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주인공을 입양하게 되었습니다 (4)2021.07.01.
그런 계획은 지금 미리 말할 필요가 없었기에 나는 포근하게 웃으며 다시 수프를 먹였다.
“그래. 그러니까 실컷 먹어.”
키안은 안심이 된다는 듯 환하게 웃었다.
“감사해요. 아줌마.”
그때, 물수건을 들고 온 메이리가 화들짝 놀란 얼굴로 키안을 향해 타이르듯 말했다.
“아줌마라니. 마님이라고 해야 해.”
키안은 그제야 자신이 큰 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어쩔 줄 몰라 하며 사과했다.
“아! 죄송합니다. 마님!”
나야말로 왕족에게 이렇게 막 하대를 하면 안 되는 처지였지만, 난 일단 모르는 척 괜찮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괜찮아. 모르고 한 말이니까 죄송해하지 않아도 된단다.”
내가 괜찮다고 말해도 키안은 풀이 팍 죽어 있었다.
“그래도…… 정말 죄송해요.”
나는 분위기를 전환할 겸 키안의 이름을 물었다.
“참, 네 이름은 어떻게 되니?”
“전, 키안! 키안이라고 해요!”
“성은 없어?”
키안은 성을 말해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제 아빠가 말하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고민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키안이 나를 신뢰한다면 말을 할 것이다. 키안은 불의 정령사의 자식인 만큼 사람의 온기를 느낄 수가 있었다. 아이는 그 온기를 통해 사람을 신뢰하거나 불신하거나 선택을 했다. 지금까지 소설에서는 키안의 선택이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하지만 나라는 인물은 이 소설 속에 갑자기 등장한 의외의 인물이었다. 그런데 날 믿어줄 수 있을까?
“아줌마. 아니, 마님.”
“응?”
키안은 가까이 오라는 듯 내게 손짓했고 나는 키안의 얼굴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키안은 간지러울 만큼 낮게 소곤거렸다.
“나중에 아무도 없을 때 얘기해줄게요.”
아. 그러니까 지금은 하녀가 있어서 말을 못 하겠다는 거구나. 나중에는 내게 진짜 자신의 성을 말해주려나. 이거 기대가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긴장되는데?
“그래. 서두를 필요 없어. 네가 말하고 싶어질 때 말하렴. 참, 키안.”
나는 키안에게 침대 기둥에 매달아둔 드림캐처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거 봐. 공작님이 너를 위해 만들어 준 거야.”
키안은 드림캐처를 슬며시 봤다가 다시 나를 쳐다보았지만, 관심 없는 표정이었다.
“그게 뭐예요?”
“악몽을 꾸지 않게 해주는 토템 같은 거야.”
“그런 걸 저한테 만들어 주셨다고요? 왜요?”
“네가 악몽을 꾸는 것 같다고 만들어 주셨어.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러니?”
키안은 전혀 즐거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의심 가득한 눈으로 드림캐처를 쳐다보았다.
“공작님께서는 저를 위해 그런 걸 만들어 주실 분이 아닌 거 같아서요…….”
키안이 보기엔 그렇게 보일 것이다. 나는 키안의 침대에 드림캐처를 걸어 주었다.
“키안. 그건 어쩌면 선입견일 수 있어.”
“선입견이요……?”
“그러니까 공작님 인상이 좀 더럽…… 아니, 좀 무서워 보이잖아? 그런 이유로 사람을 나쁘게만 보면 안 된단다. 친하게 지내다 보면 꽤 괜찮다는 걸 알게 될 거야.”
나는 우리가 살려면 네가 시카르와 친해져야 해! 라고 외쳐주고 싶은 것을 꾹 참으며 말했다. 시카르가 내 기억을 읽지 못했다면, 아마 그렇게 말했을지도 모르지. 키안은 조금 고민하는 듯하다 더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저를 대할 때 화만 내시는걸요.”
“그건 어쩌면, 키안이 공작님을 볼 때마다 손에서 불씨를 만들어서 그런 게 아닐까?”
“아…….”
키안은 아차 싶은지 조금 반성하는 낯으로 고개를 숙였다. 사실 아이가 그렇게 나온다고 해도 어른이 어르고 달래줘야 하는 게 맞는 거였지만, 시카르의 입장에서는 키안은 자신을 죽이려는 킬러쯤으로 보일 테니 당연한 반응이기도 했을 것이다. 키안은 배가 부른지 그새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정말 콱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였다. 배가 불러서 노곤해진 키안을 두고 나는 조용히 방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하녀장 안드레아를 부르려는데, 마침 그녀가 내 방을 찾았다.
