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주인공을 입양하게 되었습니다 (8)2021.07.15.
“루시. 아빠가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
잠자리에 들기 위해 침대로 파고들던 루시는 미안함에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 올렸다. 레이독스는 그런 루시를 보며 이제는 때가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루시. 네가 좀 더 크면 알려주려 했다만 이젠 때가 온 것 같구나.”
머리끝까지 이불을 올리고 있던 루시는 이불을 내리고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늘 좋은 말만 해주는 아빠였기에 루시는 언제나처럼 그저 해맑은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무슨 말, 아빠?”
‘저 해맑은 미소 때문에 몇 번이나 망설였었지.’
하지만 이제는 더는 그래선 안 됐다. 제 딸을 위해 이제는 진실을 알려야만 했다.
“루시.”
“응, 아빠. 말해.”
아직 어린 루시는 레이독스의 진중한 표정을 보면서도 이상한 기류를 읽을 수는 없었다. 루시는 그저 해맑은 눈망울로 아빠가 무슨 말을 해줄지 잔뜩 기대하기만 했다. 그래서 레이독스는 더욱 마음이 아팠다. 그는 자신의 심장을 갉아 먹는 기분으로 울컥이는 마음을 꾸욱 삼켜 넣었다.
“네 엄마는 이제 요정 나라에 없단다.”
그 말에 루시에게는 더욱 반갑게만 들렸다. 루시는 활짝 웃으며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럼? 이제 엄마가 오는 거야?”
“아니. 이제 엄마는 영영 이곳에 올 수가 없어.”
루시의 커다란 눈망울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왜?”
“엄마는 이제 하늘의 별이 되었으니까.”
“별? 그럼 엄마를 볼 수 없어?”
사람이 죽으면 하늘의 별이 되고, 하늘의 별이 되면 영원히 볼 수 없다는 것을 루시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점점 루시의 눈가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루시는 눈물을 참으려 하는 듯 숨을 껄떡거렸다.
“루시가 할머니가 되면 엄마를 볼 수 있어.”
“할머니는 언제 되는데?”
레이독스는 울음을 참기 위해 숨을 껄떡이는 루시가 기특하면서도 마음이 아팠다. 그는 루시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엄지손가락으로 걷어내며 말했다.
“아주 나중에.”
“어, 엄마, 왜, 왜. 흑. 요정 나라에 없어?”
껄떡이는 울음을 애써 참으며 끝까지 말을 이어가는 루시를 보며 레이독스의 눈가에도 눈물이 살짝 맺혔다.
“엄마가 너무 빛나는 사람이라서, 하늘 나라에서 엄마를 일찍 데려갔어.”
그때부터 루시의 눈물샘이 터졌다. 루시는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그 커다란 눈망울에서 진주 같은 눈물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으아아앙……! 엄마! 엄마! 어엄마아……! 흐어엉……!”
루시는 세상이 떠나가라 목 놓아 울었다. 레이독스도 더는 참을 수 없는 눈물을 쏟아내며 루시를 안고 등을 토닥여주었다. 이미 각오한 일이었지만, 그의 마음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찢어지게 아팠다. 루시가 한동안은 툭하면 울 것이 눈에 훤했지만, 이 한겨울에 자꾸만 집을 나가게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엄마가 우리 루시를 하늘에서 항상 지켜보고 있을 거야. 근데 루시가 이렇게 울면 엄마가 얼마나 슬프겠어. 루시, 이제 뚝 해야지.”
