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주인공을 입양하게 되었습니다 (7)2021.07.12.
레이독스는 시카르가 허수아비 국왕을 앞세워 공포정치를 하며 자신의 마음대로 왕국을 주무르는 것을 눈엣가시처럼 여겼던 사람이니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상하진 않았다. 그래도 생각은 좀 해보겠다고 할 것 같았는데, 레이독스의 반응은 너무나 단호했다.
“제 딸을 구해줬는데 생각해보겠단 말 한마디 없이 거절을 하는군. 예전부터 네놈이 건방지다고는 생각했지. 이제 보니 은혜도 모르는 놈이었군.”
“보은을 내세워 강요하실 생각이 아니라면 그만하시죠. 애초부터 계획적으로 접근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니까요.”
시카르와 함께 오질 말았어야 해. 두 남자의 기 싸움 때문에 나는 숨이 막히는 것만 같았다. 눈치를 보던 나는 두 사람의 대화에 은근히 끼어들었다.
“후작님.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공작님께서 한 말씀은 마음에 담지 말아 주세요.”
그리고 나는 시카르의 얼굴을 보며 내가 취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인상을 구겼다.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나를 보는 시카르를 무시하고 나는 다시 레이독스를 쳐다보며 너무너무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후작님께 제 아이를 맡기고 싶어 하는 것은 제 생각이지 공작님의 생각이 아니랍니다. 오는 길에 마차 안에서 루시가 제 소개를 했을 때 레이독스 후작님의 창의적인 교육방식에 대해 들었던 기억이 나서 말씀드려보고자 했던 것이었죠.”
나 긴장하지 않고 차분하게 말 잘한 거 맞지? 말을 끝내고 나니 나는 속이 타는 것을 느끼며 레이독스에게 차분히 말했다.
“실례지만, 물 한잔할게요.”
나는 하녀가 잔에 물을 따라 주기도 전에 내가 먼저 잔에 콸콸콸 소리가 나게 물을 따른 후 벌컥벌컥 들이켰다.
‘후. 살 것 같다.’
내가 물잔을 내려놓자 시카르는 나를 향해 몸을 비스듬히 숙이며 ‘공작부인이 체통 없게 물을 그렇게 마시다니’라며 슬쩍 노려보았다. 나는 레이독스가 듣지 못할 만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내가 실례한다고 양해를 구했잖아.”
“보통의 귀족 여인들이 실례한다고 양해를 구하고 물을 마신다 해도 너처럼 벌컥벌컥 마시진 않지.”
“그건 네가 안 가르쳐 줬거든.”
“레이독스가 이상하게 보고 있으니 귓속말은 그만하지.”
레이독스는 해괴한 광경이라도 보는 듯 우리를 보고 있었기에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어주며 몸을 바로 앉았다. 레이독스 후작은 조금 걱정된다는 얼굴로 나를 보며 말했다.
“괜찮으십니까? 공작부인.”
“네? 뭘 말하는 거죠?”
“아무리 물이라도 그렇게 한 번에 마시면 체할 수도 있고 속이 더부룩할 수도 있어서 말입니다.”
아. 평생 물을 끊어 마시기만 해서 이렇게 마시면 얼마나 시원한지를 모르는구나.
“아니요. 매우 시원해요. 후작님께서도 다음엔 한 번에 마셔보세요. 술을 한 번에 마시듯이요.”
레이독스는 조금 전보다도 더 당황한 얼굴이 되었고 시카르는 나를 보며 또 고개를 숙였다.
“여기서는 술도 한 번에 안 마신다.”
“그럼 전부 끊어 마신단 말이야?”
“귀족이니까.”
시카르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레이독스를 보며 차분히 말했다.
“내 아내가 이국 사람이라 문화가 다른 곳에서 와서 그런 거니 이해하라.”
레이독스는 그제야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공작님께서 좋은 공작부인을 만나신 듯하여 다행입니다.”
아무래도 시카르의 표정은 또, 건방지네 뭐네 하는 말을 할 것 같아서 내가 먼저 선수 쳤다.
“후작님. 실례지만, 아직 할 말이 있습니다.”
“네. 말씀하십시오. 공작부인.”
“후작님께서 제 아이를 맡아주신다면, 대신 전 루시에게 엄마만이 놀아줄 수 있는 것들을 해줄 생각입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이요.”
“엄마만이 놀아줄 수 있는 것들이라면?”
“같이 인형 놀이를 한다거나, 드레스를 골라준다거나, 목욕을 시켜준다거나 하는 것들이요. 아빠가 해주기 힘든 것들을 제가 해줄 수 있어요.”