“안드레아. 마침 잘 왔어.”
“마님. 하실 말씀이라도…….”
“키안이 지금 몹시 곤궁한 상황이라는 건 알고 있겠지?”
“네. 알고 있습니다. 마님.”
“그래서 우리는 아이가 회복된다고 해도, 원한다면 좀 더 공작저에 머무르게 할 생각이라네. 하지만 하녀들이 키안에게 몸이 회복되면 이곳을 나가야 한다고 했던 모양이니 입단속을 시키도록 하게.”
안드레아라면 이 정도만 얘기해도 잘 알아들었을 것이다.
“네. 마님. 하녀들에게 각별히 주의를 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저, 그리고 마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하게.”
“대마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할머니가 오셨구나.’
나는 곧장 할머니의 방을 찾았다. 할머니께서는 차분한 얼굴로 소파에 앉아계셨고 그 옆에는 시카르가 앉아 있었다.
“할머님! 오셨어요?!”
할머니는 나를 보자마자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두 손을 내밀었고 나는 그 따뜻한 손을 맞잡으며 자리에 앉았다.
“어서 와라. 레페르 대신전에 머무는 동안 시카르와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었단다.”
“네. 할머님께 허락을 구할 틈도 없이 갑작스럽게 결혼을 올리게 되었어요.”
“어차피 나는 시카르가 누구와 결혼을 하든 허락을 했을 테지만, 그 사람이 날 구해준 너라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단다.”
“할머님…… 정말 너무 고마워요. 할머님…….”
할머니는 진심으로 내가 손자며느리가 된 것이 흡족한 모습이었다. 나는 신전에 간 결과를 물어보고 싶었지만, 쉽사리 물어볼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치료가 안 됐다는 말을 들으면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으니까. 그렇다고 묻지 않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지금 물을지 나중에 물을지 고민하던 차에 할머니가 먼저 내게 말을 해주었다.
“내 걱정 많이 했지? 갔던 일은 생각보다 잘 되었단다.”
“아…….”
“신전에서 진행을 늦출 수 있다고 하더구나.”
“너무 잘 됐어요. 할머님.”
내 손을 꼬옥 잡아주며 인자한 미소를 짓는 할머니를 보니 돌아가신 내 할머니가 떠올라 더 코끝이 찡긋거렸다.
‘오래 살아주세요.’
우리 할머니는 당뇨 합병증 때문에 내 곁에 오래 머물러 주지 못했기에 정말 힐리스 할머니만큼은 오래 살았으면 하는 내 진심 어린 바람이었다.
“참, 집에 웬 아이가 와 있다고 하던데?”
지금까지 조용하던 시카르가 이제야 할 말이 있다는 듯 말문을 열었다.
“네. 할머니. 안 그래도 그 아이 때문에 할머니께 허락을 받으려던 참입니다.”
“아이 때문에 네가 나한테 허락을 다 구한다고? 참, 별일이구나. 무슨 일이길래 그러는 게야.”
“저희가 그 아이를 입양하려고 합니다.”
할머니는 조금 당황스럽다는 듯 시카르를 보다가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너도 동의한 것이냐?”
“네. 할머님.”
“정말 별일이구나. 애라면 질색하는 애가 갑자기 왠 아이를 데려온 것도 모자라 입양이라니…….”
할머니는 잠시 생각하는 듯 고개를 숙이나 싶더니 이내 무언가 번쩍한 듯한 표정으로 나를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그 순간 할머니가 왜 나를 그렇게 쳐다보는지 알 것 같았다.
‘아, 아니야. 할머니 그런 거 아니에요.’
내가 열심히 표정으로 텔레파시를 보냈지만, 할머니는 결국 내가 우려하는 그 말을 하고야 말았다.
“혹시 네 아이니……? 그래서 내가 없는 동안 아이를 데려온 거니? 네 아이라고 하면 내가 허락을 해주지 않을까 봐서?”
결국, 이렇게 오해를 하시는구나. 나는 재미있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 시카를 한번 슬쩍 노려봐준 후 할머니를 향해 고개를 내저었다.
“아, 아니에요. 할머님. 그건 정말 오해예요. 아이는 저와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그때, 시카르가 내 말을 잘랐다.
“맞습니다. 할머니.”
