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주인공이 먼저지 (1)2021.07.26.
아이를 죽도록 싫어하는 시카르가 무릎 위에 아이를 올리다니. 시카르는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날벼락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렇게 고소할 수가 없었다. 나는 기대에 찬 눈으로 시카르를 바라보며 작게 화이팅을 외쳤다. 시카르에게 고소한 것도 있었지만, 아직도 서로가 불편한 듯 어색해하는 둘이었기에 저렇게 신체적 접촉이 있으면 더 가까워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은근히 있었다. 할머니 역시도 두 사람의 그런 어색한 기류를 귀신같이 알아차리신 듯했다. 시카르는 당황한 듯 저를 노려보고 있는 키안을 한번 봤다가 할머니를 쳐다보며 말했다.
“하, 할머니. 하지만 아직 키안과 나는…….”
할머니는 더욱 엄한 얼굴로 시카르를 보며 눈썹에 힘을 실으며 말씀하셨다.
“어허.”
제아무리 시카르라 해도 이 공작저의 절대 권위자인 할머니를 이길 수는 없었다. 아니, 할머니의 권위보다는 자신의 하나뿐인 혈육이자 가장 소중히 여기는 할머니였기에 져줄 수밖에 없었겠지. 시카르는 부루퉁한 얼굴로 키안을 보며 제 무릎을 툭툭 쳤다. 이리로 어서 올라오란 뜻이었다.
“키안. 어서 가봐.”
나와 할머니까지 거들자 키안도 마지못한 듯 시카르에게 걸어갔다. 그러곤 이내 하녀들이 키안을 들어 시카르의 무릎 위로 올렸다. 그 순간 두 사람 모두 경직된 듯 굳어 버리는 바람에 나는 웃음이 나오는 것을 가까스로 참기 위해 배를 움켜잡았다.
“매우 보기 좋구나. 그렇지 않니?”
“네. 할머님. 이보다 더 보기 좋은 부자는 여태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나도 그렇게 생각한단다. 시카르. 넌 앞으로 매일 하루 10분 이상은 키안을 무릎에 앉혀두도록 해라.”
“제게 10분은 귀한 시간입니다.”
“그 10분이 아이와 교감하는 것만큼 귀하지 않을 터. 10분간 키안에게 오늘 있었던 일등을 물으며 네 하루를 공유해.”
할머니는 매우 단호했기 때문에 시카르는 영혼이 빠져나간 얼굴로 바닥을 보며 대답했다.
“.……네.”
키안도 좋아하는 표정은 아니었지만, 할머니 말씀대로 매일 이런 시간을 갖다 보면 두 사람이 더 가까워지는 건 시간문제일지도 모를 거 같았다.
“오늘 내 치료 문제로 신관이 방문하기로 해서 오래 대화를 나누진 못하겠구나. 대신 내일 조찬은 함께하도록 하자.”
“네. 할머니.”
레페르 대신전은 거리가 멀어서 자주 방문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시카르는 레카도르에 있는 수도원에 매달 막대한 돈을 후원했고, 수도원에서는 매주 두 번 할머니를 치료해줄 신관을 보내주기로 한 것이었다. 할머니의 방을 나오며 키안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할머니께서는 어디가 아프신 거예요?”
“왜? 할머니가 걱정돼서 그래?”
“네. 그리고 제가…….”
키안은 시카르의 눈치를 슬쩍 살피더니 나를 올려다보며 작게 속삭였다.
“작은 상처 정도는 치유할 수 있어요.”
착하기도 해라. 지금 키안이 할 수 있는 것이라 봤자, 작게 긁힌 상처 정도를 치유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 작은 힘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어 하는 모습을 보니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웃음이 안 날 수가 없었다.
“신관님께서 오시니까 염려하지 않아도 돼. 우린 가서 밥이나 먹을까. 배고프지 않니?”
“네…… 실은 배가 고프던 참이었어요.”
“그럴 것 같았…….”
“식사는 나와 같이하도록 하지. 식사 예절도 알려줘야 하니까.”
시카르는 손뼉을 마주치며 좋아하던 우리에게 물 끼얹는 소리를 하곤 찬바람 쌩 휘날리며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나는 실망한 표정을 짓고 있는 키안에게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해야만 했다.
“키안. 공작님이 무뚝뚝해도 매우 좋으신 분이란다.”
양심에 좀 찔리긴 하지만, 시카르가 키안과 잘 지내보려고 마음을 먹었으니까. 언젠간 자상한 아빠가 되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한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키안은 내 말을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키안의 눈에 보이는 시카르는 차가운 냉기만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다이닝 룸에 앉자마자 시카르는 냅킨을 들고 우리를 쳐다봤다.
