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주인공을 입양하게 되었습니다 (6)2021.07.08.
아침 일찍부터 서두르는 바람에 잠을 충분히 자지 못한 나는 시카르의 가슴에 기대어 있던 중 깜빡 잠이 들었다. 잠을 자는 동안 ‘아주 명당을 잡았군. 너도 알다시피 내 품에 안긴 여자는 네가 처음이니 영광인 줄 알아라.’ 등등 시카르가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졸음이 쏟아지는 오후의 낮잠은 달콤하기만 했다. 충분히 낮잠을 즐긴 후 눈을 떴을 땐 시카르가 내 머리에 자신의 머리를 기대고 잠들어 있었다.
‘이 무거운 머리 안 치우냐?’
나는 어떻게 이 인간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고 깨우는 가에 대해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눈앞으로 루시가 걸어가는 게 보였다. 비록 온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긴 했지만, 귀족의 아이들이나 입을 법한 비싼 털모자와 털코트를 입고 있는 것이 루시가 맞는 것 같았다. 루시는 원작에서처럼 덜덜 떨면서 이 한적한 시골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원래는 뒤쫓아온 키안이 루시를 업고 다시 되돌아가지만, 키안은 지금 저택에서 잘 쉬고 있기 때문에 갈 수가 없을 것이다. 나는 생각을 깊이 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곧장 시카르를 깨우기 위해 그의 예민한 부위를 조금 건드려 주었다. 한마디로, 시카르가 가장 간지러움을 많이 느끼는 옆구리를 살짝 찔렀다.
“으하하핫!”
해괴한 웃음소리를 내며 잠에서 깨어난 시카르는 이내 현실을 자각한 듯 나를 슬쩍 쳐다보았다.
“뭐 하는 거지?”
“어서 일어나! 저기, 루시가 나타났어!”
눈을 몇 번 껌뻑이던 시카르는 루시를 발견한 후 곧장 마차에서 내렸다. 나도 따라 내리려 하자 시카르는 마차 문을 닫으며 말했다.
“밖이 추우니 안에 있어라. 나와서 괜히 번거롭게 하지 말고.”
그래도…… 루시가 따라오게 하려면 상냥한 언니 같은 내가 있어야 할 것 같았기에 나는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시카르가 미처 챙기지 못한 숄도 챙기고.
“내리지 말고 있으라니까.”
“지금 네 얼굴은 아이들이 좋아하는 인상이 아니야. 루시가 널 보고 도망가면 어떡해.”
“하긴, 아이들이 봐도 오금을 저릴 만큼 위압감이 들겠지.”
‘으스댈 일 아니라고.’
“그리고 너 숄도 안 챙겼어. 내가 먼저 갈 테니까 넌 뒤에서 조용히 따라오며 잘 봐. 내가 어떻게 주인공 루시를 데려오는지.”
시카르는 콧방귀를 끼며 전혀 기대하지 않는 얼굴로 말했다.
“기대해보지.”
안 그래도 앞을 보니 기운 없이 어깨를 늘어트린 채 걷던 루시가 우리를 발견하고 잔뜩 긴장한 새끼 고양이처럼 눈썹을 치켜 올리고 있었다. 나는 포근한 미소를 지으며 루시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얘야. 안녕. 이 추운 날씨에 이런 데를 혼자 걷고 있는 거니? 혹시 길을 잃었니?”
루시는 선뜻 대답하지 않고 내 뒤에 서 있는 마차를 한 번 보고 난 후 나를 다시 쳐다보았다.
“혹시…….”
그러곤 무언가를 생각하는 표정을 짓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블레이크 가문 분이신가요?”
마차 문장을 보고 블레이크가라는 걸 알아낸 듯했다. 역시 내 최애 여주라 그런지 확실히 똑똑했다.
“맞아. 난 블레이크가의 공작부인 유라 블레이크라고 한단다. 길을 잃은 것이라면 집까지 데려다주마. 마차에 타지 않겠니?”
루시는 내 뒤에 있는 시카르를 힐끔 보고는 나를 향해 드레스 자락을 사뿐히 올리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비 각하께 인사드립니다. 저는 유카나다르 후작가의 차녀 루시 유카나다르라고 합니다.”
어쩜 이렇게 똑똑하고 말도 예쁘게 잘할까. 우리 키안도 지금까지는 오두막에서 아빠와 둘만 살아서 평민처럼 컸지만, 이제부터 수업을 시작한다면, 루시처럼 교양을 갖춘 귀족이 되겠지? 나는 짐짓 놀란 듯 입을 살짝 벌렸다.
“그렇구나. 유카나다르 가문의 차녀인 루시가 그렇게 예쁘고 총명하다고 소문이 자자하더니, 그 아이가 너였구나.”
루시는 내 칭찬이 마음에 드는 듯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과분한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비 각하.”
