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주인공을 입양하게 되었습니다 (2)2021.06.24.
“안녕하십니까. 마님. 진즉 인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공작님께서 시일을 잡아주시지 않아 이제야 인사를 올립니다. 블레이크 공작가의 하녀장 안드레아 헤이본이라 합니다.”
하녀장 안드레아는 감정의 기복 없이 점잖은 사람으로 나이대는 40대 정도라고 한다. 그녀에 대해서는 크게 서술된 바가 없었지만, 시카르의 부모님 대부터 함께한 걸 보면 괜찮은 사람이 틀림없다는 확신은 있었다.
“갑자기 새 주인을 맞아 내가 많이 낯설겠지만, 너무 어려워하진 말게. 앞으로 잘 부탁하네.”
“아랫사람으로서 윗사람을 어려워해야 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앞으로 그 누구도 마님의 권위에 도전하지 못하게 하녀장으로서 아랫사람들의 기강을 굳건히 잡도록 하겠습니다. 마님.”
아 맞아. 이렇게 원론적인 캐릭터였지.
“편한 대로 하게.”
“감사합니다. 마님. 앞으로 준비해야 할 것들이 있다면 모두 저에게 말씀해 주시면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마님의 수발을 들 하녀는 방 담당 하녀인 벨라가 맡게 될 것입니다.”
“그럼, 메이리는 어떻게 되는 거지?”
“메이리는 임시로 접객 하녀 일을 맡았지만, 현재는 잡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잡일을 하기에는 아이가 꽤 영특하고 싹싹했는데.
“아니야. 벨라는 됐고, 내 방 담당 하녀는 메이리에게 맡기도록 해.”
의외에 말에 놀랄 수 있음에도 안드레아는 놀라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메이리는 아직 방을 담당하기에는 경험이 많지 않은데 괜찮으실지요.”
“글쎄. 경험은 없지만, 꽤 영특하던걸. 메이리라면 일은 금방 배울 거야.”
“그렇게 하겠습니다. 마님.”
“그리고 닭고기 수프를 준비해줘. 아이가 깨어나는 대로 곧장 먹일 수 있게.”
“게스트 룸에 있는 그 아이를 두고 하시는 말씀이신 것 같군요. 그렇게 준비하겠습니다. 마님”
“그럼 수고해.”
“네. 마님.”
안드레아와 대화를 끝낸 후 나는 소파에 널브러지듯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역시 아직 이런 말투는 익숙하지 않아.’
내가 이렇게 갑자기 이 동네 말투를 쓰게 된 이유는 모두 시카르 때문이었다. 그는 지난밤, 내게 귀족의 말투를 써야 한다며 또 그 몹쓸 칼을 손에 들고 말투를 가르쳤다. 운전은 절대 남편에게 배우면 안 된다는 말처럼 말투도 남편에게 배우면 절대 안 된다는 것을 절실히 깨우쳤을 때쯤에야 시카르에게서 ‘오늘 교양수업은 여기까지’라는 말을 들을 수가 있었다. 말이 교양수업이지, 그것은 마치 ‘남편에게 살아남는 방법 제1단계’와도 같은 것이었다. 점심이 오기 전에 안드레아는 내가 말한 닭고기 수프를 준비했다. 내가 이것을 준비해달라고 했던 건, 키안이 아플 때 아빠가 해 준 것이 닭고기 수프였기 때문이었다.
‘부디 이걸 먹고 심신이 잘 회복돼야 할 텐데.’
“아무리 혼자 있다고 해도 그렇지, 공작가의 안주인이 체신 없이 소파에 널브러져 있다니.”
이게 다 네가 나를 굴리고 굴려서 내 혼이 나가서 그런 거라고. 소리소문없이 다가온 시카르의 갑작스런 등장에 나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안드레아에게 듣기론 닭고기 수프를 준비하라고 한 게 너라지? 그 작은 머리를 요리조리 잘도 굴렸군.”
저건 나름 시카르가 할 수 있는 칭찬 중 하나였다. 그런다고 내가 좋아할 건 아니지만.
‘나 그렇게 말랑한 사람 아니라고.’
“낯선 환경에 처한 아이한테는 익숙한 경험을 해주는 게 좋으니까.”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안드레아에게 말해서 닭고기 수프를 준비하라고 일러둘 참이었지.”
‘글쎄. 내게 지기 싫어서 하는 말처럼 들리는데 나는?’
시카르는 나를 향해 오른쪽 손바닥을 내밀어 보였다.
“나랑 하이파이브하지.”
“……뭐라고?”
“네 세계에서는 이럴 때 손뼉을 마주치더군. 하이파이브라고 한다던데? 틀렸나?”
별 걸 다 따라 한다 싶어 버티던 나는 눈총에 못 이겨 마지못해, 입술을 질끈 깨물고 시카르의 손바닥에 손을 댔다. 손바닥이 부딪히는 소리가 나며 시카르는 재미있다는 듯 나를 쳐다보고는 나에게 손가락 깍지를 꼈다.
