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주인공이 먼저지 (2)2021.07.29.
비카가 키안을 어떻게 가르치고 있을지 궁금한데……. 설마, 막 어둠의 정령들을 불러내서 옴짝달싹 못 하게 한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나도 기억을 읽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비카가 키안에게 안 좋은 영향을 주는 건 아니겠지? 발라트 얘기를 들려준다거나, 다크 엘프 전기나 유령 얘기만 들려준다거나, 그런 거 말이야. 비카가 그런 걸 좋아하잖아.”
한마디로 비카는 마왕과 다크 엘프, 유령 등을 덕질하는 엘프였다.
“그렇게 걱정되면 빨리 교양이나 배워. 네가 어서 이 세계의 예법을 몸에 익혀야 애초에 계획했던 대로 내가 키안과 가까워지는 육아수업인가 뭔가를 익힐 수 있으니까. 지금은 키안보다 네가 더 문제라는 건 알고 있나?”
“그런 예법 정도는 배우면 금방 익힐 수 있어.”
“그걸 말하는 게 아니다. 곧 길리언의 결혼식이 열린다고 했던 말을 기억하겠지? 네가 본 소설 속에는 결혼식 이야기가 간단하게 서술됐지만, 왕족의 결혼식이니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아주 성대하게 열리니까.”
“성대하게 열리는 건 나도 알고 있어. 비록 한 줄 표현이지만, 그렇게 쓰여 있었으니까. 근데 그게 왜 내 문제야?”
“우리가 그 행렬을 같이 지나가야 하니까.”
“잠깐. 그, 그럼 그 인파 속을 우리도 같이 지나가야 한다고?”
“그래서 문제란 거지. 광장공포증이 있는 너는, 사람이 많은 곳에서 공황장애를 일으키니까.”
나는 벌써 부터 구역질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내가 입을 막자마자 내 상태를 잘 아는 시카르는 곧장 안드레아를 불러 멀미약을 가져오게 일렀다. 다행히 멀미약을 먹은 덕분에 구토는 하지 않았지만, 구역질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나는 사람들이 많으면 현기증과 함께 공포를 느끼며 종종 기절을 하기도 하는 광장공포증이 있었다. 때문에, 항상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졸업식도, 입학식도, 단 한 번도 참석한 적이 없었다. 그런 내가 유일하게 공포심를 갖지 않는 것이 아이들이었다. 그래서 시골의 작은 어린이집 교사가 되었다. 시카르도 그 사실을 잘 알았기에 우리 결혼식을 조촐하게 올린 것이었다.
“피할…… 방법은 없어?”
“왕의 결혼식에서 우리가 행렬에 빠지는 건 있을 수가 없다. 하지만, 좋은 생각은 있지. 그날 면사포가 달린 모자를 쓰고 마차에 오른 후 잠을 자도록 해. 눈을 뜨고 나면 모든 일이 끝나 있을 테니까.”
“정말 그래도 돼? 근데 나 어떻게 자?”
“비카가 수면 정령을 불러내서 널 재울 것이다.”
“그럼 내가 잠에서 깨어나 보면 다시 집일 수 있는 거야?”
“왕후와 인사를 나누어야 하니 그럴 수는 없지. 눈을 뜨고 나면 결혼식까지는 모두 끝난 후일 것이고 왕족 일가를 비롯한 소수의 귀족과 함께 있을 것이다.”
그것도 떨리는데……. 하지만, 수백 명도 아니고 그 정도 인원이라면 숨을 못 쉴 정도는 아닐 테니 괜찮겠지.
“그럼 이건 해결됐으니 더는 문제 될 게 없겠지?”
“아니, 이제부터가 문제겠지. 왕과 왕후를 만나야 하는데 넌 격이 뭔지도 모르고, 춤도 못 추니까.”
‘이게 무슨 소리야.’
“우리 춤춰야 해?”
“당연한 걸 묻는군.”
“안 추면 안 될까? 너도 알다시피 내가 춤이라고는 어린이 동요 춤동작이 전부라서…….”
시카르는 또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흘겨보았다.
“너 정말.”
내가 뭘 잘못했나.