“그런 거라면 루시의 보모가 해줄 테니 괜찮습니다.”
그동안 조용히 있던 시카르가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 정도면 괜찮은 조건 아닌가?”
말투에 비해 눈빛은 ‘거절하면 전쟁이다’라고 하는 듯 불타오르고 있었다.
“너, 눈빛이 너무 위협적인 거 아니야?”
“원래 협상은 눈빛으로 하는 거다.”
그건 네가 악역이라 악당들과 거래만 해서 그런거고! 나를 이를 악물고 말했다.
“우리 협상이 아니라, 부탁을 하는 중이거든.”
시카르는 내 말에 콧방귀를 꼈지만, 다행히도 레이독스는 조금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 부분은 조금 생각해보겠습니다.”
어차피 첫 숟갈에 배부를 생각이 없었기에 이 정도면 꽤 괜찮은 수확이었다.
***
“레이독스가 아니라 다른 귀족이었다면 블레이크 공작부인이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켜기나 하는 교양 없는 사람이라고 사교계에 소문이 다 났겠지.”
역시, 이 세계에서 현재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는 그 사람이 가장 멀쩡한 것 같다니까.
“그래도 이쪽 세계를 어느 정도 안다고 생각했는데 귀족이 갖추어야 할 교양과 품위는 형편없군. 아무래도 교양수업을 가르쳐야겠다. 곧 길리언이 왕후를 맞이하는데 거기서는 실수하면 일이 힘들어진다.”
길리언의 결혼식이라니. 이 세계의 악역들을 다 만나고 다니는구나. 정말 악당의 소굴로 들어온 게 실감이 나는 것 같았다.
“다음에 루시를 구할 땐 나 혼자 움직이도록 할게.”
“혼자서? 또 교양 머리 없이 냉수나 벌컥벌컥 마실 작정인가.”
네가 또 레이독스의 심기를 건드려서 일을 망칠까 봐!
“레이독스가 널 많이 경계하니까, 그 경계를 허물려고 그러는 거야. 지금 우리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건 레이독스와 친분을 쌓아서 키안의 목덜미에 있는 문장을 숨기는 거라는 것만 생각해 줘.”
나를 미심쩍게 보던 시카르는 잠시 제 볼을 긁적이더니 마지못한 듯 말했다.
“이번엔 가서 처신 잘하고 오도록 해라. 아니면, 다시는 마음대로 외출 못 할 테니까.”
이미 지금도 마음대로 외출 한 번 못하고 있는 신세라는 걸 이 인간이 정말 모르고 있는 건가? 나는 걱정 말라는 듯 미소까지 지어주며 잘하고 오겠다고 말했다. 물론 이는 악물었지만. 시카르는 관심 없다는 듯 마차 밖을 보고 있었다. 어차피 내 기억을 읽으면 그만이니 자기는 결과만 보겠단 거겠지. 육아하는 부모들에겐 빠질 수 없는 공통분모라는 것이 있다. 다음에 레이독스를 만나면 그 점을 공략할 예정이었다. 성공한다면 시카르도 다신 저런 소리를 못 하겠지. 한창 이런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어느덧 마차는 시가지에 도착했고 우리는 시내에서 유명한 부티크로 들어섰다. 나를 본 점원들은 처음엔 어느 귀부인인지? 하는 알쏭달쏭한 눈으로 보다가 시카르가 들어서자,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가, 각하 오, 오셨습니까!”
시카르가 곁눈질로 슬쩍 쳐다보자, 점원들은 곧장 우리가 앉을 곳을 안내하며 부산하게 움직였다. 점원들이 마칠 차를 내오는 동안 부티크의 주인장으로 보이는 사람이 감격스러운 미소를 보이며 앞으로 걸어왔다.
“아…… 안녕하십니까. 각하. 마히딜 부티크의 주인장이자 디자이너인 바린 마히딜 이라고 합니다.”
“먼저, 일곱 살쯤 되는 남자아이가 입을만한 옷을 가져와라.”
“네! 각하!”
여기가 군대인지 착각이 들 만큼 직원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고 곧이어 우리 앞으로 일렬횡대로 선 점원들이 가져온 옷을 전시하듯 보여주었다. 가져온 옷들은 하나같이 고급스러워 보였다.
“그 옷들 모두 담고 신상들로 코트와 연미복까지 30벌은 채워서 블레이크 공작가로 보내도록.”
“가, 감사합니다. 각하!”
“이번엔 내 아내가 입을 만한 드레스들을 내오도록 하지.”
“당장 준비하겠습니다!”