“벨라 대신 메이리를 쓰기로 했나 보군.”
아, 이 인간이 내 기억을 보려고 하이파이브니 어쩌니 하는 말로 빌드업을 한 거구나.
‘요즘 손잡는 것을 거부했더니 이런 식으로 머리를 쓰는 건가?’
“아직도 다리 떠는 버릇을 못 고쳤군.”
“그건 혼자 있을 때 떤 거야.”
“사람들과 있을 때 무의식중에 혼자 있을 때 버릇이 나오는 것이지.”
잔소리를 좀 더 하고 나서야 시카르는 만족한 듯 손을 놓아 주었다.
“오늘 입궁을 해야 해서 공작저를 비워야 하는데 이런 널 혼자 두고 가려니 참 걱정이군. 내가 없더라도 정신 놓지 말고 아랫사람들에게 공작저의 안주인다운 면모를 잃지 않도록 해라.”
오늘 시카르가 공작저를 비운다고?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자유다운 자유를 맛볼 기회가 찾아온 걸까? 시카르가 자리를 비우면 먼저, 먹고 싶은 것들을 실컷 먹고 싶었다. 공작저 안주인의 위신이 어쩌고 하며 먹는 것도 제대로 못 먹게 하는 등 내가 당한 억압들의 무게를 떠올리니 설움이 밀려올 정도였다. 나는 시카르가 공작저를 빠져나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다이닝 룸으로 뛰어나갈 채비를 마쳤다.
‘안드레아! 지금 당장 로스트비프와 크럼블, 후식으로는 쇼트 브레드와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준비해줬으면 좋겠어!’
하지만, 나는 뛰쳐나갈 수가 없었다. 오늘도 시카르의 손에 잡혀 기억을 읽힐 게 뻔했으니까! 시카르는 아마 평생을 가도 의처증에 걸리지는 않겠지. 시무룩한 얼굴로 앉아 있던 찰나에 마침, 비카가 메이리와 함께 들어왔다. 메이리는 손에 든 음식을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고 비카는 내 곁에 서서 얄미운 미소를 짓고 서 있었다.
“당분간 마님께서 식사 예절을 완벽히 마스터하기 전까지는 곁에서 지켜보라는 공작님의 엄명이 있었습니다.”
비카가 가져온 음식은 사교계 모임에서 주로 먹는 음식으로, 내가 즐겨 먹지 않는 달팽이 요리나 캐비어 같은 것들로 간에 기별도 가지 않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입맛에는 맞지도 않았다. 안주인의 위엄만 지키지 말고 위장도 좀 지켜주면 좋겠는데, 이런 음식을 먹고 배가 차는 게 더 이상하다고.
*** 시카르는 왼쪽 귀가 가려운 듯 몇 번 긁적이고는 아무도 없는 텅 빈 알현실에서 어전회의에 들어간 길리언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군을 향한 맹세는 피의 맹세보다도 깊고, 주군을 위한 약속은 그 어떤 맹약보다도 곧으며, 주군을 향한 사랑은 신앙보다도 거룩하다.’ 자신의 주군에게 모든 것을 다 바쳤던 시카르의 친부 베몬이 제 아들은 물론이고 수하들에게 늘 하던 말이었다. 폐왕의 배신으로 친부를 잃은 시카르는 그것을 개소리라고 생각했다. 처음 길리언을 추대한 것은 자신의 무너진 공작가를 견고히 하고 쉽게 왕을 조종하고 싶었던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폐왕을 몰아내고 어지러운 나라를 바로 잡고 도탄에 빠진 백성들에게 위로가 됐을 때 조금은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때, 아버지의 마음을 처음으로 이해할 수가 있었다. 그래서 길리언에게서 결코 신하에게 비밀을 만드는 주군이 되지 말아달라 맹세를 받아내었다. 하지만 길리언은 폐왕이 제 아비에게 했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었다. 유라의 기억 속에서 본 길리언은 자신이 추대했던 주군이 아니었다. 하지만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었다. 자신과 했던 그 맹세를 아직도 기억하는지에 대해서. 조속히 어전회의를 마친 길리언이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알현실 안으로 들어왔다.
“많이 기다리셨습니까.”
길리언은 약속에 늦은 사람처럼 다급하게 들어와 앉으며 물부터 마셨다. 그것은 시카르의 입궁을 듣고 물도 한 잔 안 마시고 급하게 달려왔다는 의미와도 같은 것이었다. 국왕이 들어오면 일어나야 하는 것이 당연했지만, 시카르는 다리를 꼰 채 소파에 등을 기대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길리언에게 시카르가 아직 그를 완전히 국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음을 표하는 것이었고 시카르 자신이 현재 이 왕국의 최고 권력자임을 드러내는 것과도 같았다.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시카르의 표정에서 적대감은 보이지 않았지만, 어디에도 충성심 또한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왕좌에 앉자마자 나 몰래 왕족을 찾아서 제거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라…….’
