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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주인공이 먼저지 (4) (19/197)

19화. 주인공이 먼저지 (4)2021.08.05.

시카르는 가족이 되었으니 초상화를 그려야 한다고 해서 우리는 아침부터 거실에 나란히 앉았다. 키안을 앞으로 내세우고 시카르와 나는 뒤에 앉아서 초상화가를 쳐다보았다. 우리의 얼굴을 살피던 시카르는 마음에 안 드는 듯 표정을 교정해주었다.

16549773573682.png“쓸데없이 웃지 마. 우리의 초상화는 후대까지 남겨질 텐데, 바보처럼 웃는 초상화를 남길 수는 없지. 지을 수 있는 표정 중 가장 당차고 위엄 있는 표정을 짓도록.”

시카르가 말한 당차고 위엄 있는 표정은, 내가 볼 때는 죽이겠다는 표정과 다를 바가 없었지만, 어쨌든 우리는 그가 원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한마디로 ‘다 덤벼’와 같은 표정을 지으며 앞을 바라보았다. 조금 지루함을 느낀 나와는 달리 두 사람은 그림이 완성될 때까지 미동 하나 없이 차분하게 서 있었다. 인내가 몸에 밴 주인공과 악역다운 자세였다. 꽤 오랜 시간 동안 한 자세를 유지하느라 그림이 완성되고 난 후에 우리는 쥐가 난 팔다리를 주무리느라 낑낑거려야 했지만, 완성된 그림을 보니 꽤, 보람 있었다. 머리 색과 눈 색깔이 모두 다른 우리 세 식구가 생각보다 꽤 잘 어울렸기에 매우 만족스러웠다. 우리의 가족 초상화는 황금과 각종 보석이 박힌 거대한 액자 속에 끼워졌다. 거실 벽면에 있는 할머니의 초상화 옆으로 우리의 초상화가 걸리었다. 나로서는 처음으로 찍어보는 가족사진과 마찬가지였다. 진짜 가족이 아니라 가짜 가족이라서 조금 씁쓸하긴 했지만, 그래도 의미는 있었다. 이 초상화 속에는 키안이 있으니까.

16549773573682.png“수고했다. 키안. 우린 할 일이 있으니 넌 이만 네 방으로 올라가도록.”

나는 아쉬워하는 키안에게 저녁은 같이 먹을 테니 이따 보자며 한쪽 눈을 찡긋거려주었다. 귀엽게도 키안 역시도 내게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16549773573691.png“나중에 봐요. 어머니.”

16549773573697.png“나중에 봐. 아들.”

키안은 나를 보며 방긋 미소를 짓고 계단으로 올라갔다. 키안과 아쉬운 작별 인사를 끝내고 우리는 시카르의 서재로 갔다. 오늘은 춤을 연습할 거라고 어제부터 말한 바람에 지난 밤에 또다시 탈출을 시도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키안을 생각하며 꾹 참았다. 탈출해봤자 금세 잡힐 게 눈에 훤하기도 했고. 시카르와 마주 보고 서 있자니 무서웠다. 그의 눈빛은 누가 보아도 ‘내 눈빛으로 너를 죽여버리겠다.’라고 말하듯 사람을 쳐다보는 것 같았으니까. 가혹하게도 내가 시선을 돌릴 때마다 시카르는 내 턱을 잡아 자신을 쳐다보게 하고 있었다.

16549773573682.png“춤을 출 때는 항상 파트너에게 눈을 떼지 말아야 한다.”

16549773573697.png“그럼 조금 서로를 부드럽게 쳐다보는 게 어때.”

16549773573682.png“춤을 출 때는 그렇게 흐리멍덩한 표정을 짓지 말고 서로에게 강렬한 눈빛을 보내야 하니 내 눈빛을 교정하려 들지 말고 네 눈빛을 교정해.”

시카르는 내 턱을 잡아 살짝 내리고 내 눈꼬리를 잡아 위로 올렸다.

16549773573682.png“이렇게. 알겠나?”

16549773573697.png“이건 위엄 있어 보이는 게 아니라, 동화 속에 나오는 사악한 악녀의 모습인 거 같은데.”

16549773573682.png“전혀, 매우 위엄 있어 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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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9773573697.png“이게? 이런 건 전형적인 악녀의 표정이라고 하는 거야.”

16549773573682.png“평생을 소심하게 살았으니 알 수가 없겠지. 앞으로는 자주 이런 표정을 짓도록 해.”

글쎄. 내가 볼 때 시카르는 모든 악역의 표정을 위엄 있고 품격 있다고 정의 내린 것 같은데. 그래서 늘 저렇게 나른하고 무감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거군.

16549773573697.png“차라리 악녀가 되라고 해.”