이런 맛에 딸을 키우는 것일까? 나는 루시의 말과 행동이 너무 귀여워서 어쩔 줄 모를 것만 같았다. 정말 가서 볼에 입맞춤을 쪽쪽쪽 해대고 싶을 만큼 루시는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역시 모든 것을 다 가진 여주인공다워.’
“루시. 네가 어떻게 이곳에 홀로 있었는지 사연은 묻지 않을게. 하지만, 이 추운 날씨에 널 이렇게 홀로 두고 자리를 떠날 수가 없구나. 우리가 널 후작저로 데려다주고 싶은데, 괜찮다면 마차에 오르지 않겠니?”
루시는 두 손을 공손히 모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마침, 도움이 필요하던 차였습니다. 비 각하께서 허락하신다면, 폐가 되는 줄은 알지만, 신세를 좀 지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좋다는 듯 루시를 향해 숄을 내밀었다.
“참, 마차에 여분의 숄이 있어서 가져왔단다. 추울 테니 이걸 덮는 게 좋겠구나.”
“감사합니다. 비 각하.”
나는 루시의 등에 따뜻한 숄을 덮어주고 루시의 손을 꼭 잡았다.
“이제 가자꾸나.”
마차에 올라탄 후, 루시는 앞에 있는 시카르에게도 인사를 올렸다.
“안녕하세요. 각하께 인사드립니다. 저는 유카나다르 후작가의 차녀 루시 유카나다르라고 합니다.”
“네가 그 레이독스의 딸인가 보군. 어서 마차에 오르거라.”
루시는 잠시 시카르의 매서운 눈빛에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내게로 눈길을 돌렸다.
“정말 감사해요. 비 각하. 정신을 차려보니 낯선 곳이어서 어디로 가야 할지 아주 막막했거든요. 비 각하께서 도와주지 않으셨다면, 제게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 정말 생각만 해도 끔찍하답니다.”
근 삼 년간 어린이집에 근무하면서도 한 번도 이렇게 또박또박 말을 잘하는 아이는 본 적이 없었다. 아직 일곱 살짜리 아이를 맡아 본 적이 없어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지만. 여튼, 나는 이렇게 똘똘한 아이를 본 적이 있냐는 듯 시카르를 쳐다봤지만, 그는 역시나 별 관심 없다는 표정이었다. 이렇게 귀여운 아이를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을 수가 있다니. 저 냉혈안!
“저런 놀랐겠구나. 지금부터 마차가 많이 덜컹거릴 수 있으니 내 손을 꼭 잡으렴. 루시.”
“비 각하께서는 매우 친절하신 분 같아요. 저는 정말 또 한 번 비 각하를 만나게 된 것을 행운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답니다.”
너무 귀여워서 눈물이 다 나려 하네. 나는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루시의 어깨를 꼭 감싸 안았다.
“그러니? 나도 방금 막 널 만나서 행운이라고 생각했단다.”
“정말이에요? 비 각하께서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얼마나 영광인지 모른답니다.”
루시는 해맑게 활짝 웃었다. 시카르만 아니었다면, 후작저에 도착할 때까지 이 웃음을 지킬 수 있었을 텐데. 시카르는 시끄럽다는 듯 귀를 긁적이더니 이내 루시를 보며 또, 엄한 표정을 지었다.
“조용히 갔으면 한다. 루시.”
루시가 놀라거나 잔뜩 주눅이 들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여주인공답게 루시는 침착하게 대꾸했다.
“네…… 각하.”
루시가 어른스럽다거나 조숙한 캐릭터는 아니었다. 후작저 안에서는 엄청난 울보에 말썽꾸러기였다. 다만, 밖에서는 엄마 없이 자란 아이란 소리를 듣기 싫어해서 가문 망신을 시키지 않기 위해 행동을 조심했다. 지금은 차분한 척하고 있지만, 후작저에 가게 되면 눈물을 터트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루시의 표정을 보니 후작저까지 갈 것도 없이 곧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루시는 울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악물고 있었다. 자고로 울먹이는 아이를 달래면 더 눈물을 쏟아내는 법. 나는 루시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루시. 너 아주 성숙한 숙녀구나? 나라면 울었을 거야.”
눈물이 나오기 직전인 루시의 얼굴이 언제 그랬냐는 듯 똘망해졌다. 루시는 후작저에 도착할 때까지도 성숙한 숙녀처럼 똘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여주인공의 그런 귀여운 모습에 넋이 나가 있었다.
***
“어서 들어오십시오. 블레이크 공작님, 블레이크 공작부인. 우리 딸을 찾아주셔서 뭐라고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자상하면서도 선한 눈매를 가졌지만, 기품과 위엄이 넘치는 따뜻한 카리스마. 레이독스에게서 느낀 첫인상이었다. 하지만 그에게서도 시카르를 보는 눈빛에서는 은근한 경계심이 보였다. 루시를 찾아줘서 고맙다는 느낌보단 루시를 찾아준 저의가 무엇인지 묻는 듯한 눈빛이랄까.