“춤을 못 춰서 내 발을 밟을까 봐 걱정인 것 같은데.”
“…….”
“내가 그렇게 좋은가?”
“그만해…….”
“걱정 마라. 네 조그만 발에 밟히진 않을 테니.”
그냥 확 원 없이 밟아줘 버릴까. 내가 어떻게 하면 저 발을 더욱 아프게 잘 밟아줄 수 있을까 생각하려는 찰나에 시카르가 긴 한숨을 쉬었다.
“난 살면서 막막한 게 없었다. 하지만 넌 정말, 어디서부터 가르쳐야 할지 막막하군. 그래서 오늘부터 특훈에 들어갈 생각이다.”
“특훈이라니……?”
“먼저 중점적으로 네 말투와 행동, 걸음걸이를 교정해야겠다. 귀족들을 대하는 법을 전혀 모르니까.”
평생을 평민으로 살았던데다 사람을 멀리하기도 해서 처음엔 누군가가 시중드는 것이라든지 누군가를 부리는 것 등이 전부 낯설었다. 그래서 처음엔 그것들을 배우느라 애를 먹었었다. 이제 겨우 그런 것들을 교정했는데, 이번에는 귀족들을 대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니. 일반인 상대하기도 힘든데 귀족들을 상대할 생각을 하니 눈앞이 아찔해져 왔다. 그런데, 어째 시카르가 알려주는 격이라는 것이 좀 이상했다.
“먼저 귀족들이 인사를 걸어오면 곧장 대답할 필요 없다. 이렇게 눈을 살짝 흘겨보고 난 후 고고하게 고개를 한 번 까닥거려주면 된다. 알겠나?”
아무래도 이게 귀족들의 인사는 아닐 텐데. 이거 악역들의 인사법 아니야?
“사람을 그렇게 대하라고? 그것도 귀족을? 그건 너무 거만해 보이지 않을까……?”
“위엄있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넌 공작부인이니까.”
시카르의 말대로 사람들과 딱 저 정도로 대화를 나눈다면 매우 편할 것 같았다. 하지만, 태어나서 한 번도 사람을 저렇게 대해본 적이 없었다. 시카르가 말하는 위엄 있는 공작부인 행세를 제대로 할 수 없다면, 차라리 품위 있는 공작부인 행세라도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아무래도 네가 말하는 그런 역할은 내가 잘 소화 못 할 거 같아. 너도 알잖아. 내가 그동안 얼마나 예의 있게…….”
“넌 그냥 소심했지.”
“우리는 그걸 예의라고 하거든. 어쨌든 이 세계에 속하는 그런 예의를 갖춘 품위 있는 이 되는 법을 알려줘.”
시카르는 마지못한 듯 자신이 아는 품위 있는 공작부인의 모습을 알려주었다.
“그럼 그쪽에서 먼저 제 소개를 하고 나면 이름은 한 번 불러줘라. 그리고 또 말을 걸려고 하면 무시하고 지나가. 괜히 쓸데없이 대화가 길어져봤자 할 말이 없어진 넌 박수나 치며 맞장구 치느라 웃어대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내 아내가 귀족 부인들과 함께 깔깔깔 거리며 웃고 있을 모습을 떠올리니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는군.”
보통 사람들은 다 그러고 살아. 이 악역아.
“내가 그렇게 사교성이 좋은 성격은 아니라서 어차피 그렇게도 못해. 네가 말한 것처럼 도도하게 굴지도 못하고.”
“네 자존심 지키자고 겁도 없이 나를 하대하던 그 배짱을 난 높이 샀는데?”
그건 시카르 성격상 그런 시덥지 않은 일에 나 같이 쓸모 있는 인간을 죽이네, 마네 하진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작용했던 까닭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알다시피 내가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낯을 좀 가리다 보니까…….”
“비카에게는 그러지 않았잖아. 당당하게 제 할 말을 다 했던 것 같은데.”
“비카는 실제로 본 건 처음이었지만,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네가 내 편을 들어줄 것도 알고 있으니까 할 수 있는 말들이었어.”
“그런 거라면 이미 해결책은 나왔군.”