16549773573682.png“그래. 그게 낫겠군. 차라리 악녀가 돼라.”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기에 나는 시카르가 위엄 있어 보인다고 착각하는 악녀 같은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이건 누가 봐도 눈싸움인데. 눈도 깜빡거리지 못하게 해서 눈물이 날 정도로 두 눈을 부릅뜨고 있으니 시카르는 잘했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저런 표정을 지을 때마다 너무 무서웠기에 나는 곧장 어제 배운 대로 다음 동작을 이었다. 시카르가 내민 손에 손을 올리고 그가 하는 대로 춤이란 걸 추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16549773573682.png“긴장하지 마. 어차피 우리가 춤출 땐, 국왕과 왕후밖에 없을 테니까. 사람 많은 데서 춤추게 하진 않을 테니까 벌써부터 떨 필요 없다.”

그래서 떠는 게 아니라 너 때문에 떠는 거거든. 시카르와 춤을 추는 내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라곤 사방에 걸려 있는 날카로운 장검들이었다. 분명히 이곳은 서재인데 책보다 장검들이 더 많이 보이는 것이 꼭 언제라도 저 장검을 들어서 내 목을 베겠다고 무언의 협박을 하는 것만 같았다. 그래도 뭐, 춤 선생으로 시카르는 나쁘지 않았다. 차근차근 천천히 잘 가르쳐 주며 같은 것을 몇 번이고 되풀이하며 반복하게 했다. 시카르가 이른 나이에 저 많은 업적을 거두었던 이유는 그가 기운이 세고 마력 저항력이 높은 시타르 족인 것도 있었지만, 지치지 않고 같은 것을 반복하는 끈질긴 노력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그는 복습의 달인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 끈질긴 복습을 내게 시키는 바람에 나는 딱 죽을 맛이었다.

16549773573682.png“제아무리 어려운 것도 반복하다 보면 익히지 않을 수 없는 법이지.”

누가 그걸 모르나. 힘드니까 그렇지. 나는 빨간 구두를 신은 것처럼 꼼짝없이 잡혀서 기진맥진이 될 때까지 같은 춤을 반복했다.

16549773573682.png“오늘은 여기까지.”

춤이 끝난 후 나는 또다시 비척비척 소파로 걸어가 벌러덩 널브러지듯 기대었다가 나를 노려보는 시카르의 눈총에 다시 얌전히 앉았다.

16549773573682.png“내일부터 당분간 이와 똑같은 춤을 매일 반복할 것이다. 그리고 해 질 녘 전에는 그 착해 보이는 표정을 교정하고 귀족의 격식을 익히도록 하지.”

그러니까 그의 말은 나도 그와 같이 늘 무감한 표정을 짓고 있으란 뜻인가?

16549773573682.png“먼저 지금 안드레아에게 일러 항상 네 방 창문을 열면 새빨간 장미가 잘 보일 수 있게 장미를 심으라고 해라.”

16549773573697.png“이 한겨울에?”

16549773573682.png“신전에서 파는 신성수를 쓰면 별 탈 없이 잘 큰다.”

16549773573697.png“장미는 왜…….”

16549773573682.png“넌 너무 가시가 없어. 그래서 언제든 비집고 들어갈 빈틈이 많지.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창가를 열고 새빨간 장미를 보고 배워라. 아름다워도 가시가 돋치면 누구도 쉽게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을. 물론 네가 가시를 가져봤자, 물렁 가시겠지만. 그래도 지켜보겠다. 네가 어떤 가시를 가지게 될지.”

16549773573697.png“널 찌를 수 있을 만큼 거대한 가시를 갖도록 해볼게.”

16549773573682.png“기대하지. ”

난 시카르가 지켜보는 가운데 안드레아를 불러 장미를 심으라고 일렀다. 안드레아에게 자기가 전할 수도 있는 말이지만, 집안의 안주인답게 사람을 부리는 일에 적응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이런 일은 모두 내게 시키는 중이었다.

16549773573682.png“사용인들에게 쓸데없이 친절하군.”

16549773573697.png“난 갑질이 싫어서 그래. 아, 그러니까 갑질이 뭐냐면…….”

16549773573682.png“알고 있다. 네가 부자들에게 수도 없이 당한 일들을 말하는 거겠지.”

16549773573697.png“그래. 그래서 난 사용인들에겐 인망 좋은 이 되고 싶어. 그들은 날 위해 일해주는 사람들이잖아.”

16549773573682.png“쓸데없긴.”

