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주인공을 입양하게 되었습니다 (3)2021.06.28.
“오다 주웠다.”
갑자기 미친 걸까? 시카르는 갑자기 내 방에 와서는 테이블 위로 마치 반지가 들어 있을 것 같이 생긴 보석상자를 툭 던지며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네가 있는 곳에서는 선물을 줄 때 이렇게 한다며? 오다 주웠다고.”
나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멍하니 보고 서 있었다가 시카르가 테이블 위로 던진 보석상자를 주워들었다. 그는 내게 어서 열어보라는 듯 입술을 실룩거렸지만, 나는 안에서 저주주문이라도 튀어나올까 봐 한쪽 눈은 실눈을 뜨며 상자를 열었다. 그런데, 상자 안에 든 건 저주주문이나 유령 같은 게 아니었다. 정말, 상상도 하지 못하게 그 안에서 반지가 튀어나왔다. 그것도 보석이 알알이 촘촘하게 박힌 다이아몬드를 닮은 보석 반지가.
“이, 이거 나 주는 거야?”
“동그란 걸 달라고 하지 않았나?”
얘가 자신이 소설 속 악역이라는 사실을 알고 머리가 어떻게 된 건가?
“달라고 하긴 했지만, 정말 줄지 몰라서 그러지…….”
‘너 그런 캐릭터 아니잖아?’
어쨌든 비싼 선물 마다하지 못하는 나는 웃음이 나오려는 걸 애써 참고 반지를 손에 들었다.
‘매우 비싼 거겠지? 얼마쯤 할까?’
궁금한 건 물어보는 게 좋겠지.
“이거, 얼마짜리야?”
“왜? 마음에 안 드나?”
마음에 든다고 하면 다음에 또 사준다고 하겠지? 그럼 엄청 맘에 드는 척을 해야겠군. 모처럼 기분이 좋아지는데? 나는, 봄날에 유채꽃밭을 돌 듯, 그야말로 황홀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너무, 너무 마음에 들어. 세상에 태어나서 이렇게 예쁜 건 처음 봐. 너무 기뻐. 시카르. 네가 이렇게 멋진 사람인 줄 몰랐어!”
‘본디,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 하나 더 사주고 싶기 마련이지. 후후.’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시카르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래?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군. 마음에 드는 걸 샀으니. 이제 그럼 반지는 더는 필요 없겠군.”
시카르는 보기 좋게 내 기대를 와장창 깨어놓았다. ‘그렇게 마음에 든다니, 하나 더 사주지.’라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넌 왜 생각하는 게 그 모양이냐? 왜 남들처럼 생각하지 않고 항상 초점이 어긋나냔 말이다! 소설에서 시카르를 점잖게 미친놈이라고 했었는데, 아무래도 소개를 잘못한 것 같다. 아무래도 그냥 미친놈이라고 해야 할 거 같은데? 어쨌든 반지가 두 개니까 이거라도 두둑하게 챙겨둬야겠지.
“그런데 키안은 아직인가?”
“응. 아직.”
“그거 이상하군.”
‘이상한 걸로 따지면, 이 세계에서 네가 제일 이상하지.’
“약초를 바꿔서 먹인 것도 아닌데 키안이 일어나지 않잖아. 우리가 화염초를 먹인 것도 아니었는데, 왜 깨어나지 않는 거지?”
“아프니까 그렇겠지. 어차피 주인공이라 여기서 죽지는 않아.”
“이상하단 생각이 들지 않나?”
“물론 그렇긴 하지만, 어차피 원작에서도 일주일간 깨어나지 않았잖아.”
“그러니까 더 이상한 것이지. 내가 이 녀석에게 죽음을 당하지 않기 위해 원작을 바꾸려고 하는데, 원작대로 흘러가고 있으니까.”
시카르가 그 말을 하는 순간 나는 소름이 돋았다. 그의 말대로라면 우리가 어떻게 바꾼다 한들 시카르는 죽게 돼 있단 거잖아? 자신의 죽음이 뻔히 보이는 악역이 취할 선택은 불 보듯 뻔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어차피 원작을 바꿀 수는 없다는 건가?”
