이 사랑하나 보군.”
‘아니, 원래 많이 안 사랑해도 사람이라면 누가 죽을 때 눈물 흘릴 수도 있는 거라고, 이 악역들아.’
누군가 죽었을 때 눈물을 흘려본 적이 없으니 알 리가 없겠지. 두 사람이 날 두고 시카르를 목숨 걸고 사랑하는 열녀로 만들고 있는 것 같아서 나는 슬쩍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비카 님께서 이미 우리의 얘기를 모두 엿들으셨으니 소개는 그만 끝난 건가요?”
“그런 셈 치시죠. 마님.”
“저, 그런데 비카 님?”
“말씀하세요.”
“시카르와의 맹약에서 조건을 하나 더 추가하도록 하죠.”
비카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비웃듯이 코웃음을 쳤다.
“조건을 뭐, 어떻게 추가하란 겁니까?”
“앞으로 우리의 이야기를 엿들을 때마다 시카르가 받을 저주의 고통을 대신 받는 걸로 하죠.”
앞으로도 비카가 우리의 얘기를 계속 엿듣게 두는 건 상당히 곤란한 일이었기 때문에 나는 이 조건을 달 수밖에 없었다. 비카는 그 신분 자체도 불투명한 데다 이제 겨우 마님이란 자리에 앉은 내가 그런 조건을 내거는 게 어이가 없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이게 말이 되냐는 듯 시카르를 쳐다보았지만, 시카르는 재미있다는 한쪽 입꼬리를 올릴 뿐이었다.
“내가 이 여자와 결혼을 한 이유가, 비단 미래를 보는 것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이제 좀 알겠나?”
나란 인간이 이런 당찬 면이 있다는 걸 말하는 건가? 그러니까, 너 지금 나 칭찬한 거니? 대화를 엿들은 건 분명한 잘못이었기에 비카는 조건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녀는 마지못해 엿듣기 금지라는 조건을 받아들인 후, 날 보며 기분 나쁜 듯 눈을 흘겼다.
“이제 만족하십니까? 블레이크 공작 마님?”
아무래도 기분이 팍 상한 것 같은데. 그래도 귀를 잘리는 것보단 미관상 낫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