그런 말도 루시에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엄마를 볼 수 없다는 서러움만이 가득했다. 루시의 눈물은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레이독스는 그런 루시가 울다 지쳐 잠들 때까지 등을 토닥여주었다. 잠든 루시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마저 닦아주는 레이독스의 마음은 너무 아팠지만,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었다. 그저 한숨만 내쉬며 일어서려는데, 의자에 걸린 블레이크 공작부인의 숄이 눈에 보였다. 왕을 허수아비로 세우고 난 후 왕국을 농단할 것 같던 블레이크 공작이었다. 아니, 분명 처음엔 이 왕국이 레카도르가 아니라 블레이크인 것처럼 굴던 공작의 행보가 생각지도 못한 엉뚱한 길로 가고 있었다. 세력 확장을 위해 예비왕후의 일가나, 국왕의 심복인 팔리움 노미나트의 여동생과 결혼을 올릴 줄 알았던 블레이크 공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신분이 어떤지도 모를 이국인 여인과 결혼을 했다. 그때만 해도 분명히 어떤 꿍꿍이가 있을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본 블레이크 부부는 정략결혼을 한 사람들 같지는 않았다. 겉으론 굳어 있어 보이는 듯해도 은근히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은, 연인에서 부부로 발전한 사이 같았다. 레이독스가 본 블레이크 공작은 여인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더군다나 블레이크 공작부인은 보통의 귀족 여인이 아니었다. 냉수 물을 벌컥벌컥 마시며 잔을 거칠게 내려놓는 행동은 어느 귀족 부인들에게서도 본 적이 없는 모습이었다. 왕마저도 제 발아래로 보는 공작의 곁에 그렇게 꾸밈없는 성격의 안주인이라니. 눈으로 보지 않았으면 믿지 못했을 것이다. *** 다행히 우리는 밤이 오기 전에 공작저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런데 공작저로 들어서자마자 우리가 본 것은 마당에서 물을 이고 가는 키안의 모습이었다. 매사에 별 표정이 없는 시카르도 이번에는 인상을 찌푸렸다. 시카르는 저벅저벅 걸어가 키안이 들고 있는 물통을 들어 올렸다.
“누가 너에게 이런 일을 시켰어?!”
키안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전에 시카르의 우레 같은 목소리에 몸을 움찔거렸다가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떨구었다. 키안을 감싸주고 싶었지만, 시카르의 표정이 몹시 화가 나 보였기에 나도 쉽사리 끼어들 수가 없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어요.”
“아무도 시키지도 않은 일을 넌 왜 하고 있는 거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만 푹 숙이고 있는 키안을 보던 시카르는 보기 싫다는 투로 말했다.
“네 방으로 올라가라.”
키안은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뒷모습을 쫓던 시카르는 화가 난 얼굴로 하인을 불렀다.
“키안이 왜 물을 이고 있는 거지?”
하인 한 명이 다급하기 뛰어와 시카르의 앞에서 머리를 조아렸다.
“그, 그게 저희도 하지 말라고 했는데 아이가 이런 거라도 해야 저택에서 살 수 있을 거라고…….”
아, 키안……. 키안이 레이독스의 집에서 지내며 행여나 자신을 쫓아낼까 싶어서 물을 길었단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시카르도 그 부분이 떠올랐는지 나를 한 번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원작대로 돌아간단 뜻이었다.
“잘 들어라. 키안은 앞으로 내 자식이 될 아이다. 그러니 앞으로 그 아이가 또 이런 허드렛일을 하고 있는 게 발견될 시 너희들 모두 엄벌을 피할 수 없을 줄 알아라.”
하인들 모두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조아리며 복창했다.
“네! 각하!”
시카르의 살벌한 일갈에 공작저의 분위기는 삭막해졌다. 나는 그 살얼음판 같은 곳을 빠져나오기 위해 낮게 속삭였다.
“난 키안에게 가볼게.”
시카르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나는 먼저 안드레아에게 시켜 키안의 옷이 도착하면 아이의 방으로 바로 보내지 말고 문 앞에 두라고 이른 후 키안의 방을 찾았다. 노크를 할까 하다가 나는 조심스레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키안은 풀이 죽은 얼굴로 침대에 앉아 있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침대에서 내려오려고 했다.
“아냐. 내가 갈 테니 침대에 앉아 있어.”
“죄송해요. 마님.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저 때문에 다른 사람들만 혼나게 한 것 같아서…… 공작님은 아마 절 쫓아내겠죠?”
아, 이제 쫓겨날 것 같아서 이렇게 풀어 죽어 있었구나.
“키안. 넌 아이잖아. 아이는 벌써 부터 쓸모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일하지 않아도 되는 거야. 그러니 사용인들이 해야 할 일들은 그들에게 맡기도록 해.”
키안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의 아비 발리제가 혹여라도 자신이 죽고 난 후 키안이 혼자 살아가게 될까 봐 쓸모 있는 사람이 돼야 어디서든 외면받지 않는다고 가르쳤다. 그래서 쓸모있는 사람이 되는 것 말고는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알 수가 없을 것이다.