“지금부터 날 따라 해라. 유라 너도.”
키안과 나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며, 시카르가 하는 그대로 나란히 따라 했다.
“이건 손 씻는 물이다. 절대 마시면 안 된다는 걸 명심하도록. 특히, 진유라 너. 아무리 목이 말라도 절대 이 접시에 든 물은 마시면 안 된다.”
“나도 알아. 내가 컵에 있는 물을 놔두고 접시에 있는 물을 마실 리가 없잖아!……요.”
끝에, ‘요’는 시카르가 살벌하게 노려보고 있어서 나온 것이었다. 시카르는 키안이 보고 있는데 교양있게 말하라고 속삭이고 난 후 설명을 계속 이어나갔다.
“이 포크는 고기, 이건 샐러드를 먹을 때 쓴다. 헷갈리지 말도록. 음식을 먹을 때는 소리를 내서도 안 되고 입을 크게 벌려서도 안 된다. 물을 마실 때도 꿀꺽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게, 천천히 우아하게 마시도록 해. 식사는 애피타이저, 메인 디쉬, 디저트 순으로 나오거나 혹은 선택해서 먹을 수가 있다. 지금부터 식사가 올라올 테니 나를 따라서 순서대로 먹어보도록.”
나도 이런 것쯤은 안다고, 내가 사는 세계에도 레스토랑이 있단 말이다. 아니지, 이 세계가 내가 살던 세계의 룰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곳이란 말이다. 곧 식사가 나왔고 키안과 나는 시카르가 알려준 대로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키안이 나를 쳐다보며 식사를 하자, 시카르는 매섭게 키안을 노려보았다.
“키안. 유라를 보지 말고 나를 보도록 해라. 유라도 너처럼 아무것도 모르니까.”
“시카르. 아직 키안은 내 이름을 몰라.”
“그런가? 그럼 지금 알면 되겠지. 키안, 네 어머니의 이름은 유라 블레이크고 네 아…… 그러니까 이 공작저의 주인인 나는 시카르 블레이크다. 어렵지 않은 이름이니 곧장 외우도록 해라.”
키안은 ‘유라 블레이크’라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고 시카르는 다시 설명을 이었다.
“어쨌든 키안. 네 어머니는 아무것도 모르니 나를 보고 배우도록”
밥 먹다 체할 줄 알았지만 시카르의 식사 예절수업은 꽤 만족스러웠다.
“디저트를 다 먹고 나면 네 방에 가도록 해라. 가면 보모가 있을 것이다. 필요한 게 있거나 시킬 일이 생기면 모두 보모에게 말하도록 하고”
“보모요?”
키안은 질문을 하면서 시카르를 무시하듯 그가 아닌 나를 쳐다보았다. 시카르는 별 개의치 않았지만, 나는 조금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해주었다.
“응. 키안 널 돌봐주실 분이야. 비록 사람은 아니지만…….”
사람이 아니란 말에 키안의 두 눈이 커다래졌다.
“사람이 아니에요?”
“아, 아니. 인간은 아니지만.”
“인간이 아니라고요?”
“어? 그러니까…… 인간은 인간인데.”
우리를 보고 있던 시카르가 그만하라는 듯 팔짱을 끼며 나를 힐끗 쳐다보다가 키안을 보며 말했다.
“반만 인간이다. 반은 엘프고.”
엘프를 싫어하는 어린아이는 없었기에 키안도 기대된다는 듯 환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엘프요? 엘프는 동화 속에서만 봤는데, 정말 엘프가 여기 있어요?”
키안은 동화 속에 나오는 피부가 새하얗고 온화하고 천사 같은 화이트 엘프를 기대하고 있었다.
‘비카를 보면 사기당한 기분이겠는데?’
나는 혹시나 비카가 키안에게 겁을 주거나 할까 봐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호전적인 다크 엘프니까!
“키안. 만에 하나라도 비카 님이…….”
겁을 주면 내게 이르라고 말하려고 하다가 시카르가 기억을 읽어 낼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관뒀다.
“비카 님이 왜요……?”
“아…… 아냐. 기대와 달라도 너무 실망하면 안 된다고. 그 말을 해주고 싶었어.”
키안은 오히려 어른스럽게 걱정하지 말라는 듯 내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네. 걱정하지 마세요.”
말도 어쩜 이렇게 예쁘게 하는지. 내가 하도 걱정해서 그런지 시카르는 나를 한 번 보더니 키안을 향해 엄중한 눈빛으로 말했다.
“비카는 네가 부리는 사람이다. 그녀의 기운에 기죽지 말고 시킬 게 있으면 뭐든 시켜라. 네가 더 윗사람이라는 걸 잊어선 안 된다. 명심해.”