“홍차 괜찮으시겠습니까?”
난 홍차를 못 마시니 그냥, 물이나 한잔 달라고 할까.
“나쁘지 않지. 하지만 한 잔은 밀크티로 준비해.”
시카르는 무심한 표정으로 내가 좋아하는 밀크티를 주문하고 있었다.
“밀크티는 처음 들어보는 것이군요.”
“홍차에 우유를 섞으면 되는 것이다. 홍차는 2스푼, 우유는 8스푼 넣어서 가져오도록 해.”
레이독스는 곁에 서 있는 하녀를 향해 시카르가 말한 대로 차를 내올 것을 지시했다. 내 기억을 읽은 시카르가 내가 홍차를 못 마시는 대신 밀크티를 즐겨 마시는 걸 기억해줘서 고맙긴 한데, 우린 지금 손님의 입장이었기 때문에 나는 조금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세심한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후작님.”
그나저나 이 세계에서는 밀크티가 생소하기만 할 텐데. 아무리 유능한 주방장이라도 처음 만드는 것에 진땀을 빼기 마련이기에 나는 지금쯤 주방에서 고역을 치르고 있을 주방장에게 조용히 건투를 빌었다.
“아, 루시가 그러는데 숄을 얻어 입었다고 하더군요. 숄은 저희가 깨끗이 세탁해서 돌려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아니에요. 옷은 그냥 두세요. 루시를 만난 기념 선물로 주고 싶어서요.”
“아. 그러십니까. 공작부인의 깊은 은혜에 또, 한 번 감사드립니다.”
“별말씀을요. 그런데 루시는 어쩌다 그 먼 곳에서 홀로 있다 길을 잃은 건가요?”
레이독스는 말을 하기 전 절제된 한숨을 토해냈다.
“루시는 제 쌍둥이 아이들 중 막내입니다. 쌍둥이들이 어릴 때 아내는 병마와 싸우다 결국 하늘나라로 가고 말았죠. 아이들에게는 차마, 제 엄마가 하늘의 별이 되었다고 말하지 못했지요. 그런데 어느 날 부티크에 갔다가 엄마와 함께 드레스를 고르는 어떤 어린 영애를 보고 온 뒤부터는 엄마를 찾기 시작하더군요.”
레이독스는 그때 일이 떠올랐는지 잠시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엄마는 요정 나라에 갔다고 둘러댔더니 그 뒤부턴 요정 나라를 찾겠다고 툭하면 집을 나가는 중입니다. 혼자서도 쌍둥이들을 외롭지 않게 키우려고 했지만, 제가 노력해도 엄마의 빈자리를 채우는 게 쉽지가 않더군요.”
“저런. 마음이 아프셨겠어요.”
“이제 루시에게 제 엄마가 하늘에 있다고 말을 해야 할 때가 온 것 같아서 마음이 무겁긴 하지만, 언제까지고 숨겨둘 수는 없는 문제겠지요.”
“제게 좋은 생각이 있어요.”
“좋은 생각이요?”
“그 전에, 부탁 하나 해도 될까요?”
“무슨 부탁인지 먼저 들어보고 생각해보겠습니다.”
“저에게도 일곱 살 난 아이가 있어요. 하지만 친구가 없어서 늘 외톨이처럼 혼자 지내고 있지요.”
레이독스는 뜻밖이란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시카르를 쳐다봤다가 시카르의 매서운 눈빛을 보곤 다시 내게 시선을 돌렸다.
“그. 그러셨습니까?”
시카르를 보는 레이독스의 표정은 저 나이에 일곱 살 아이 아빠라고?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동안 싱글인 줄 알았을 테니까. 더 놀랐겠지.
“아, 오해하진 마세요. 공작님과 만나기 전 태어난 아이니까요.”
레이독스는 ‘그렇다면……?’ 이라 말하듯 쳐다보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가짜 가족이라는 것을 알리 없는 레이독스는 더 놀란 표정으로 시카르를 쳐다보았다. 저 성격에 일곱 살 아이가 있는 여자와 결혼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후작님께서는 가정교사를 쓰지 않고 아이들 교육을 직접 하신다고 들었어요. 그 어떤 가정교사보다도 뛰어난 수업을 하신다더군요. 그래서 후작님의 수업에 아이를 보내고 싶어 하는 귀족 부인들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그 말씀은…….”
“괜찮으시다면, 저희 아이도 그 수업을 받을 수 있을까요?”
레이독스는 당혹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시카르를 쳐다봤다.
“공작님께서도 동의하신 일입니까?”
시카르는 더 물을 것도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내 아내의 요구대로 하지.”
레이독스는 이를 꽉 물었다.
“그건 어렵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