거기다 나중에는 자신에게 베로니아가 키안을 왕위에 앉힐 계획을 세우고 있으니 키안을 제거해달라는 청탁까지 넣었다. 결국, 제 아비가 폐왕에게 당했던 것처럼 자신도 이 인간에게 당하기만 한다 생각하니 당장 눈앞에 있는 길리언을 제거하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무리였다. 길리언의 곁에는 그의 수족인 마법사와 정령사가 있는데다, 레카도르의 왕족들은 모두 신성력을 갖고 있었기에, 완전한 승리를 보장받을 수가 없었다. 길리언을 치려면 다른 귀족들의 도움을 받아야 했지만, 명분이 없었다. 명분을 얻기 위해선 길리언이 감금시킨 공주 베로니아라도 찾아야 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시카르는 왕족의 기억은 읽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그렇게 숭고하게 태어난 혈통이었으니까. 대체 어디에 숨겼을까.
“국왕 전하.”
“네. 말씀하십시오. 시카르 님.”
“제가 했던 말 기억하십니까?”
“당연하지요. 공작님이 하셨던 말씀 중 단 하나도 잊은 게 없습니다.”
“내게 비밀을 만들지 말라고 말했던 것도 기억하십니까.”
“기억하다 마다요.”
‘거짓말.’
이제껏, 시카르는 길리언이 누구보다도 자신을 존경하면서도 두려워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유라의 기억을 읽고 보니, 그것은 모두 자신의 왕권을 더 견고히 지키기 위한 술수에 불과했던 것이었다. 시카르는 당장 손 아래에 있는 테이블을 집어 길리언의 면상 위로 던지고 싶을 것을 꾹 누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평생 잊지 않고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것은 그들의 파멸을 예고하는 경고였다. *** 궁을 나온 시카르는 마차가 있는 곳을 향해 걸었다. 그는 따로 마부를 쓰지 않고 항상 어딘가를 이동할 때마다 듀리온에게 마차를 맡겼다. 듀리온은 수도원 앞에 버려져 있던 고아로, 자라며 말썽을 많이 피워 구빈원으로 옮겨졌지만, 거기서도 오래 있지 못했다. 청년으로 자란 후에는 전장에서 용병으로 뛰며 이름을 알렸고 시카르와는 거대 개미지옥에 빠졌을 때 만나 인연을 맺게 되었다. 마차 앞으로 다가서자 마부석에 앉아 하품을 해대던 듀리온이 고개를 돌렸다. 그는 밝고 유쾌한 성격이었지만, 자라며 배우고 익힌 게 싸움뿐이라 교양이라곤 전혀 모르고 거칠었다.
“먹던 사탕이라도 빼앗긴 아이처럼 왜 울상입니까?”
“시끄럽다. 어서 출발이나 해라.”
듀리온은 고삐를 잡긴 했지만, 마차를 출발시킬 생각은 없어 보였다.
“각방 쓰신다면서요? 왜 그러세요. 마님이 미인이신 데다 착하기까지 하시던데. 자고로 여자를 울리면 서리 맞는다는 말, 모르십니까?”
“서리가 내리는 거겠지.”
“어쨌든요. 천재지변이 일어난단 거 아닙니까? 조심하세요. 착한 여자는 울리는 게 아니에요. 얼마나 서운하겠어요?”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결혼식 반지도 안드레아한테 사 오라고 시키고, 결혼식 드레스를 입을 때도 얼굴 한 번 안 내미셨잖습니까.”
“어차피 그런 거 관심 없는 사람이다.”
듀리온은 답답하다는 듯 애써 뒤로 넘긴 제 앞머리를 손으로 헤집었다.
“아. 거, 정말 답답하시네. 아랫사람들 보는 눈이 있잖아요. 마님을 돈에 팔려온 이국인쯤으로 볼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하십니까?”
“그렇다 해서, 감히 누구도 공작부인의 권위에 도전하지는 못하지.”
“물론 그렇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마님의 귀에 그런 얘기가 들어간다고 쳐봐요. 속상하실 거 아닙니까. 참, 충언을 해도 몰라준다니까요?”
“네놈 말은, 지금 나더러 한 침대라도 쓰란 말로 들리는 군.”
“아니, 제 말은 그게 아니라. 마님께 반지라도 하나 사주시란 거죠. 여자는 그런 걸 좋아한다잖습니까. 마님께서 감동하실 겁니다.”
“반지?”
“네. 반지요.”
시카르는 얼마 전 유라가 입술을 비죽 내밀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프러포즈라는 건 동그란 걸로 하는 거야.’
그 동그란 게 반지를 말하는 거였나? 하긴, 진유라가 태어나 반지는커녕 연애 한 번 제대로 해 본 적 없으니, 한 번쯤은 받아보고 싶을 법도 하겠지.
‘별 걸 다 신경 써야 하는군.’
시카르는 조금 번거롭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괜한 구설을 만들 필요는 없다고 느꼈다.
“보석상으로 가자.”
이번에는 듀리온도 마음에 든다는 듯 마차 고삐를 잡아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