키안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심각하게 생각하진 않고 있었다. 아직 비카를 만나지 못했으니, 그녀가 그저 엘프라는 것 때문에 신나 있는 모습이었다. 얼마나 신이 났던지 비카가 기다리고 있다는 말에 키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제 방으로 돌아갔으니까. 그래. 아무리 그녀가 다크 엘프라 해도 기죽지 않을 거야. 우리 키안은 주인공이니까! 키안이 가는 것을 보고 시카르는 이제 내 차례라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리도 그만 일어나지. 계획이 어긋나지 않으려면 네게 교양을 잘 가르쳐야 하니까.”
나는 교양수업이 공포수업이 되지 않기를 바라며 시카르를 따라 일어섰다.
***
‘분명히 엘프라고 했는데.’
키안은 자신의 방 창가에 앉아 있는 백발의 여인을 멍하게 보고 서 있었다. 허리까지 길게 내려오는 백발 속에 가려진 얼굴은 까무잡잡하고, 창가에 앉아 있어도 다리는 바닥에 닿을 만큼이나 길었다. 동화 속에서 이런 엘프는 본 적이 없었다. 비카가 인간이 아니라던 어머니의 말이 떠올랐다. 사람인 것 같지만 큰 키와 긴 다리가 사람이 아닌 것 같기도 한 이상한 사람이었다. 온기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공작에게서 느꼈던 것처럼 차가운 냉기만을 뿜는 사람이었다. 아버진 이런 사람을 항상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도련님.”
키안은 저도 모르게 불씨를 만들 뻔하다가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움찔하며 불씨를 꺼트렸다. 비카는 창가에서 내려와 키안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긴 다리를 성큼성큼 내디디며 오는 걸음걸이에 품위는 없었지만 거침없고 거만한 기세가 있었다.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도련님의 보모를 맡은 비카 램버스트라고 해요.”
말투는 예의가 있었지만, 표정은 차갑고도 미묘한 묘한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어색한 인사 후 두 사람은 서로를 탐색하듯 한참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미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비카를 경계하고 있던 키안은 시카르의 말을 떠올렸다.
‘비카는 네가 부리는 사람이다. 그녀의 기운에 기죽지 말고 시킬 게 있으면 뭐든 시켜라. 네가 더 윗사람이라는 걸 잊어선 안 된다. 명심해.’
‘그래. 내가 윗사람이야.’
키안은 무엇을 시킬까 잠시 생각하다가 동화책을 읽은 지 오래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음…… 동화책 좀 읽어주세요.”
비카는 해괴한 소리라도 들은 듯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런 건 해롭습니다.”
아이에게 동화책이 해롭다니. 키안은 당황했다.
“네?”
“다크 엘프 라이빌 전기나 마왕 발라트 전기는 어떻습니까?”
“그게…… 뭐예요?”
“다크 엘프 라이빌 전기는 모든 생명을 거두어 초목이 푸른 초원을 황무지로 만들었던 다크 엘프 라이빌의 이야기고, 마왕 발라트 전기는 고대에 마물들을 풀어 한때나마 레카도르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마왕 발라트의 이야기지요. 매우 짜릿한 이야기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왕이요?”
마왕이란 단어를 처음 들어본 키안은 마왕의 의미를 물었던 것이었지만, 비카는 키안이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결론짓고는 신나게 떠들기 시작했다.
“마왕은 모든 사악한 마물들을 관장하는 마물들의 왕으로 복종과 파괴를 좋아하고…….”
‘이 사람 이상해…….’
비카의 얘기를 듣던 키안은 그 맥락은 작 파악되지 않았지만, 어쨌든 아이들에게 좋은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이 말썽을 피울 때면, 자신의 아빠 발리제가 입에 사탕을 물려줬던 것을 떠올렸다.
‘고대에 마귀를 쫓아낼 때 문 앞에 설탕을 뿌려두었단다. 마귀들은 달콤한 것을 좋아하지 않거든. 나쁜 마음이 들거나 할 때는 입안에 사탕을 물고 있으면 마음이 평온해진단다. 마음속에 들어온 마귀를 쫓아내는 거지. 하지만 사탕을 먹기 위해서 말썽을 피우는 나쁜 짓을 하면 안 된단다.’
마침 키안의 시야 속으로 테이블 위 바구니 안에 가득 들어 있는 사탕이 눈에 들어왔다.
“어느 날 북쪽 고원 설산의 차원이 문이 열리며 마계의 문이 개방되고…….”
키안은 신나게 설명을 하던 비카의 입속으로 사탕을 찔러 넣어주었다. 비카는 이게 뭐 하는 짓이냐는 듯 키안을 보며 두 눈을 깜빡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