‘그런 대사를 하면서 나를 쳐다보지 말아 줄래?’
하지만, 말을 하며 나를 쳐다보는 바람에 나는 그 말이 마치 ‘그렇다면 다 죽이면 되겠군.’으로 들렸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원작을 분명히 바꿀 수 있어.”
조금 전 내게 반지를 주던 남자는 오랜만에 그의 허리춤에 있는 장검을 또다시 꺼내 들었다.
‘죽인다는 협박도 이젠 지겹지 않니……?’
“살고 싶으면 내 인생을 해피엔딩으로 만들어라.”
‘악역 주제에 해피엔딩까지 바란다니.’
나는 울다시피 웃으며 시카르를 다독이듯 그가 들고 있는 칼에서 옆으로 살짝 비켜섰다. 그 순간, 무언가 퍼뜩 떠올랐다.
“키, 키안에게 가봐야겠어!”
나는, 달려가 키안의 이마와 몸을 만져보았다. 처음 키안을 발견했을 때만큼은 아니었지만, 예상대로 아이의 몸에서는 아직도 열이 많이 나고 있었다. 이 정도로 열이 오래간다면 세균에 심하게 감염된 경우일 수 있다. 이를테면, 패혈증 같은 것 말이다. 이럴 땐, 해열제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항생제다.
‘원작에서 화염초를 먹여서 문제가 생긴 게 아니었던 거야.’
뒤따라온 시카르는 해결할 수 있겠냐는 듯 삐딱한 자세로 나를 쳐다보고 서 있었다.
“직업이 의사는 아니었던 걸로 아는데?”
“시카르! 우리가 너무 원작에만 의지한 건지도 몰라!”
“그럼 뭘 봐야 하지?”
“중증의 세균감염인 것 같아! 항생제가 필요해. 의사 불러줘!”
“조속히 치료할 사람을 부르도록 하지.”
키안의 몸에서 아직까지 열이 나고 있었지만, 아이가 열 속성을 가진 덕분에 겉으로 크게 티가 나지 않은 것 같았다. 처음 발견했을 때는 대체 얼마나 심각했던 걸까. 겉으로 볼 때 키안은 편안히 잠을 자고 있는 것처럼 보일 뿐, 끙끙대거나 식은땀을 뻘뻘 흘리지도 않았으니까. 그러니 다들 눈치를 채지 못했겠지. 키안의 곁을 지킨 후 한 시간쯤 지나서야 시카르가 부른 사람들이 도착했다. 하지만, 그가 부른 사람은 의사는 아니었다. 왕의 신관 라이제몬이었다.
‘아, 여기, 신관이 있는 판타지 세상 속이었지?’
라이제몬은 30대 중후반이지만 그보다 더 젊어 보였다. 그는 겉보기에도 점잖고 침착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는 내게 간단히 자신을 소개한 후 키안을 살피기 시작했다.
“아내의 말로는 세균 감염인 것 같다던데. 어떤가?”
“비 각하께서 보신 게 정확하십니다. 급성 패혈증인 것 같습니다. 치료는 간단한 편이기에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어서 시작해라.”
“네. 공작 각하.”
이윽고, 라이제몬의 손에서 밝은 빛이 번쩍이더니 키안의 몸을 정화시키듯 손을 뻗었다. 나는 그 눈부심에 실눈을 뜨고 키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라이제몬은 간단하다고 말했지만, 생각보다 치료는 오래 걸렸다.
“왜 이렇게 오래 걸리지? 실력이 형편없군. 그런 주제에 왕의 전속 어의가 된 것인가? 오직 왕족들만 치료한다는 왕실의 의사가 이렇게 굼뜨다니.”
구박을 듣고 있는 건 라이제몬인데, 왜 내가 땀이 삐질삐질 흐르는 걸까. 시카르는 치료가 늦다는 이유로 라이제몬을 구박했지만, 그는 딱히 동요되지 않는 모습이었다. 아마 그동안 이골이 날 만큼 잔소리를 꽤 많이 들었던 모양이다.
“치료를 끝냈으니 이젠 괜찮을 겁니다.”
