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주인공이 먼저지 (3) (18/197)

18화. 주인공이 먼저지 (3)2021.08.02.

얼마나 잤는지도 모르게 잠에서 깨어난 나는 나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는 시카르를 보면서도 비몽사몽이었다. 그러다 문득, 그가 내 손을 잡고 있는 것을 느끼곤 경기를 일으키듯 깨어났다.

16549773373941.png“뭐, 뭐야?”

16549773373949.png“일어났나?”

내가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고 느꼈는지 시카르는 그제야 나른한 얼굴로 내 손을 놓아 주었다.

16549773373949.png“우리 해피도 이 음악만 들으면 잠을 자곤 했는데, 정말 하는 짓이 해피와 다를 게 없군.”

이런 햇살 좋은 오후에 이런 음악을 듣고도 졸리지 않는 게 더 이상한 거야.

16549773373949.png“근데 너……. 왜 그런 꿈을 꾸는 거지?”

16549773373941.png“무슨 꿈? 아니, 것보다도 너, 꿈도 보이는 거야?”

16549773373949.png“물론이지. 네 머릿속으로 떠올리는 것들은 모두 보인다. 그것이 기억이든 환상이든 상상이든. 다만 그런 것들은 네가 경험한 게 아니기 때문에 기억 속에 잔재하지 않아서 그 순간에만 볼 수 있지. 한마디로 네가 꿈을 꾸고 있거나 상상하고 있는 그 순간만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 손을 잡고 있었던 건가. 내 꿈을 들여다보려고……. 생각해 보니까 이거 은근히 변태 같잖아?

16549773373941.png“너, 너 왜 자는 사람의 꿈까지 보고 그래!”

변태처럼!

16549773373949.png“꿈을 보면 그 사람의 무의식을 볼 수 있고, 무엇보다 악몽의 정령이 찾아갈 틈이 있는지도 확인할 수 있으니까.”

16549773373941.png“악몽의 정령……?”

16549773373949.png“이곳엔 다양한 정령들이 있고, 그 중엔 악몽의 정령이 있지. 악몽의 정령은 그 이름처럼 악몽을 꾸는 사람들의 꿈속으로 들어가 정신을 갉아먹은 놈이지.”

듣고 나니 기억이 났다. 길리언이 정령사를 이용해 그 악몽의 정령을 풀어서 키안을 괴롭혔었지.

16549773373941.png“나도 기억나. 감기처럼 어디서 흘러왔는지도 모르게 오염시키잖아.”

16549773373949.png“누군가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무의식을 괴롭히는 것만큼 좋은 것이 없지. 그래서 악몽을 자주 꾸는 키안이 그토록 악몽의 정령에게 많이 당했던 것이고. 주인공이라 길리언에게 정체를 들키진 않았지만, 보통 사람들이라면 일상생활에 지장을 받을 수도 있다.”

시카르는 꽤 진지하게 소설 속 얘기를 하고 있었다. 악역이 주인공의 모험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하게 느껴졌다. 내 꿈이 뭐 어떻길래 저런 말을 한 걸까. 설마 또 그 꿈을 꾼 건가.

16549773373941.png“혹시 내가 옷장에 숨어 있는 꿈을 본 거야? 아니면, 문이 잠겨 있지 않아서 불안해하는 꿈?”

16549773373949.png“옷장에 숨어 있는 것을 봤다. 그것도 아무런 잠금장치가 없는 옷장에 말이야. 광장공포증이라서 그런 건가. 네가 어릴 때도 옷장에는 숨어 있었던 적이 없었는데, 왜 꿈에서는 옷장에 숨은 건지 모르겠군.”

16549773373941.png“그런 꿈을 자주 꾸는데, 나도 왜 그런 꿈을 꾸는 건지 모르겠어. 어딘지도 모르는 어떤 방에서 나는 항상 옷장을 찾고 그 옷장 속으로 들어가는데, 나도 이유는 몰라.”

16549773373949.png“꿈을 꾸고 난 이후의 기분은 어때. 악몽을 꾼 것 같은 기분이 드나?”

16549773373941.png“그럴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고.”

시카르는 조금 생각하는 듯하더니 손으로 입술을 쓸었다.

16549773373949.png“조각이 없는 퍼즐을 보는 것 같군. 일단은 알았다. 이제 잠 다 잤으면 다시 시작하지.”

16549773373941.png‘연주를 또 듣자고?’

그러다 내가 또 자면 어떡하냐고 묻기도 전에 시카르가 핑거 스냅을 튕겼고, 곧이어 다시 그 졸린 연주가 귓가에 울렸다. 방금 한숨 잤던 까닭에 다행히 잠에 들 것 같진 않았지만, 시카르는 내가 또 잘 거라고 생각했는지 내게 손을 내밀었다.