“네가 할 일은 다른 아이들과 다름없이 잘 먹고 건강하게 잘 자라는 거야.”
“제가 잘 자라는 것이요?”
“그래. 그리고 키안. 네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단다.”
키안은 방금 혼이 난 까닭인지 내가 쫓아내기라도 할까 봐 잔뜩 겁먹은 얼굴이었다. 그리고 나는 입이 떨어지지 않아서 몇 번이라고 말을 하려다 멈추고 말을 하려다 멈추고를 반복하고 있었다. 시카르의 으름장 때문에 키안에게 이제 내가 생모라고 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린아이에게 거짓말하면 나쁜 아이라고 가르치는 어린이집 교사인 내가, 아이에게 천륜을 거스르는 거짓말을 해야 하는데 그 거짓말이 쉽게 나올 리가 없었다. 물론 내가 친엄마가 되어 키안의 마음을 위로해주고 아이를 악몽에서 꺼내주고 싶었지만, 이 어린아이에게 거짓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래. 키안에게 만큼은 거짓말하지 말자.’
남들에게만 내 친아들이라고 하면 되지 뭐. 나는, 내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몰라 두려워하는 키안의 손을 잡으며 장엄한 눈빛으로 말했다.
“키안. 우린 널 입양하고 싶어.”
아마 이건 생각도 못 했겠지. 키안은 매우 당황했던 모양인지 그 커다란 눈을 더욱 크게 뜨며 물었다.
“이, 입양이요?”
“너만 괜찮다면 우리가 널 잘 키워보고 싶어.”
“하…… 하지만……. 저…… 전 고아가 아니에요……. 어…… 엄마가 있어요.”
역시 키안은 엄마를 원망하면서도 그리워하는구나. 얼굴도 모르는 엄마를 늘 마음에 담고 살았던 키안을 생각하니 더욱 가여웠다. 그래 이런 천사 같은 아이에게 내가 친엄마라고 속일 수는 없는 거지. 나는 키안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너를 낳아준 너의 친엄마가 나타날 때까지 내가 너의 엄마가 되어주면 안 될까?”
“제 엄마가 되어준다고요? 왜, 왜요?”
“너 같이 예쁜 아이를 어떻게 입양하고 싶지 않을 수 있겠니. 그리고 우린 널 보호해주고 싶다고 생각했단다.”
이건 비단, 시카르의 협박 때문만은 아니었다. 키안을 보호해주고 싶은 것은 내 진심이었다. 비록 이 소설 속에서 내 최애캐는 루시였지만, 주인공 키안과 루이드도 매우 애정 했으니까.
“저, 정말요?”
“그래. 대신 나와 약속 하나만 해줄래? 날 네 친엄마라고 생각해 줘.”
“네?”
“만약, 누가 물어본다면 내가 친엄마라고 말해줘야 해. 그래야 사람들이 널 무시하지 않아. 나는 내 아들이 무시당하는 걸 볼 수가 없단다.”
“제, 제가 마님의 친아들이 된다고요?”
“비록 우리가 피를 나누진 않았지만, 난 우리가 그보다 더 끈끈한 사이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이 세계 주인공의 엄마가 되는 일은 나로서도 영광이니까.
“물론 네가 싫다고 하면 우린 널 입양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난 알고 있었다. 어른의 사랑이 목마른 키안은 결코 이 제안을 거절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원작에서 키안이 얼마나 쌍둥이들을 부러워했는지를. 얼마나 가족을 갖고 싶어 했는지를. 키안은 조심스레 손을 모으며 눈치 보듯 물었다.
“그, 그럼 마님께서……. 정말 제, 어…… 어머니가 되는 거예요?”
“맞아. 그러니 이제 엄마라고 부르련.”
금세 눈꼬리가 축 처지는가 싶더니 그새 키안의 눈이 다시금 커다래졌다.
“어, 엄마라고요?”
키안이 엄마를 부를 때에는 악몽을 꿀 때거나 아플 때였다. 한 번도 불러본 적 없는 엄마란 그 이름을 쉽게 부를 수 있을까.
“키안. 네가 불편하면 부르지 않아도 된…….”
“어, 어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