“그럼 이제 곧 깨어나는 건가?”
“네. 이제 곧 아이의 정신이 돌아올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이는…….”
“이 아이는 뭐?”
“아, 아닙니다.”
“길리언이 혹여라도 누굴 치료하고 왔는지 묻는다면 있는 사실 그대로 고해라.”
“네?”
“어린아이를 치료하고 왔다고 하면, 그 아이가 어떤 아이인지 물을 것이다. 그때, 금발의 푸른 눈을 가진 소년을 구해왔다고 이실직고하란 말이다.”
“네. 각하.”
자신의 왕위를 지키기 위해 베로니아를 감금하고 그 아들인 키안을 찾기 위해 그 아비까지 제거한 길리언이었다. 지금쯤 길리언은 눈에 불을 켜고 금발의 푸른 눈의 가진 아이를 찾아 다니고 있을 것이다. 시카르도 그 사실을 알 텐데, 그는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어쨌든 곧 깨어날 거라니 다행이었다. *** 라이제몬이 떠나고 한참이 지난 후에도 나와 시카르는 정말 부모처럼 키안의 곁에 머물러 있었다. 나는 잠든 키안이 어서 일어나길 바라며 아이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이 작은 몸으로 고열과 싸우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하니 키안이 너무 가여워 코끝이 찡해졌다.
“그러고 있으니 정말 엄마 같군.”
그러게. 나보단 시카르가 더 아빠 같은 느낌이어야 할 텐데. 하긴 나이 차이가 아빠라기엔 너무 젊지. 아니지, 이 시대에는 불가능한 일도 아니지. 그때, 키안의 눈꺼풀이 꿈틀거리더니 슬며시 눈을 뜨기 시작했다.
“이제야 정신이 드니?”
깜빡거리며 눈을 뜬 키안은 나를 보며 안심하는 표정을 짓다가 시카르를 발견하곤 이내 경계하는 표정을 지었다. 키안은 살쾡이 새끼처럼 손가락에서 또다시 작은 불씨를 만들었지만, 아직 기운이 없어서 그런지 불씨는 성냥불 정도만큼 작았다. 키안은 용을 쓰며 불씨를 키우려 하는 듯했지만, 불씨는 전혀 커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시카르는 비웃듯 콧방귀를 꼈다.
“걱정 마라. 난, 아픈 꼬맹이를 상대로 어쩔 생각은 없으니까.”
그제야 긴장이 풀렸는지 키안은 이내 힘을 잃은 듯 불씨를 다시 꺼트렸다. 나는 기운 없는 눈으로 나를 보는 키안의 머리를 살며시 만져주었다.
“배고프지? 우리 수프부터 먹을까?”
키안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오래 걸리지 않아 안드레아에게 부탁했던 닭고기 수프를 들고 들어왔다. 나는 안드레아의 손에 들린 쟁반을 받아 시카르에게 건네주었다.
“지금이야. 시카르.”
시카르는 준비됐다는 듯 쟁반을 받아 들었다. 그런데 그는 손에 든 접시를 들고 뚜벅뚜벅 키안의 앞으로 걸어갔다. 로봇이 걸어도 저것보단 더 사람답게 걸어갈 것 같았지만, 시카르는 정말 관절이라곤 없는 사람처럼 딱딱하게 걸어가서는 키안의 앞에 섰다.
“밥 먹자.”
시카르는 무뚝뚝한 어조로 접시에 있는 수프를 떠서 키안의 얼굴 앞으로 내밀며 입꼬리를 실룩거렸다.
딴에는 웃는 것이었지만, 누가 봐도 그 모습은 사악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그러자 키안은 입을 꾹 다물고 시카르를 노려보기만 했다. 시카르는 키안이 왜 그런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지 알지 못하는 듯 무미건조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아니, 내가 미소 지으며 밥을 먹이라고 했지, 독을 먹이려고 하는 사람처럼 웃으며 밥을 먹이라고 했나?’
이 점잖게 미친놈을 어쩌면 좋을까. 역시 시카르에게 따뜻한 미소를 지으라고 한 건 무리였나? 아니나 다를까 키안은 걱정하는 눈으로 나를 보며 물었다.