그 순간 나와 할머니는 동시에 시카르를 노려보았다.
“뭐?!”
시카르. 농담이지? 지금 너 나 골려 먹기 위해 장난하는 거지? 내가 먼저 질문을 하기 전에 할머니가 먼저 질문을 했기에 나는 시카르를 향해 너 죽고 나 죽자는 듯 노려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정말 유라에게 아이가 있다는 말이니?”
“네. 할머니. 2층 두 번째 방에 있는 그 아이가 바로 유라의 아이입니다. 그래서 아이를 데려와 키우고자 합니다.”
도저히 못 참겠다.
“공작님……? 왜 그래요? 왜 농담을 하고 그래요. 할머님이 정말 오해하시잖아요?”
나는 그가 제발 이 난감한 사태를 무마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물었다. 하지만 시카르는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부인. 다른 사람은 몰라도 할머니를 속이는 건 아니 될 말입니다. 부인도 할머니께 사실대로 말하시지요. 사실, 부인의 아이라고. 그래서 저와 함께 키우고자 한다고 말입니다.”
‘이 미친놈아! 또 왜 그래?!’
정말 난, 시카르가 왜 저런 말을 하는지 정말 종잡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저 할머니의 오해를 풀어드리기 위해 매우 격렬하게 손을 내저었다.
“할머님. 정말 오해예요! 절대 아니에요! 절대.”
그러자, 시카르는 내 옆으로 바짝 다가와 나를 확 끌어안으며 할머니가 들으라는 듯 말했다.
“부인. 괜찮습니다. 할머니께서는 다 이해하고 받아들이실 겁니다.”
그리곤 이내 나에게 넌지시 귓속말을 했다.
“키안과 나란히 한 곳에 묻히기 싫으면 내 말을 따라라.”
오싹. 나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 아니.”
“그럼 내 말에 장단을 맞춰라. 네 목숨은 내가 쥐고 있다는 걸 항상 잊지 말도록.”
“아, 알겠어…….”
하지만, 이건 마지못해 한 대답일 뿐이었다. 시카르는 말 잘 듣는 강아지를 달래듯 내 머리를 한 차례 쓰다듬어 준 후 나를 놓아주었다. 그리곤 딴에는 다정해 보일 것 같은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부인. 이제 할머니께 사실대로 말씀드리지요.”
아, 진짜. 나는 할머니를 보며 매우 송구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할머님...”
할머니는 조금은 충격을 받은 듯 당분간 말씀이 없었지만, 곧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해야 이해가 가는구나. 내 손자는 내가 안다. 시카르는 절대 아이를 데려와서 키울 수 있는 애가 아니란다. 유라 너 때문이었구나.”
“부인을 용서하세요. 할머니, 차마 할머니께 숨겨둔 자식이 있다고 말하기가 힘들었을 겁니다. 그러니 유라를 조금만 이해해주세요.”
“의외긴 했지만, 아이가 있는 건 죄가 아니지. 유라, 네 아이를 받아줄 테니 이제 더는 숨기지 않아도 된단다.”
그러고 보니 시카르와 내가 아무 연고도 없는 키안을 난데없이 갑자기 입양하는 것도 남들이 보기엔 이상해 보일 일이긴 했다. 시카르는 그래서 이런 거짓말을 꾸민 걸까?
“시카르는 아무리 제 아내가 될 여자의 아이라 해도 선뜻 받아들이지 않을 녀석이지. 근데, 네 아이를 데려오겠다고 하는 걸 보니 네 덕분에 정말 많이 변한 것 같구나. 유라 네 덕에, 어릴 때 그 순수했던 내 손자 녀석을 다시 보는 것 같아서 난 네게 매우 고맙단다. 참, 아이의 이름은 무엇이냐?”
별로 대답하고 싶진 않았지만, 시카르가 빤히 쳐다보고 있어서 한숨을 푹 내리 쉬며 말했다.
“키안이요…….”
“키안이라. 아주 예쁜 이름이구나. 키안을 내 손자로 받아들이마.”
할머니께서는 이렇게 말하면 내가 매우 기뻐할 거라 생각하고 계시겠지? 하지만, 난 모솔에 애기엄마가 된 터라 전혀 기쁘지는 않았다. 연애는커녕 아직 키스도 못 해 본 데다, 그나마 내가 키스 비슷한 걸 해 본 거라곤 시카르와의 결혼식에서 키스하는 척을 해 본 게 전부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