눈치를 보니 그런 건 괜찮다는 투였다. 시카르도 자신이 부리는 사용인들을 함부로 무시하거나 그런 일은 없었으니까. 키안과 깊은 교감을 나눌 시간도 없이 나는 매일 같이 진짜 되는 법을 배웠고, 키안도 비카에게서 귀족의 자녀들이 배우는 격식을 배워 나갔다. 시카르의 말처럼 같은 행동과 말투를 매일 반복하다 보니 나 스스로도 내가 점점 변화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느낌이 품위 있는 이 되어가는 느낌보다는, 어둡고 칙칙하고 흑화되어 가는 느낌이라는 게 애석했지만. *** 그러는 동안 루시를 볼 수 있는 시간도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다음 루시의 가출에서 그녀를 찾아 후작저로 데려갈 예정이었다. 하지만 계획은 순순히 흘러가지 않고 긴박하게 돌아갔다. 최애를 두 번째로 만나기 며칠 전날. 루시가 가출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후작저를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시카르가 금발의 푸른 눈을 가진 아이를 입적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길리언이 키안을 보기 위해 공작저를 방문하겠다고 했기 때문에 서둘러야만 했으니까. 그래서 원래 계획대로 천천히 레이독스와 친분을 맺을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16549773573682.png“라이제몬 그 자식이 길리언에게 키안의 목덜미를 확인해보라고 했더군. 어서 서둘러야겠다. 레이독스에게는 내가 직접 얘기하도록 하지. 키안이 바로 베로니아의 자식이라고.”

레이독스가 점잖아도 바보는 아니었다. 원작에서 그가 키안을 구해준 것은 키안이 길리언이나 시카르의 적이기 때문이었지만, 이제는 키안이 비록 양아들이긴 해도 시카르의 자식이라는 것을 알면 도와주지 않을 수도 있었다. 레이독스는 시카르를 견제하기 위해 설정된 인물이기에 그만큼 보이지 않는 적대감을 갖고 있었다. 어쩌면, 본인조차도 왜 그렇게 시카르를 싫어하는지 모를 만큼의 적대감을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 시카르가 본능적으로 키안에게 적대감을 갖는 것처럼. 그러니, 레이독스에게 잘 설명하지 않으면 우린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한다. 아니, 어쩌면 되레 키안의 존재를 길리언에게 밀고할 수도 있겠지. 그래서 천천히 친분을 쌓으려 했던 것이었고. 레이독스에게 길리언이 폐왕 못지않은 폭군이란 것을 알리려면 그를 잘 설득하는 수밖에 없었다. ***

16549773667852.png“갑작스런 방문에 당황스럽군요. 무슨 일이십니까?”

바람 한 점 들지 않는 후작저 응접실에 차가운 냉기가 감돌았다. 우리의 방문 소식을 듣고 온 레이독스의 표정에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자리에 앉지도 않았기에 나는 그를 보자마자 벌떡 일어섰지만 시카르는 팔짱을 끼고 앉아 있기만 했다. 그래서 나는 시카르의 팔을 잡아 위로 끌어 올렸다. 힘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오는 길에 마차 안에서 내 말을 따르기로 합의를 본 탓에 시카르는 마지못해 일어섰다.

16549773573697.png“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어요.”

레이독스는 내가 아닌 시카르를 보며 물었다.

16549773667852.png“저와 나눌 말이 있는지는 몰랐습니다.”

16549773573682.png“대화는 내 아내와 나누도록 해라.”

오기 전 마차 안에서 내가 레이독스를 설득하는 게 좋겠다고 했고 시카르도 그게 낫겠다고 인정한 부분이었다. 레이독스는 마지 못한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16549773667852.png“일단 앉으시죠.”

16549773573697.png“감사합니다.”

다시 자리에 앉고 나자 하녀들이 차를 가져왔다. 하녀 한 명이 레이독스의 찻잔에 차를 따르려 하자, 나는 하녀를 향해 손바닥을 내보이며 그 찻잔을 받아 레이독스의 찻잔에 직접 차를 따라주었다. 불편한 자리가 못마땅한 듯 앉아 있던 레이독스는 뜻밖이라는 얼굴로 나를 보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16549773667852.png“감사합니다. 블레이크 .”

나는 찻잔을 내려놓고 그를 향해 차분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시카르는 내가 이렇게 미소를 지을 때마다 기껏 위엄과 품위를 가르쳤더니 또 온화한 미소나 지어 보인다고 탐탁지 않아 했었다. 힐끗 쳐다보니, 역시나 시카르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시카르는 나만 들을 수 있게 내게 속삭였다.

16549773573682.png“설득하라고 했더니, 설설 기는군.”

그래서 나도 나직이 속삭여 주었다.

16549773573697.png“설득하려는 거야. 시카르. 넌 이걸 알아야 해. 사람의 마음을 얻으려면 호통을 치는 게 아니라 호의를 베풀어야 한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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