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주인공이 먼저지 (5)2021.08.09.
“잘해봐. 아까 약속한 대로 잘 성사 시키면 하루 동안 외출을 허락해줄 테니까.”
당연히 난, 반드시 레이독스를 설득할 생각이었다. 꼭 외출권 때문이 아니라, 대참사를 막기 위해서.
“후작님께. 반드시 알려 드려야 할 일이 있어서 이곳에 오게 됐습니다.”
“제가 반드시 알아야 할 말이요?”
“발리제 타히곤 님을 아시나요?”
“알다마다요. 베로니아 공주님의 부군이 아니십니까? 그 때문에 베로니아 공주님께서는 승계에서 제외되셨죠. 그 정령사가 아니었다면, 공주님이 이 나라의 국왕이 되셨을 테죠. 그랬다면 죽은 폐왕이 국정을 망치는 일도 없었을 테고, 지금의 국왕도 없었겠죠.”
그 말은, 지금의 국왕도 없었다면 시카르가 왕 노릇을 하지도 못했을 것이라는 걸 말하는 것과 똑같았다. 거기까지 말한 후 레이독스는 시카르가 들으란 듯 쳐다보며 찻잔을 들었다.
“안 그렇습니까? 공작님?”
‘이거 원작에서 레이독스가 시카르에게 한 말과 똑같잖아?’
원작에서 이다음엔 시카르가 실수인 척 잭나이프를 꺼내 들어 레이독스의 얼굴에 상처를 냈었다. 설마 그럴 건 아니지? 그렇게 일을 망칠 건 아니지? 나는 불안한 눈으로 시카르를 쳐다봤지만, 다행히 시카르는 무표정한 얼굴로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랬겠지.”
다행이었다. 잠시 동안 얼마나 간을 졸였는지 모른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치분하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 베로니아 공주님 슬하에 아들이 한 명 있다는 건 알고 계십니까?”
당연히 모르겠지. 모르는 거 알고 물은 거다. 그 순간 레이독스의 눈이 번쩍하고 빛났다. 그동안 내게 우호적이던 눈빛이 한순간에 경계로 바뀌었다.
“그건 무슨 말입니까?”
“공주님 슬하에 일곱 살 된 아들이 있어요. 국왕 전하의 조카가 되는 분이죠.”
레이독스는 그런 해괴한 소리는 처음 들어본다는 듯 헛웃음을 쳤다.
“혹시 제가 공주님의 아들을 알고 있거나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고 찾아온 겁니까? 그렇다면 잘못 찾으셨습니다. 전 그런 일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니까요.”
아. 그렇게 오해할 수도 있겠네.
“아니에요. 후작님. 그 반대예요.”
“공작부인께서 제가 들을수록 모를 소리만 하신다는 건 알고 계신지요? 그 반대란 말이 무슨 말입니까?”
곧 시한폭탄 같은 말을 던져야 했기에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키안의 존재를 밝히는 일이다 보니 심장이 쿵쾅쿵쾅 뛰어왔다. 나는 준비가 됐다는 걸 확인받기 위해 시카르를 한 번 쳐다보았다. 시카르는 어서 하라는 듯 나를 향해 고개를 까닥거렸다.
“저희가 그 베로니아 공주님의 아들을 입양했다는 말을 전해드리는 겁니다.”
“그게 무슨…….”
레이독스는 아주 충격을 먹은 표정이었다. 그는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냐는 듯 허망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다가 시카르에게 시선을 돌렸다.
“왜 제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국왕을 허수아비로 두는 걸로는 부족해서 공작님께서 이제는 왕손을 왕좌에 앉힌 후 국왕의 아버지가 되려 하는 것입니까?”
결국, 이렇게 받아들이는구나.
“그런 게 아니에요. 아주 오래전부터 국왕은 베로니아 공주님을 어딘가에 가둔 후 왕손을 찾고 있어요. 그 과정에서 정령사 발리제는 죽음을 맞이했고요.”
“그런데, 공작부인께서 그 모든 사실을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고 계실 수가 있는 겁니까.”
“저희가 왕손 저하를 발견하고 저하께 직접 들었으니까요.”