“해결책……?”
“다른 귀족들과 있을 때도 내가 늘 네 편이 되어주지. 그러니 나를 믿고 도도하게 고개를 들고 다녀라.”
아무래도 이건 태어나 낯을 가리거나 타인을 어려워 해본 적 없는 시카르가 이해할 만한 범주는 아닌 듯했다. 잠시 골몰히 생각에 빠져 있는 나를 본 시카르는 내가 고민 중이라고 느꼈는지 내 앞에 쿠키를 놓아주었다. 그래도 내가 쿠키를 좋아하는 걸 알고 챙겨 주는 건 좀 고마웠다. 마침 단것도 당기던 차였고.
“굳이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보일 필요는 없다. 그들에게 넌 다가가기 힘들 만큼 어려운 사람으로 보여야 하니까. 그편이 너도 편할 테고. ”
틀린 말은 아닐 수 있겠지만, 누군가에게 도도하게 구는 것보다 상냥하게 구는 것이 난 더 편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게 문제인 거고.
“쿠키 고마워. 잘 먹을게.”
“먹고 기분 좀 풀도록 해라. 떨어진 의욕도 좀 올리고.”
“이미 절반은 한결 나아진 거 같아.”
“다행이군. 우리 해피도 울적해 있을 때마다 간식을 챙겨 주면 금세 꼬리를 흔들곤 했지.”
쿠키를 하나 들어 아그작 먹던 나는 시카르의 얼굴에다 쿠키를 뱉을 뻔했다. 가족을 제외하곤 자신을 좋아해 준 게 강아지뿐이라 내가 자길 좋아한다고 느낄 때마다 강아지를 떠올리는 건가? 어쨌거나 간식을 좋아했던 해피 덕분에 간식을 얻어먹게 된 나는 이젠 무지개별에 있을 해피에게 속으로 조용히 고맙단 인사를 올린 후 간식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쿠키로 달콤한 시간을 보내고 커피도 한 잔 마시고 싶었지만, 쿠키를 다 먹을 때쯤 연주자들이 방으로 들어와 그러지도 못했다. 나는 시카르를 향해 나직이 속삭였다.
“이분들은 다 뭐야?”
“연주자들이지. 춤 연습을 하려면 음악이 필요하니까.”
“아니, 아니야. 없이 할 수 있어.”
불편하다고! 하지만, 시카르는 내 의견 따위는 무시하고 연주자들을 향해 말했다.
“연주를 시작하라.”
시카르의 주문이 떨어지자마자 무섭게 온갖 현악기 연주가 흘러나왔다. 이런 건 상상도 해본 적이 없는데. 연주하는 사람들 앞에서 귀족들의 사교계 춤을 춰야 한다니. 심각한 나와는 달리 시카르는 너무나 태연했다. 뭐, 그는 항상 태연하니까.
“지금 바로 춤부터 추지 않을 테니 쓸데없이 긴장하지 마라.”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다니까. 나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시카르를 쳐다보았다.
“먼저 연주부터 귀에 익혀둘 것이다. 그래야 춤을 배워도 더 빨리 익힐 테니까.”
하긴, 박자를 익혀두면 더 빨리 배우게 되지. 그거 괜찮은 생각이라고 생각했다. 연주가 나오기 전까지는. 연주는 그야말로 자장가가 무색할 정도로 졸음이 쏟아지게 만드는 잔잔한 연주였다. 가뜩이나 창가로 햇살이 쏟아지는 나른한 오후에 푹신푹신한 소파에 앉아 클래식을 듣고 있으려니 자꾸만 눈이 감겨왔다. 눈을 감지 않기 위해서 두 눈을 부릅뜨며 힘을 주고 있었지만, 눈 근육이 풀린 듯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쏟아지는 졸음을 참지 못해 언제 잠이 들었는지도 모르게 나는 기절을 하듯 잠이 들었다. 잠이 든 동안 누군가가 내 손을 꼬옥 잡고 있는 느낌이 들었지만, 나는 쉽사리 잠에서 깨어날 수가 없었다. 오후의 햇살은 너무나 따뜻하고 포근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