16549773373949.png“대개는 남자들이 먼저 숙녀에게 춤을 권하지. 내가 이렇게 손을 내밀면 넌 내 손을 잡으면 되는 것이다.”

16549773373941.png‘저 손이야 쉴새 없이 잡았으니 손잡는 거야 어렵지 않지.’

나는 이 정도쯤이야, 라고 하듯 그의 손을 잡았지만 시카르의 마음에는 차지 않는 듯했다.

16549773373949.png“그렇게 의기투합하는 사람처럼 잡지 말고. 네 손이 나비라 생각하고 나비가 사뿐히 꽃잎에 내려앉듯이 손을 올려라.”

시카르가 시키는 대로 그 행동을 곧장 따라 했지만, 한 번에 되는 법이 없었다. 몇 번을 더 하고 나서야 시카르는 잘했다는 듯 무심한 얼굴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쯤 되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것도 해피가 좋아했던 것이라는 걸.

16549773373941.png“해피가 머리 쓰다듬어 주는 걸 좋아했나 봐?”

16549773373949.png“강아지한테 질투하는 건 아이에게 질투하는 것과도 같은 일이다.”

응?

16549773373941.png“질투가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을 뿐이야.”

시카르는 내 변명은 듣기 싫다는 듯 제 할 말만 했다.

16549773373949.png“적절한 칭찬은 학습능력을 더욱 끌어내는 법이지. 해피에게 식사 예절을 가르칠 때도 이런 방법을 썼더니 금방 배우더군.”

……이거 왠지 점점 시카르의 펫이 되어 가는 기분인데?

16549773373949.png“다음 동작은 이거다. 내게 손을 올리고 난 후 내가 너의 허리를 끌어당길 예정이다. 그리고 넌 곧장 내게로 안기듯 다가와야 하지. 명심해. 안기라는 말이 아니라, 안기듯 다가오는 거다. 우리 둘 사이에 강아지 한 마리가 지나갈 수 있는 거리는 둬야 한다는 걸 잊지 마.”

하지만, 이런 춤이 처음인 내가 그 거리를 정확하게 좁히기는 힘들었다. 그러니까 난, 시카르에게 덥석 안겨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이내 소름이 돋았다. 그가 나를 꼭 껴안았으니까. 내가 춤을 못 춘다고 내 몸을 으스러트리려는 건가. 시카르는 내가 등줄기에서 식은땀을 삐질 흘리는지도 모르고 자기가 좋아서 내가 폴짝 안겼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16549773373949.png“이런 식으로 내게 안길 구실을 만드는군.”

자기를 언제 잡아먹을지도 모를 포식자한테 안겨들고 싶을 사람은 없거든.

16549773373941.png“난 실수로 안긴 거지만, 넌 왜 나를 꼭 껴안는 거야?”

16549773373949.png“어떻게든 내게 안기려 드는 네 정성이 갸륵해서라고 해두지.”

16549773373941.png“그런 거 아니니까. 이거 놔.”

시카르는 전혀 관심 없다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놓았다. 그리고 다시 내게 손을 내밀었다. 연습을 계속하잔 뜻이었다.

16549773373949.png“오늘은 네가 거리를 적당히 좁히는 법을 깨우칠 때까지만 연습하지.”

키안이 지금 어떤 상황인지 너무 궁금했던 나는 이 연습을 빨리 마쳐야겠다는 생각이 먼저였다.

16549773373941.png“알았어.”

나는 조금 전보다 좀 더 의욕을 갖고 시카르와 함께 거리 두기를 연습했다. 내가 조금이라도 주춤하는 표정을 짓거나 하면, 시카르는 반복 학습의 효과에 대해 얘기했기에 나는 묵묵히 그 방법을 따라야 했다. 하지만 나는 곧, 그의 쉬지 않는 연습량에 나는 기진맥진해서 소파로 널브러지듯 주저앉았다. 그는 내게 손을 내밀었지만, 나는 그 손을 붙잡고 일어날 힘도 없었다.

16549773373949.png“일어나라. 은 아무리 피곤해도 그렇게 널브러져 있으면 안 되는 위치다.”