“아줌마……. 아줌마가 먹여주면 안 돼요?”
“공작님이 먹여주는 건 싫어?”
“네.”
“공작님께서는 얼마 전에 네게 뭐라고 한 게 미안해서 화해하고 싶어 하셔. 그래서 먹여주고 싶어하는 거야.”
“공작님이 주는 건 안 먹고 싶어요.”
키안은 단호했다. 시카르가 주는 건 절대 받아먹지 않겠다는 듯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시카르는 기가 막힌다는 듯 스푼을 다시 내려놓았다.
“영광인 줄을 모르는군.”
또 화낸다. 어른과도 대화하는 법을 모르는데 애와 대화하는 법을 알겠냐고. 급했던 나는 얼른 시카르에게 달려가 속삭였다.
“오늘은 내가 먹일게.”
내가 어색하게 웃자 시카르는 알아서 하라는 듯 내게 접시를 넘기곤 밖으로 나가버렸다. 저번처럼 또 죽이네 마네 할까 봐 긴장했지만, 그동안 학습한 성과가 있었던지 다행히도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우리 밥 먹을까?”
키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제 손으로 스푼을 들려고 했다.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았으니 내가 떠먹여 줄게.”
키안은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이며 소심하게 입을 벌리며 내가 먹여주는 수프를 받아먹었다. 그러곤 곧, 뭔가 느낀 듯 나를 쳐다보았다.
“닭고기 수프…….”
‘옳지. 그렇지! 이게 바로 닭고기 수프란다. 키안! 이제 실컷 감동해도 좋아.’
키안은 아버지 생각에 그리움이 밀려온 듯 눈물을 왈칵 쏟아 내었다. 며칠 굶어서 울 힘도 없을 텐데 눈물을 뚝뚝 떨구는 키안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아는체할 수가 없었다.
“왜 그러니?”
“아빠가…… 아빠가…… 제가 아플 때마다 닭고기 수프를 만들어 주셨거든요……. 맛은 틀려도 아빠 생각이 나서…….”
키안은 겨우 한 스푼을 받아먹고 눈물을 왈칵 쏟아 냈기에 나는 더는 먹이지 못하고 아이를 안아주었다. 이렇게 울리려고 닭고기 수프를 먹인 게 아니었는데, 아이가 슬프게 우니 나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키안 몰래 눈물을 닦아내며 아이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겠지만 난 모든 슬픔을 다 잊고 네게 행복했으면 좋겠구나…….”
항상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기에 진심으로 우러나온 말이었다. 내 진심이 키안에게 잘 닿길 바라며 나는 아이의 등을 어루만졌다.
“훌쩍…… 고마워요…….”
훌쩍거리며 울음을 그친 키안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렸다. 실컷 울었으니 이제 배가 더욱 고프겠지.
“그럼 우리 먹던 걸 마저 먹을까?”
키안은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키안에게 수프를 먹였다. 입맛에 맞는지 잘 먹는 모습을 보니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역시 아이들은 천사 같은 존재다. 키안은 수프를 맛있게 받아먹었지만, 깡마른 키안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몸이 조금 더 회복되고 나면 맛있는 디저트도 먹자꾸나.”
수프를 잘 받아먹던 키안은 갑자기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다물었다.
“아줌마…….”
키안의 표정이 너무 심각해 보였다. 아이는 슬픔이 가득한 눈동자로 나를 보며 물었다.
“저 이거 다 먹고 몸이 완전히 회복되면…… 이 집 나가야 하는 거죠? 저 다 나으면 보내실 거죠?”
“아니야. 왜 그런 말을 해.”
“잠결에 하녀 누나들이 하는 말을 들었어요. 제가 다 나아야 이 집을 나가게 될 거라고…….”
하녀들은 우리가 키안을 입양할 것이라는 걸 상상도 못 하고 있으니 저런 말들을 했을 테지.
‘하녀들에게 다신 그런 말을 하지 못하게 입단속을 시켜야겠어.’
“아니야. 네가 원하면 더 있어도 돼.”
“정말이요?”
‘그럼 넌 우리가 입양할 거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