점원들은 정말 당장 옷을 들고 나왔다. 다만 드레스다 보니 마네킹에 입혀서 세워놓은 상태였다. 시카르는 선심 쓰듯 나를 보며 말했다.
“마음에 드는 게 있나?”
내게 고를 기회를 주겠다는 건데. 나야 많을수록 좋지. 더군다나 내 돈도 아닌데.
“다, 모두 다 마음에 들어.”
시카르는 다섯 벌 모두 챙기라고 일렀고, 점원들이 옷들을 포장하는 동안 나는 시카르에게 속삭였다.
“나도 한 30벌 정도 사주면 좋을 것 같아.”
“이미 공작저에도 올겨울에 입을 드레스를 수십 벌을 사뒀는데, 30벌이나 더 필요하다고?”
시카르의 표정이 굳어 있었다. 내가 너무 과하게 불렀나? 돈도 많으면서 겨우 드레스 30벌로 저렇게 표정이 굳어? 시카르는 정말 못 말리겠다는 듯 또 한숨을 쉬며 내가 기함할 소리를 했다.
“내게 그렇게 잘 보이고 싶나? 다 입지도 못할 드레스를 30벌이나 더 사고 싶을 만큼?”
응? 시카르는 황당해하는 내 표정은 보지도 않고 혼자서 한숨을 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내게 잘 보이고 싶은 네 노력은 가상하지만, 난 그런 것에 동요되는 사람이 아니다.”
착각엔 약도 없다는데. 이 정도면 이건 중병인 거다. 시카르도 레페르 대신전으로 보내면 고칠 수 있을까. 어쨌든 시카르는 그런 얼토 당토않는 소리를 하며 드레스 30벌을 추가로 주문했다. *** 나는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아까는 정신없어서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을 시카르에게 물었다.
“시카르. 소설에서는 본 적이 없어서 그러는데, 혹시 지금껏 널 좋아해 준 사람이 없어?”
그래서 너 지금 이렇게 착각하는 거지? 그게 묻고 싶었던 것이다. 내가 알기론 소설 속에서 모두 시카르를 두려워했지. 좋아한 사람은 없었으니까. 그러니 그가 죽는 장면에서 내가 울었단 이유 하나만으로 이렇게 착각하는 것일 테고.
“네가 처음이길 원하는 것인가 본데, 애석하지만 네가 처음은 아니다. 나를 정말 좋아했던 녀석이 있었지.”
그랬었나……?
“그랬구나. 소설에서는 안 나와서 몰랐지. 근데 과거형이네……?”
“지금은 하늘의 별이 되었으니까.”
뭐야. 시카르에게 그런 사연이 있었던 거야? 시카르는 그리운 기억을 떠올리듯 아득한 눈으로 마차 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밖에 모르는 바보였다. 마치 지금의 너처럼 말이지.”
나, 너밖에 모르는 게 아니라 너만 없었으면 하고 있거든요. 정말 얜 대체 어딜 봐서 내가 자기밖에 모른다고 생각하는 거지? 시카르는 내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짓고 있든 말든 감상에 젖어 말했다.
“정말 하루도 나를 쫓아다니지 않은 적이 없었다. 나를 볼 때마다 그 작은 꼬리를 그렇게 신나게 흔들 수가 없었지.”
응?
“아침에 일어나면 항상 내 얼굴을 핥고 있고, 자기 전엔 언제나 내 옆구리를 차지하려고 했지.”
내가 이곳에 와서 저 인간 때문에 어이없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긴 했지만, 오늘은 정말 최고점을 찍고 있었다.
소설에서 시카르는 인간은 믿으면 배신을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을 싫어한다고 했다. 그래서 그가 유일하게 마음을 주는 것은 동물들이라고. 내가 자기를 좋아하는 감정을 나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이유가 저것인가? 그러니까, 나를 애완견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아니면 애완 인간 정도로 보고 있는 건가? 시카르는 이번에도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는 나를 보면서도 또, 내가 기함할 만한 소리를 했다.
“네가 첫 번째가 아니라 아쉬운가 보군.”
“너, 정말 내가 아쉬워하는 것처럼 보여?”
아무래도 시카르는 사람의 표정을 봐도 감정을 못 읽는 게 분명했다. 사람의 기억만 읽을 줄 알지 감정은 못 읽는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내 표정을 보고 그런 말을 할 수가 없는 거지!
“네가 정 원한다면 마지막은 네게 줄 수도 있다. 네가 우리 해피보다 오래 산다면 말이지.”
무슨 소리야! 나 그런 마지막 필요 없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