시카르의 목소리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기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저렇게 목소리에 힘을 주면 너무 무서웠으니까. 다행히 몇 번 더 같은 동작을 반복한 후에야 우리는 연습을 끝낼 수 있었다. 연습이 끝났단 얘기를 듣자마자 나는 키안이 비카와 잘 있는지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다. 설마 비카가 키안을 울리고 있지는 않겠지? 나는 키안의 안위를 확인하기 위해 식사도 하지 않고 시카르와 함께 2층으로 올라갔다. 키안이 너무 걱정돼서 미간의 주름이 펴지지 않았지만, 곧 그 걱정은 기우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방문을 열자마자 비카의 얼굴을 본 나는 웃음을 참느라 볼을 빵빵하게 부풀려야만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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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카는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입안 가득 사탕을 물고 앉아 있었다. 사탕은 키안의 아빠가 키안이 말을 잘 듣지 않거나 나쁜 소리를 할 때마다 키안의 입에 물려주던 것이었다. 역시나, 우리 주인공은 다크 엘프에게도 기가 죽지 않았었구나. 상황을 보니, 비카가 나쁜 말을 했고, 그때마다 키안이 사탕을 물려준 것이 눈에 훤했기에 안심이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웃음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시카르도 그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어쨌는지 비카를 조롱하듯 말했다.

16549773373949.png“볼이 빵빵한 게 아주 잘 어울리는군, 비카.”

비카는 우물우물거리며 사탕을 마저 씹어 먹고는 사카르를 보며 얄팍한 미소를 지었다.

16549773458117.png“우물우물. 비웃지 마. 곧 네 미래가 될 수도 있으니까.”

키안은 웃으며 우리에게 걸어와 차분하게 인사를 올렸다. 그래도 비카가 잘 가르쳤는지 왠지 조금은 더 의젓해 보이는 듯도 한데? 시카르가 비카의 기억을 읽고 그녀가 키안을 얼마나 잘 돌보았는지 체크 하느라 나가 있는 사이, 나는 키안과 나란히 소파에 앉아서 오늘 있었던 일들을 얘기했다.

1654977345812.png“사탕의 효과는 정말 좋은 것 같아요. 비카님의 입안에 사탕이 한가득 들어가니 더 이상 마귀 같은 말을 하지 않으셨거든요.”

그건 입안에 사탕이 많아서 말을 못 해서였지 않을까? 다크 엘프에 대해 전혀 모르는 키안이 보기에는 비카가 하는 말들이 마귀의 말처럼 들렸겠지. 키안이 사탕을 입에 넣어 줄 때마다 비카가 당황했을 것을 생각하니 눈물이 나올 만큼 웃겼다. 마음 같아서는 오늘 시카르에게 키안을 재우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날 급하게 죽을 먹여주는 걸 시도했다가 실패한 게 떠올랐다.

16549773373941.png‘그래. 천천히 하는 거야. 천천히. 악역과 주인공이 그렇게 쉽게 친해지기는 힘드니까.’

  *** 다음 날, 키안과 나는 나란히 서서 시카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시카르가 우리에게 보란 듯 내밀고 있는 서류를 보고 서 있었다. 서류에는 시카르와 나 사이에 키안의 이름이 등록돼 있었다. 시카르 블레이크와 유라 블레이크의 아들 키안 블레이크. 서류를 보고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16549773373941.png‘우리가 정말 가족이 되었어.’

16549773373949.png“다들 확인했지?”

시카르는 서류를 다시 돌돌 말아 제 품에 넣었다.

16549773373949.png“이제 우리는 진짜 가족이 되었다.”

나는 잘 이해하지 못할 키안을 위해 조금 더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16549773373941.png“키안. 이제 우리는 왕국의 국법에 따라 가족이 된 거야. 넌 이제 이 집의 유일한 계승자란다.”

1654977345812.png“계승자요?”

16549773373941.png“앞으로 네가 이곳의 주인이 되는 거야.”

물론 그전에 네가 왕이 되겠지만. 키안은 기뻐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슬퍼하지도 않았다. 그저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엄마 얼굴을 본 적도 없고, 얼마 전 아버지를 그렇게 보내고 난 후 얼마 되지 않아 생긴 새 가족이니 당연한 일일 것이다. 곰곰이 생각하던 키안은 나와 시카르를 보며 물었다.

1654977345812.png“이제 그럼 제 부모님이 되신 거예요?”

부모님이란 말에 시카르가 조금은 움찔하는 게 보였다. 저 젊은 나이에 부모가 됐으니 적응이 안 되겠지. 아니, 그것보다 자신이 이 나이에 아버지가 되리라는 건 상상도 못 했겠지. 시카르는 그 말이 매우 적응되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16549773373949.png“그래.”

나는 두 사람의 분위기를 조금 풀어줄 필요를 느꼈다.

16549773373941.png“가족이 된 의미로 악수 어때?”

시카르와 키안은 유감이라는 얼굴로 나를 보더니 마지못해 서로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건 악수는 아니고 그저 잠깐의 손뼉을 부딪히는 정도였다. 주인공과 악역 설정이라 이유가 없이도 서로 싫어할 이유가 명백하긴 했으니, 이해할 수 있었다.

16549773373941.png‘두고 보라지. 나중엔 눈물 없이 봐줄 수 없는 부자 사이로 만들어 놓고 말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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