레이독스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얼마 전 공작님께서 금발의 푸른 눈의 아이를 입적했다고 들었습니다. 소문으로는 의 친아들이라고 들었는데,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습니다. 제가 본 은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가지신 분이셨으니까요. 왜, 왕손 저하를 아들로 입적하신 겁니까?”
“아직 왕손 저하는 자신이 이 나라의 왕손인지 모르고 계십니다. 하지만 국왕께서는 저하를 찾고 계시죠. 그래서 저희가 왕손 저하를 보호하기 위해서 아들로 입적을 시킨 겁니다.”
점잖은 레이독스의 얼굴에 잠시간 노기가 스쳐 지나갔다. 그가 아는 시카르는 왕손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는 그런 인간이 아니었기에 우리의 농간에 놀아나지 않겠다는 의미와도 같았다.
“그러니까 더, 이상한 겁니다. 국왕 전하께서 찾고 계신 왕손 저하를 공작님께서 왜 입적시켰는지 말입니다!”
“그건, 지금의 국왕 전하께서 폐왕과 같은 행보를 걷게 될 것이기 때문이에요.”
레이독스의 얼굴이 조금 전보다 크게 일그러졌다.
“그러니까, 지금의 말씀은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예견이라도 하신다는 겁니까? 아니면, 혹시 공작부인께서는 점술가이십니까? 국왕 전하께서 지금 폐왕과 같은 행보를 걷고 있는 것도 아니고, 걷게 될 것이라고요?”
레이독스는 더 말할 가치가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의도로, 어떤 목적으로 저를 찾아왔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거 하나만 말씀드리죠. 저는 결코 공작님의 편에 서지는 않을 것이라는 걸요. 또, 이 왕국이 공작님의 손에 들어가게 두지는 않을 거라는 겁니다. 그럼 잘 가십시오.”
레이독스가 뒤도 안 보고 돌아서려는 찰나, 그가 나가려는 문 앞으로 잭나이프 하나가 튀어나와 꽂혔다. 나는 고개를 홱 돌려 시카르를 쳐다보았다. 시카르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하고 무심한 얼굴로 레이독스를 보고 있었다.
“아직 말 안 끝났으니까. 앉아라.”
“공작님은 정말 제 멋대로이시군요.”
“잘 알고 있으면 더더욱 앉는 게 신상에 좋겠지.”
좋게 해결하기로 해놓고 또 그런다. 또. 나는 이를 악물고 복화술을 하듯 시카르에게 넌지시 귓속말로 속삭였다.
“좋게 말하기로 했잖아. 그리고 지금 할 말은 그 말이 아니야. 계획대로 해. 계획대로.”
시카르는 나를 한 번 힐끗 노려보고는 제 머리를 쓸어 넘기며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아내가 미래를 본다. 그래서 하는 말이니 앉아라.”
그래도 이 정도면 딴에는 꽤 친절하게 말한 것이라는 걸 레이독스도 알고 있을 터였다. 레이독스는 헛소리를 많이 들어서 정신이 없다는 듯 머리를 몇 번 갸우뚱, 눈을 몇 번 깜빡거리며 우리를 번갈아 보았다. 정신이 어떻게 된 건 아니냐는 듯 묻고 있는 눈빛이었다.
“미래를 본다는 걸 믿으란 겁니까?”
“믿지 못하시겠지만, 네, 그래요. 얼마 전 제가 루시를 데려온 일을 기억하세요? 그건 우연이 아니었어요.”
“마치 루시가 가출하게 부추기기라도 하셨단 말씀처럼 들리는군요.”
“루시가 가출한 후 그곳을 서성일 것을 알고 있었던 거죠. 제 말을 믿을 수 없겠죠. 하지만, 딱 3일 후 루시가 또 집을 나갈 거예요.”
레이독스는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 말을 더더욱 신뢰할 수 없다는 얼굴로 날 쳐다보았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루시를 찾아 준 그날, 후작님께서 루시에게 엄마가 하늘의 별이 되었다는 말을 해주었고 그래서 다시는 루시가 가출하지 않을 거라고 믿고 계신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지금까지 우리 말을 결코 믿을 수 없다는 자세를 취하던 레이독스의 표정에 처음으로 변화가 일었다. 내가 그것까지 알고 있다는 걸 몰랐겠지. 또다시 레이독스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것은 좀 전과는 전혀 다른 의미의 모습이었다. 어떻게 그런 사실까지 알고 있냐는 표정이었으니까.
“하지만 루시는 제 엄마를 찾아다닐 거예요. 루시는 엄마 별을 만날 거라고 믿거든요. 그래서 이젠 밤이면 밖을 헤매게 될 거예요. 오늘은 여기까지만 말씀드릴게요. 우리의 얘기를 더 들어볼 마음이 생기게 되면 언제든 공작저로 서신을 보내주세요.”
나는 딱 여기까지만 들려주었다. 그래야 그와의 다음을 기약할 수 있으니까. *** 겉으론 내색하지 않았지만 얼마나 긴장을 많이 했는지 나는 마차에 타자마자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 버릇은 정말 고치질 못하는군.”
“이건 고치거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나 정말 얼마나 긴장했는지 몰라.”
아마 시카르가 시킨 대로 반복적인 연습을 하지 않았더라면 저렇게 침착하게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시카르는 팔짱을 끼고 앉아 레이독스와의 대화를 반추하고 있는 듯했다.
“레이독스가 우리의 말을 믿을 것 같진 않다. 반신반의하고 있겠지. 루시가 다음번에 확실하게 가출을 하고 난 후에야 어쩌면 조금은 믿을지도 모르겠군.”
“루시가 가출을 몇 번은 더 시도해야 믿을 것 같긴 한데……. 루시가 가출하게 그냥 둘 것 같진 않아.”
“그러겠지. 아마 사람을 붙일 수도 있겠지.”
“그래도 루시가 계속 가출을 시도하는 걸 보면 우리를 찾아올 거야. 우리 말을 믿든 안 믿든 레이독스는 제 딸을 위해서라면 뭐든 다 할 사람이니까.”
“그렇지. 문제는 그렇게까지 늦지 않았으면 하는 거지만.”
“지금으로선…….”
“맞아. 이제 생각나는군. 얼마 뒤에 유카나다르에서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소년의 엄마가 죽게 되지. 길리언의 근위대들이 키안을 찾다가 엉뚱한 사람을 죽이게 되는 일이 발생하고, 그 일 때문에 레이독스는 길리언에게 분노하지. 그걸 이용하면 되겠군. 그 애의 엄마가 죽을 때까지 기다려야겠어.”
맞아. 그때가 아이의 엄마가 죽었어. 모르면 모를까, 그 사실을 떠올린 이상 나는 그 아이의 엄마가 죽게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아, 안 돼. 시카르. 그 여자를 구해야 해.”
“어째서.”
“그 여자가 죽는다는 걸 알고도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으니까!”
“생선을 낚아야 하는데, 미끼를 살려주자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군.”
이 냉혈한 같은 놈.
“그 여자를 살리고 레이독스가 미끼를 물게 할 방법을 생각하면 돼.”
“그런 이유로는 나를 납득 시킬 수가 없다. 정 그 여자를 살리고 싶거든 명백한 이유로 나를 설득해봐.”
명백한 이유…….
“그래! 내가 미래를 본다고 했잖아. 미래를 본다고 했는데 그런 일을 그냥 방관한다면 레이독스는 내게 더 신뢰를 갖지 못할 거야! 레이독스는 그 여자가 죽었을 때 자신의 아내를 떠올리고 분노했어. 엄마 없이 혼자 자라게 될 아이를 보고 자신의 아이들을 떠올린 거지. 그래서 길리언을 용서할 수가 없었던 거야. 그 여자를 그냥 죽게 내버려 둔다면 레이독스에게 나는 길리언과 똑같은 사람이 되는 거야!”
시카르가 내 설득에 넘어갔을까. 나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의 표정을 살폈다. 원래 별 표정이 없는 시카르였기에 무표정한 그 얼굴에서 그가 무슨 생각하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는 그저 무감한 눈으로 나를 보며 간단명료하게 말했다.
“잘 설득했군.”